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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6화 (466/488)
  • 466화

    패티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것을 듣고, 레온은 이엘이 잠든 침대가로 조금 더 다가갔다. 불룩하게 솟은 그녀의 배는 아기가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레온은 감히 손은 대지 못해서 괜히 허공만 움켜쥐었다.

    레온은 패티스와 달랐다. 그는 벌써 그녀의 아이를 사랑하게 돼 버렸다. 모든 아이는 소중해. 특히 저렇게 부모가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겠지. 연구소에서 내 어머니도 나타니엘과 똑같았을까? 아니면 내가 죽기를 바라고 배 속의 나를 원망했을까?

    뭐가 됐든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확실한 건 어미와 아비 모두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나타니엘의 아이, 테오도로도 살려야 한다. 저 애를 반드시 살려야 해.

    “나타니엘.”

    “……으으.”

    “나타니엘. 잠깐만 눈 좀 떠 봐.”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던 이엘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제 새벽에 또 한 번의 강한 진통으로 고함을 내지른 터라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이엘을 보며, 레온은 협탁 위에 놓은 물컵을 들어 그녀의 목을 축여 주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손이 레온의 얼굴에 닿았다. 레온은 허리를 숙여 자세를 맞춰 주곤 웃으며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할 말이 있어, 나타니엘.”

    “…….”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구나.”

    또 눈물이 쏟아졌다. 의식이 있을 때의 이엘은 레온의 갈기 따위 결코 받지 않을 거라며 강하게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인도 알고 있겠지. 이대로면, 이대로 통증을 이기지 못하면 자신도 아이도 모두 죽을 거란 걸.

    “괜찮아. 울지 마. 응?”

    “……르, 레, 레온…….”

    “응. 나 여기 있어.”

    레온이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눈에도 이엘처럼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내 갈기 받아 주면 안 될까?”

    “…….”

    “제발…… 내 소원이야, 나타니엘. 응? 너무 힘들어……. 널 지켜보기만 해야 되는 내가 너무 힘들어, 나타니엘.”

    그 말을 끝으로 레온은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어미를 잃은 새끼처럼 엉엉 우는 레온의 모습 위로, 언젠가 환상처럼 보였던 테오도로의 모습과 겹쳐졌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짧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내게도 의미를 줘. 나도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줘, 나타니엘.”

    “…….”

    “어차피 난 영존하지 못해. 언젠가 죽어. 그러면…… 이 남은 갈기를 널 위해 줘도 되지 않을까? 응?”

    침대 시트가 젖을 만큼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엘은 레온을 향한 미안함 때문이었고, 레온은 그녀에게 이런 것밖에 해 줄 수 없는 무력함 때문이었다.

    “사실 나…… 어릴 때 이후로 본체화를 해 본 적이 없어. 연구소에서 갈기를 뽑혔기 때문에 본체화를 하는 게 두려웠어. 그러면 내 갈기가 얼마나 형편없을지 목도해야 하니까. 그게 너무 부끄럽고 싫었어. 끔찍했어. 사자도 호랑이도 아닌 내 모습이 너무 싫었어.”

    “……응.”

    “하지만 네 앞에서라면 괜찮을 것 같아. 넌 다정하고 따뜻하잖아. 그러니까 내 형편없는 모습도 네겐 보여 줄 수 있어, 나타니엘.”

    이엘의 녹색 눈동자에 레온의 말간 얼굴이 담겼다. 그녀는 레온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레온은 용기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본체화를 해야만 하는 용기가.

    이종족이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숱하게 봐 왔지만 레온의 본체화는 유달리 느릿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지켜봤다. 바닥에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고 그 바람이 레온의 발을 타고 점점 위로 솟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엘의 눈앞엔 커다란 짐승이 네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내가 봐도 처참하네…….”

    레온은 제 발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를 힐끗 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처참하다. 정말로 처참하고 처량했다. 갈기가 있어야 할 곳이 거의 대부분 민숭민숭했다. 듬성듬성 몇 가닥씩 나 있는 것들을 과연 갈기라고 할 수 있을까? 색이 조금 다른 털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레온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뜯겼었구나. 어릴 때 뜯겼던 곳은 역시나 재생되지 않았다. 보통의 이종족과 달리 타이곤의 갈기는 특별하기 때문에, 한 번 뽑히거나 잘린 부분은 재생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무너졌다. 역시나 본체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멋있어…….”

    그때 이엘의 작은 목소리가 레온의 어두움을 깼다. 하얗게 마른 손이 그의 갈기를 향해 뻗어졌다. 레온은 조금씩 다리를 움직여 침대 아래 엎드렸다. 그제야 손이 닿은 이엘은, 레온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역시…… 타이곤의 갈기는, 멋있구나.”

    “이렇게 볼품없는데? 민숭민숭한 모습이 초라한데도?”

    “으응. 상관없어. 그냥 네가 멋있는 거야, 레온…….”

    천천히, 힘겹게 한 자 한 자 내뱉는 이엘의 목소리가 소중하다. 레온은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그대로 바닥에 쏟아 내며 제 얼굴을 침대 위로 치댔다.

    이엘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가닥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몇 안 되는 그 가닥이 손에 엉길 때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이엘의 손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이 부끄러운 본체화를 한 건 전적으로 너 때문이야, 나타니엘.”

    “…….”

    “아이를 살려 줘. 네 아이, 테오도로……. 그 애를 버리지 마. 포기하지 말고 꼭…… 꼭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줘, 나타니엘.”

    모든 새끼는 소중해. 그렇잖아? 레온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이엘은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지켜 주고 싶었다. 레온의 이 갈기……. 타이곤에게 갈기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됐어…….

    “이렇게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어.”

    “…….”

    “이 끔찍한 갈기가…… 너와 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러면 난 연구소에서 당했던 그 끔찍한 기억들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미였던 린다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그들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건 레온의 갈기가 쓸모가 없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모든 타이곤이 갈기를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었고, 갈기가 있다고 해서 그게 전부 약효를 갖는 게 아니었다. 약효가 있는 타이곤의 갈기는 양날의 검이다. 약효가 있어도 그걸 뽑는 순간부터 영존하는 우논의 목숨은 생명의 빛이 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린다는 레온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나타니엘. 난 네게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상대가 너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거야말로 내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날 고통스럽게 만든 주원인인 이 갈기가, 네게 도움이 된다면……. 그러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내 존재의 이유는?

    그래서 조금 더 치댔다. 눈물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한 채, 레온은 그녀의 머리맡에 얼굴을 치대며 갸르릉 앓는 소리를 냈다. 갈기가 없어 밋밋한 머리 위로 뜨뜻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결국엔.

    “……부탁, 부탁할게. 미안해…….”

    “아냐. 미안해하지 마. 내가 고마워. 그러니까 울지 마, 나타니엘. 응?”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두 팔을 벌려 레온을 끌어안았다. 초라하지 않다. 자신이 본 그 어떤 사자보다, 그 어떤 호랑이보다 늠름하고 듬직했다. 얕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이엘이 레온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타이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종족인가 봐.”

    “아…….”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쳐다볼 수가 없네.”

    달큰한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위로로 다가왔다. 레온은 비로소 자신을 억죄던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지독한 자격지심에서도, 버거웠던 과거의 상처에서도. 레온은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나타니엘은 여전했다. 여전히 제게 예쁜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 갈기가 그녀에게 가는 건 도리어 내게 영광이며 행복인 셈이다.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밀로. 잠깐 얘기 좀 할까?”

    “야, 너……!”

    며칠간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킨이 먼저 밀로를 찾아와 용건을 꺼냈다. 저 나름대로 전략을 짜느라 바쁘던 밀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금방이라도 킨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킨은 제 몸을 옆으로 쑥 빼며 밀로의 윽박을 능숙하게 피했다.

    “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너 때문에 동맹군에 분열이……!”

    “저 여자 살리고 싶지?”

    “……뭐?”

    “그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냥.”

    늘 얼굴에 넘치던 여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킨을 알고 지낸 이후로 그가 저렇게 초조해 보이는 건 밀로도 처음이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밀로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한쪽 눈썹을 위로 틀어 올렸다.

    “뭐야. 뭔데 표정이 그렇게 심각한데. 대체 어딜 가자는 거야?”

    “걔가 간 곳이 어디라고 했지?”

    “걔? 누구?”

    “그 백조란 놈. 암컷 만날 수 있다는 놈 말이야.”

    “너 그걸 어떻게……!”

    “이제 와서 숨겨 봤자 뭐 해. 빨리 얘기해. 급하니까.”

    “거길 가겠다고? 야! 너 설마 암컷 용 때문에……!”

    “비슷한 맥락이긴 한데 그 백조랑 암컷 만나러 가는 게 아냐.”

    “그럼 무슨……,”

    “빨리 안내 안 해?”

    킨의 고압적인 말투에 밀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도 속을 모르는 건 똑같았지만 오늘따라 유독 킨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밀로는 불현듯 며칠 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말대로 폭주 직전이야. 난 너희와 달리 죄를 지으면 안 되는 몸으로 태어났거든. 내가 지금 내 한 몸 건사하자고 이러는 줄 알아? 내가 광증을 앓으면 날 막을 수 있는 놈이 여기서 몇이나 될까. 용 여러 마리가 달려들어도 광증을 앓는 용 하나를 상대하기 힘든데. 너희가 무슨 수로 날 막으려고.’

    신경을 건드리는 유클리드의 말에 킨은 짧고 무겁게 대답하며 분위기를 압박하듯 내리눌렀다. 역시 폭주 때문에……. 밀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번식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신의 손으로 직접 창조되었던 최초의 인간들과 이종족이 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용들도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최초의 것들이 존재했다.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건, 그들이 모두 광증을 앓아 비늘이 떼진 채 잠들었기 때문이다.

    킨을 제외하고.

    “너 정말 심각한 상태야? 광증이 오려고 해? 왜? 그 열매랑도 떨어졌잖아! 근데 왜……!”

    “수선 떨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하여간 어린애라니까.”

    킨이 평소의 모습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괜스레 밀로를 나무랐다. 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 좀 봐라. 하여간 어리다, 어려. 그는 혀를 짧게 차곤 조금 열려 있던 문을 밀어 꽉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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