467화
“너희가 내게는 모든 걸 숨기려고 해서 밀로 네게 묻는 거야. 이쪽 전력이 어떻게 돼.”
“우리가 뭘 숨겼다고…….”
“이야, 진짜 서운한데? 쟤네는 타 종족인데도 ‘우리’야? 그럼 너한테 난 뭐야.”
“왜 이래, 갑자기. 용이 언제 그런 거 따졌어?”
밀로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킨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건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가 내뱉은 말인데도 웃기다. 밀로가 말하는 ‘우리’라는 단어에 그렇게까지 발끈할 필요가 있었나. 진짜 고작 몇 달 이곳에 있었다고 육지 동물인 척하고 있는 제 자신에 혐오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저들이 제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건 진실이다. 백조가 암컷 용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조차 킨은 엿들어서 알아낸 사실이니까. 그러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제게 숨기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겨우 전략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정도의 자격으로는 이쪽 동맹군의 전력을 전부 파악할 수 없어서. 제아무리 킨이라고 해도 하나뿐인 목숨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 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전력이 어떻게 되냐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며칠 전에 봤던 그 괴물 같은 놈들. 그게 끝일 거라고 생각해?”
“…….”
“그것들이 떼로 달려들어도 너희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평소와 다른 킨의 냉정한 목소리에 밀로는 착잡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황궁은 온통 정신없는 일투성이였다. 출산을 앞둔 이엘 때문에 일부 종족의 수장들은 황궁을 지키고 있었고, 기사단과 그 아래 종족들이 제도와 요새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명 지난번의 승리는 동맹군이 가져갔는데도 여전히 전장과 황궁은 뒤숭숭했다. 이 와중에 괴생물체가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맹군의 사기를 꺾었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고요한 공포에 젖어 있었다.
떼로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있겠냐고……. 킨의 질문을 곱씹던 밀로는 한숨처럼 털어놓았다.
“글쎄……. 솔직한 말로는 너랑 내가 힘을 합쳐서 겨우 한 마리를 처리할까 말까 한 정도잖아. 떼로 몰려든다면 솔직히 가망이 없지.”
땅을 파고 기어 올라왔던 두 번째 괴물을 처리했던 건 전적으로 유클리드의 능력과 순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마저도 직전에 처리한 놈과 동종이었으니 겨우 해결할 수 있었던 거고. 킨의 말처럼 떼로 달려든다면…… 솔직히 대륙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멸할지도 모르겠다.
낙관적인 용이 저렇게나 비관적으로 변할 일인가. 킨은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밀로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쟨 지상에 너무 오래 노출돼서 저가 육지 동물인 줄 아나 봐. 용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건 전부 사라져 버렸네. 그게 딱하다기보다는 조금 미련스러워 보였다.
“설마 그런 게 더 있을까? 네 생각은 어때, 킨……?”
밀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말투로 킨의 의견을 물었다. 킨은 오래 살았으니까 별별 것을 다 보지 않았겠는가. 물론 자신도 오랜 산 건 매한가지긴 하지만 킨에 견줄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밀로가 재차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킨.
“충분히 더 있고도 남지.”
“정말? 저게 끝이 아니라고?! 미쳤어. 이건 자폭이야. 이런 식이면 그냥 모두 죽는 꼴이라고.”
밀로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뭔가 마음을 먹은 건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로 문고리를 잡았다. 오히려 킨이 그를 붙잡아 말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너 뭐 해? 어디 가?”
“올리세스 죽이러.”
“…….”
“걔를 죽여야……,”
“그런다고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겠어?”
“…….”
“잔말 말고 그 백조가 사라진 곳으로 안내나 해.”
“왜 아까부터 백조 얘기야? 아니. 그보다 백조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고.”
“그건 알 것 없고. 백조가 암컷을 찾던 장소. 거기 맞지? 여기 말로 성전이라고 하나?”
그동안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여기저기서 정보나 캐고 다녔나. 밀로는 질색한 얼굴로 킨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린 어차피 그 암컷 용에게 갈 수 없다니까? 걔는 특수한 경우라서 암컷을 만날 수 있는 거고, 아무리 성전이라는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암컷이 있는 장소가 거기가 아니니까 우린 만날 수가 없다고.”
“성전은 맞단 소리네.”
“……야!”
함정에 걸렸다. 밀로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한참 씩씩거리다가 결국 먼저 포기하고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스완은 이미 사라졌다. 킨에게 경고한 것처럼 그 장소에 간다고 해서 킨이 암컷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반쯤 포기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야.”
“거기로 날 데려가.”
“네가 무슨 짓을 할 건지 말 안 해 주면 나도 못 데려가.”
“말하면. 그럼 데려갈 거야?”
“그건 봐야지. 폭주 직전인 널 데려가도 좋을지 어떨지.”
폭주 직전……. 밀로의 냉혹한 평가에 킨은 비소했다. 용의 폭주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다른 이종족들과 달리, 밀로는 동족이기에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 어린 용도 염려라는 것을 하는 거겠지. 킨은 혀를 쯧, 차고는 대수롭지 않게 제 계획을 늘어놓았다.
“거기서 내 비늘을 떼.”
“그래, 거기서 네 비늘을 떼서 광증을 막……뭐어?!”
“날 재우라고.”
“너 전조 증상이라도 나온 거야? 그래서 미리 잠들려고 하는 거야?!”
“멀쩡해, 난.”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진짜 죽을 때가 됐나. 안 하던 짓을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맛이 갔나 보네.”
못 하는 말이 없다. 킨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밀로는 저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진짜 폭주가 코앞인가. 광증이 시작됐나. 저걸 진짜 그냥 둬도 되나. 아니면 진짜 비늘을 떼 버려? 아, 어떡하지…….
“비늘 떼라고. 뭘 고민하는 거야.”
“그럼 고민이 안 되겠냐? 비늘은 생명이야. 내가 네 비늘을 부러뜨리거나 없애 버리면. 그럼 너는 영원히 잠들어 있게 된다고.”
“새삼스럽게 뭘. 내 친구들은 전부 잠들었어. 내 손으로 재웠고 네 손으로 재웠지.”
“…….”
“네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저 인간 여자에게 열매를 내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많은 동족들의 비늘을 뗐다고. 설마 그것도 잊고 살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던 건 아니지?”
신랄하게 비꼬는 킨의 말에 밀로가 짐짓 미간을 찌푸렸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동족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용에겐 의미 없는 단어다. 하지만…… 킨은 조금 다르다. 이상하게 지상에 데려와 여기서 긴 시간을 함께 보내서인지, 육지 동물처럼 킨이 신경 쓰인다.
그런 밀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킨은 다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 비늘을 떼면 사실상 태초에 있었던, 최초의 용들은 전부 죽어 버린 셈이야. 알지?”
“그래서 안 되는 거잖아. 네가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고.”
“이젠 괜찮을 것 같아.”
“…….”
“암컷 용이 한 마리라도 너희 쪽에 붙어 있다면. 그녀들이 내려온다고 해도 너희에게 해가 되진 않겠지.”
“정말 네가 잠들면…… 암컷들이 여기에 내려온다는 거야?”
“일단 내 생각엔 그래. 그것도 확신할 순 없지만.”
킨이 잠들면 암컷 용들 중 일부가 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다. 최초의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마지막 남은 킨까지 잠들게 되면 그녀들이 이곳에 올 것이다.
“걔들이 있어야 저 괴상한 생물체도 처리가 가능해. 지금의 너희 힘으론 턱도 없으니까.”
“왜 안 하던 짓을 해? 언제부터 우리 일에 신경 썼다고.”
“지겨워.”
“…….”
“다 지겨워졌어. 살육에도 흥미가 떨어졌고. 어차피 네 말대로 저 괴물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건데, 그런 멍청한 엔딩은 맞고 싶지 않아.”
“희생하겠다는 거야?”
“뭔 소리야. 일이 다 처리되고 깔끔하게 끝나면 나한테 비늘 도로 붙여. 난 안 죽어.”
그렇게 대답한 킨은 휘파람을 불며 밀로의 침실을 나갔다. 빨리 안내 안 해? 복도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바람에 밀로도 다급히 침실을 나와야만 했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이게 정말 진심일까? 쟤가 우리 골리는 거 아니야?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밀로는 알고 있었다. 암컷 용들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그녀들은 단순히 성력을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나자르나 스완처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긴 시간을 신의 곁에 머물면서 성력에 노출돼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였다. 그러나 그 활용도나 능력치는 스완에 비할 바가 안 된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밀로는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급해 킨을 앞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에 킨이 키득키득 웃으며 한 소리 했다.
“역시 동족 같은 개념이 전혀 없네. 약간 서운한데? 그래도 비늘 떼는 건 나름대로 내 목숨을 걸어서 너희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의미였는데 말이야.”
“하나도 안 서운해 보이거든.”
“들켰네.”
“비늘 붙여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잠이나 자. 꼭 깨워 줄게.”
이종족에 비하면 용의 모든 개체는 오래 산 편에 속하지만, 킨의 눈에 밀로는 한없이 어린 용이었다. 그래서 저 말엔 딱히 신뢰가 안 간다. 저 덤벙거리는 성격에 비늘을 잃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조금 아쉽긴 하다. 죽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던 게 여러 개였는데. 이를 테면 신을 직접 만나 뵙는 것. 혹은 암컷 용들은 여전히 그때와 똑같이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 이러한 것들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미련이 남는 건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신의 열매를 훔쳐 달아났으니 중죄에 속하고, 여전히 그 열매에 미련이 남으니 죄를 용서받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곧 자신도 광증을 앓게 되겠지. 그렇게 추잡해지는 제 모습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킨은 언제라도 제 비늘을 뗄 각오로 여태 살아왔던 것이다.
밀로와 함께 황궁 밖으로 나온 킨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린 저 위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그마저도 매번 거처를 옮겨야만 살 수 있는데. 암컷들은 여전히 신의 곁에 살고 있다니…….
부럽다. 그래, 이 감정은 부러움이 분명하다. 수많은 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당장 죽음을 눈앞에 둔 지금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감정이었다. 부러움. 그래, 나는 여전히 암컷들이 부러워.
그리고 여전히…… 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과연 내가 죽으면,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신이 만든 창조물들은 신을 향한 믿음만 있다면 죽은 뒤에 그분의 품으로 돌아간다는데,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신의 용서를 받고 이 끔찍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킨은 그게 미치도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