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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4화 (464/488)
  • 464화

    용은 존재만으로 엄청난 전력이 되는 종족이다. 오늘도 그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밀로가 합세했더라면 더 쉽게 해치웠을지 모른다. 다들 말은 안 해도 그 부분을 가장 아쉬워하고 있을 거란 걸 밀로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돌아오고 있었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몇 달을 쉼 없이 공격하는 건 무리야.”

    “…….”

    “……내 잘못은 맞으니 쓴소리는 달게 받을게.”

    매번 이런 식이다. 자신이 본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사고가 터진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 주드가 죽었던 그 밤. 밀로는 본체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던 중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었다.

    열매를 갖고 제도에 돌아온 순간부터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공중전은 지상전보다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체력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몇 달 내내 공중을 점령하느라 밀로는 상당히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에 아군의 작전이 공격적으로 변한 것을 보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잠깐 쉬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려 했다.

    “됐어. 네가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네가 희생당했을지 모르고.”

    벽에 기대 서 있던 노아가 맞은편에 있는 르네를 힐끗 보고는 다시 밀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밀로는 큰 전력이다. 용 한 마리가 갖는 능력치는 이종족의 한 무리가 갖는 능력치와 견줄 만하니까.

    “이봐, 용. 네 친구는 어디 있어?”

    조금 전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던 유클리드가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사실 여기 모인 동맹군 중엔 여전히 유클리드를 배척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가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유클리드가 용에 관해 관심을 갖는 건, 노아조차 경계하는 바였다. 노아는 유클리드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유클리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왜?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 안 되나? 내게 그 정도 자격도 없어? 오늘 내가 구한 목숨이 몇 갠데.”

    “대체 뭐가 궁금한데.”

    밀로가 피곤한 표정으로 푸른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충 대꾸해 줬다.

    “왜 그 용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지? 지금 상황에 용 한 마리가 갖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너희들도 다 알잖아. 근데 왜 너만 창공에 있었냐는 소리야.”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킨은 그런 역할이……,”

    “뭐야? 왜 나 없는 데서 내 얘길 하고 앉았어.”

    등 뒤에서 들린 킨의 목소리에 밀로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노아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여태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던 킨이 뜬금없이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을 열렬히 찾던 유클리드를 힐끗 보고는 품에 넣어 둔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전시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킨은 우물거리며 유클리드에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나한테 직접 물어봐, 스라소니.”

    “넌 왜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거지? 네가 있어야……,”

    “뭐야. 내 배려를 알아채지 못한 거야?”

    “…….”

    “여태 너희를 배려한 거잖아. 설마 너희들 다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거야?”

    킨은 황당하다는 듯 무리를 향해 물었다. 사실 아군의 대다수 역시 유클리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가 됐든 킨은 용이다. 한 마리라도 더 전력이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조금 더 빨리 종결시킬 수 있다.

    반면 킨의 말을 제대로 알아차린 몇 안 되는 자들에 속한 노아는 밀로를 향해 눈짓했다. 킨을 데리고 그만 나가 보라는 눈빛에 밀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문가에 서 있던 킨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너희 설마 2차 전쟁 때의 일을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너희 동족들을 죽였던 그때를?”

    “…….”

    “피만 보면 살육의 욕심을 참지 못해서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릴 것 없이 죽였던 그때의 일을 죄다 잊었다고? 미치겠네. 진짜 학습이라곤 전혀 없는 종족이잖아. 아, 물론 그때 우리가 아군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시끄러워, 킨. 분위기 깨지 말고 나와.”

    “이것 좀 놔 봐. 한 마디만 더 하고 가게.”

    쯧쯧. 킨은 대놓고 혀를 차며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들에게 아주 약간의 기대를 걸었던 게 바보 같을 지경이군. 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유클리드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넌 이 중에 가장 오래 살았으니까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이네.”

    “네 목숨이 아까운 건 아니고?”

    “뭐?”

    “그렇잖아. 네 친구라는 저놈은 목숨 걸어서 하늘을 지키고 있는데, 넌 어디 숨어서 뭘 하고 지내는 거야. 배려? 네가 배려를 했다고? 웃기는군. 용이 무슨 배려를 해. 가당찮은 말은 집어치우지.”

    “…….”

    “너희도 결국 여기서 떨어질 이익을 노리고 남아 있는 거 아냐? 예를 들면 암컷 용 같은 것?”

    “유클리드. 입 닥쳐.”

    듣다 못한 노아가 유클리드를 몰아세웠지만, 유클리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킨이라고 했나? 저 용에게 뭔가 있다. 손에 쥐고 있는 저 축복의 열매를 강박적으로 섭취하고 있는 것만 봐도 저 용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유클리드는 일부러 그를 압박하며 추궁했다.

    “네 말대로 난 이것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조부의 조부의 조부, 그 이전부터 살아왔지. 그래서 들은 게 꽤 많거든, 너희 용에 관해.”

    “…….”

    “자제가 안 된다고? 글쎄. 살육에 미쳤다고 하기엔 네 친구는 전장에서 억제를 잘하는 것 같거든? 근데 왜 넌 그게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유클리드의 도발에 킨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딱히 정곡에 찔렸다거나 비밀을 들켰다는 난색이 어리진 않았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필 킨이 고요하니 되레 밀로가 불안할 정도다. 밀로는 킨을 붙잡은 팔에 힘을 더하며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만하고 나와, 킨.”

    “내가 보기엔 네가 몸을 사리는 것 같아 보이거든? 내 말이 틀려?”

    “야, 스라소니. 너도 그만 입 닥치지? 한 마디만 더 말하면……,”

    “폭주 직전이라서 그런가?”

    유클리드가 키들거리며 묻자, 밀로는 열었던 입을 닫았다. 눈치를 보듯 킨을 쳐다봤지만 그는 조금 전처럼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춘 채였다. 다만 자신에게만 보일 정도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열매를 쥔 손이 아주 미약하게 떨리다가 이내 쥐고 있던 열매를 이로 아삭 깨물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게 배려라고 하는 거란다, 어리석은 스라소니의 수장.”

    킨은 혀를 쯧쯧 차고는 미세하게 떨리는 제 손을 들어 올려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들은 용의 폭주가 하찮은 이종족의 폭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여간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 없다.

    “네 말대로 폭주 직전이야. 난 너희와 달리 죄를 지으면 안 되는 몸으로 태어났거든.”

    “…….”

    “근데 너무 많은 죄를 지었지. 특히 신의 등을 처먹고 달아난 건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죄야.”

    “…….”

    “내가 지금 내 한 몸 건사하자고 이러는 줄 알아? 내가 광증을 앓으면 날 막을 수 있는 놈이 여기서 몇이나 될까. 용 여러 마리가 달려들어도 광증을 앓는 용 하나를 상대하기 힘든데. 너희가 무슨 수로 날 막으려고.”

    킨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밀로도 느꼈다. 그래서 그를 위에 두고 오려고 했던 건데 그의 고집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 그래도 문제의 그 열매를 스완이 들고 다른 차원에 가져갔으니 곧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뒤로도 킨은 괜찮았다. 그래서 다시 살육을 맛보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안일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내 전력이 필요하다고? 과연 그게 전력이 될까? 내가 너희를 다 씹어 먹을지 모르는데.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너희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타니엘부터 죽여 버릴지 모르는데 그게 과연 전력이 된다고 생각해?”

    “…….”

    “하지만 너희 마음은 알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알겠고. 내 생각보다 너희가 이 땅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네. 난 여긴 절망만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금해서 내려왔던 건데 말이야.”

    킨은 고뇌하는 듯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마지막 남은 용이다. 신께서 직접 만드셨던 최초의 용들 중 살아남은 자가 자신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자신이 폭주하거나 비늘을 떼서 잠들게 되면 그녀들이…….

    생각이 거기에 미친 킨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유클리드를 마주 쳐다봤다. 저게 은근히 머리를 굴리는구만? 확실히 연륜이란 게 있네. 어디서 주워들은 내용으로 날 이렇게까지 몰아세운다고?

    “킨. 너 설마 전장에 나갈 건 아니지?”

    그때 불안한 표정의 밀로가 그를 흔들었다. 그제야 킨의 시선도 밀로를 향한다. 밀로 이 녀석은 여전히 어리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당장에 닥친 문제가 두려워 발만 동동 구르는 꼴이라니. 정말 이 녀석에게 우리 종족을 맡겨도 되는 걸까. 돌연 걱정이 앞선다.

    “왜. 내가 전력으로 필요하다는데 나가서 쓸어 주는 게 낫지 않아? 밀로 네가 좋아하는 황제도 저렇게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 줘야지.”

    “그건 우리가 하면 되니 넌 이 일에서 빠져라.”

    노아가 계속해서 이어지던 킨과 유클리드의 대립을 끊고 끼어들었다. 밀로, 킨을 데리고 나가. 명령이야. 그 한 마디에 소란이 끝났다. 밀로가 힘으로 킨을 끌어 집무실 밖으로 나간 것이다. 두 사람이 나간 뒤에 집무실은 더 서늘해졌지만.

    “유클리드. 네가 공을 세웠다고 해서 주제넘게 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킨을 자극하지 마. 그는 용이야. 그의 말처럼 그가 폭주라도 하면 우린 죄다 죽는다고. 뭘 해 보기도 전에 전부 죽어. 알겠나?”

    “알겠어. 주의하지.”

    다시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온 유클리드는 낄낄거리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를 비롯한 무리가 걱정을 가득 안은 표정으로 전력 회의를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클리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조금 전에 나간 그 두 용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용은 단 한 마리라도 전력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암컷 용은 수컷 용 몇 마리를 합친 것 이상의 전력이 될 테고.

    이곳에 도착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킨은 신이 만든 최초의 용들 중 하나이고, 어쩌면 그가 생존하고 있는 마지막 용일지 모른다. 최초의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저놈이 죽거나 사라지면 그들이 올 것이다.

    암컷 용이 참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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