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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5화 (465/488)

465화

*

“으으…….”

“죄송합니다. 저희의 성력으로는 이게 한계입니다.”

성전기사단장의 말에 노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완처럼 자신도 이엘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고작 우울한 감정을 대신 앓는 것으로는 이엘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노아는 성전기사단장인 사피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난 경. 경은 요새로 가서 지금처럼 방어에 힘쓰도록 하시오. 오드 님이 안 계시니 그대들 성전기사단만이 유일한 결계요.”

“알겠습니다, 각하.”

“요새는 뚫려선 안 되오. 거기가 최후 방어선이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 내시오.”

“예.”

그렇게 사피라가 나가고 노아는 이엘의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붙잡으며 신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모두가 겪는 일이었는데도 유별나게 마음이 아프다. 이럴 때마다 후회를 반복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갖지 말 걸……. 네게 우논의 아이를 갖게 하지 말 걸……. 아무리 네가 원했다고 한들, 내가 주지 않으려 했다면 네가 아이를 갖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물론 그녀가 ‘그’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아이를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평범한 인간 남자였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지.

노아는 산처럼 부른 그녀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제 부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미를 괴롭히지 말라는 아비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세상 밖을 나올 생각밖엔 없는 듯했다. 노아는 애가 탔다.

“노아. 잠깐만 나와 봐.”

그때 문 입구에서 레온이 그를 불렀다. 패티스도 밖으로 나가 본체로 변해서 싸우는 상황이었지만, 레온은 유일하게 황궁에 남아 전략을 짜는 일을 맡았다. 간혹 사자나 호랑이의 등에 타고 밖으로 나가 총을 쏘거나 검을 휘둘렀지만, 레온이 본체화를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아는 멀끔한 차림의 제 친구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레온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성력도 효과가 없어?”

“성전기사단의 성력으로는 턱도 없어. 그들은 겨우 오드 님께 빌린 성력을 사용하고 있는 거니까. 게다가 그들의 성력을 계속 쓰다가는 요새를 지키고 있는 결계가 약해질 거야. 그들도 오드 님께 받은 성력의 양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는 힘을 쓸 수 없다.”

“내 갈기를 받아.”

“뭐?”

“진통이 시작되면 지금의 몇십 배는 더 아플 거야. 그걸 폐하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냥 내 갈기를 받아서 그걸 갈아. 약으로 만들면 통증을 줄일 수 있을 거야.”

“그건 안 돼. 엘이 허락할 리 없는 일을 그녀가 의식이 없을 때 내가 독단적으로 정할 순 없다.”

“노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암컷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너도 알잖아.”

“…….”

“폐하께서 죽으면…… 아이도 같이 죽게 되면, ‘그놈’이 그 순간을 노리면 어떡해.”

둘 중 하나다. ‘그’가 그 순간을 노려 이엘과 테오도로의 목숨을 같이 가져가든가, 그게 아니면 이엘이 죽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출산하든가. 뭐가 됐든 둘 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노아. 너도 알잖아.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큰 자격지심 속에서 살았는지.”

“이건 그것과 결이 달라.”

“아니. 똑같아. 다르지 않아. 내 효용의 문제야, 노아.”

“…….”

“어릴 때 이후로 본체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무서워. 내 모습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되니까.”

연구소에서 수도 없이 갈기를 뜯겼기 때문에 본체로 돌아갔을 때 몸에 남아 있는 갈기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사실 갈기가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 생각에 레온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놨는데 줄 수 있는 갈기 따윈 없을 수도 있고…….”

“레온.”

“네게 강요하는 게 아냐. 나도 폐하의 허락을 받고 진행할 거니까.”

“…….”

“그냥 그때 너만큼은 반대하지 말아 달라는 거야. 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넌 기억하고 있잖아.”

노아는 갈등하듯 주먹을 억세게 쥐다가 이내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건 레온이었고, 노아는 그녀의 아픔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 모든 이해타산이 들어맞는다. 레온의 갈기면 성력만큼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가능할지 모르고.

상황이 자꾸만 그렇게 만든다. 레온의 갈기를 외면하지 못하도록. 결국 노아도 못 이기는 척 레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별수 없는 상황이라.

“……엘이 허락하면. 그러면 그렇게 해.”

“알겠어. 고마워, 노아.”

“미안하다, 레온. 네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내 선택이야. 널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레온의 말에도 노아는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없었다. 레온이 불우하다고 표현하는 그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로서, 레온이 착취당한 갈기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레온의 말처럼 그의 가치가 갈기에서 나오는 거라면 한낱 친구인 자신이 막을 일은 아니었다.

“으아아악! 아악!!”

그때 침실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한 채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 위에 누워 눈을 부릅뜬 이엘이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트 경! 나가서 당장 준비해라! 패티스 백작을 어서 데려와! 그리고 나머지 근위대는 산실로 이동할 준비하고.”

“예, 각하!”

노아의 명령대로 근위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레온은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내려와, 이엘의 손을 붙잡으며 꺼져 가는 그녀의 의식을 깨웠다.

“나타니엘.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정신 차려 봐. 응?”

“…….”

“나타니엘!”

끊임없이 내지르던 비명이 멎고 이엘이 눈을 뜬 채 파리한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봤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투명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기운이 없어 겨우 입만 뻐끔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일라이저가 급하게 들어오며 그녀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테오도로 님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선 반드시 살아남을 테니, 그 과정에서 폐하의 목숨이 위급해도 절대로 아이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겪어 보지 못했을 고통에 노아는 한숨만 집어삼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의 이마를 손등으로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걱정 마라, 엘. 약속했지 않나. 그대의 피붙이는 내가 지킬 거라고.”

그 말에 안도한 듯 이엘의 눈가가 잘게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조금 전에 나갔던 성전기사단장 사피라가 다시 복귀했을 때, 이엘은 또다시 눈을 감고 의식을 놓았다.

그 후로 며칠을 반복했다. 황궁 안은 아주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출입할 수 있는 인원도 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발소리마저 죽인 채 오가는 터라, 황궁 내는 그야말로 정적 그 자체였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건 분명 모두에게 경사인 소식일 텐데도, 이곳은 흡사 장례식이 열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금방이라도 장송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죽어 가고 있었다. 의원들이 숱하게 오갔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모체와 아이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드를 대신할 수 없었다. 오드였다면 그녀의 상태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패티스는 그녀의 침대 앞에 서서 골몰하고 있었다. 아이를…… 정말 살려야 하는 걸까. 어차피 여기서 살아남든, 혹은 죽든 아이는 ‘그’의 것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은 채 태어나길 바라는 게 낫지 않나. 정을 떼기에도 그게 좋고, 폐하를 살리기에도 그게 좋으니.

몹쓸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름시름 앓는 이엘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패티스 백작.”

“벌써 교대 시간입니까?”

산실로 들어온 레온의 목소리에 패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쯧쯧. 저쪽은 자신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두 눈이 푹 꺼진 채로 입술이 죄 갈라져 있었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엔 생기마저 사라져서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후작님. 교대 안 해 주셔도 될 듯합니다. 제가 조금 더 폐하를 지켜보겠습니다. 후작님이야말로 잠깐이라도 눈 붙이시죠.”

“객관적으로 폐하의 상태가 어떻다고 생각하나?”

“제가 알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 의원도 아니고 나자르 님도 아닌걸요.”

“…….”

“다만 출산일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짐작할 뿐입니다. 그땐…… 지금보다 더 통증이 심해지시겠지요.”

이것보다 더 심해진다니. 모든 생명이 이런 식으로 태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하이에나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을 레온은 이제야 절감했다.

수컷이란 것들은 죄 쓸모가 없다. 번식욕에 미쳤으면서도 정작 출산을 하는 건 암컷뿐이었다. 이렇게 쓸모없을 수가. 그런 주제에 제1욕구는 번식욕이라는 게 레온을 역겹게 했다.

“폐하께선 아직도 의식이 없으신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일어나셔서 물을 마시고 다시 주무십니다. 백조가 통증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감정과 생각뿐 아니라 감각까지 공유하게 된 스완이 그녀의 통증을 최대한으로 가져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엘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우논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겠지. 레온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패티스에게 말했다.

“잠깐 자리를 비켜 주겠나?”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조금 더 있어도 됩니다. 휴식이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후작님 같은데요.”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면, 백작이 내 갈기를 폐하께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패티스의 낯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도 계속해서 통증을 줄일 만한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자신의 갈기만 한 건 못 찾은 듯했다. 언젠가 르네가 그의 눈알을 패티스에게 맡겼다는 이야길 듣고, 자신 역시 때가 되면 패티스에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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