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가끔은 암컷의 상황을 수컷이 함께 나누기도 하니까요. 임신으로 인해 모체가 겪게 될 정신적 문제를 공작님께서 대신 가져가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알폰스는 둔을 다시 데려왔고, 그는 웃으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어쩌면 배 속의 아기님이 모체가 더 약해지지 않도록 진통 외의 고통은 다 제 부친에게 떠넘긴 게 아닐까요? 그런 농담 아닌 농담으로 놀란 알폰스까지 진정시켜 주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상태에 혼란스러웠던 노아도 제 변화를 차차 받아들였다. 그래도 노아는 대부분 감정을 잘 다스리는 편이라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엘의 일은 감정을 배제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철없는 감정놀음을 할 때가 아니란 걸 아는데도,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함에 몸이 무거워졌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하트의 등에서 내린 노아가 이엘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내려 줄 때. 패티스를 따라 나왔던 레온이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엔 이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온이 무슨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 알아챈 것이다.
“레온 후. 쓸데없는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만.”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면 답하지 않을게요.”
레온은 지금 일부러 패티스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자신의 갈기를 내놓겠다고.
어차피 이엘은 절대로 제 갈기를 받지 않을 테니, 주변에서 그녀를 종용하도록 몰아갈 상황을 만들었다. 약을 쓸 수 없는 지금의 몸 상태에 가장 좋은 진통제는 레온의 갈기뿐이니까.
이엘은 순간 패티스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잊고 있었던 진통제의 존재를 깨달은 듯한 낯이었다. 역시 레온은 패티스를 노리고 이 말을 꺼낸 게 틀림없다. 패티스는 이엘의 일이라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테니. 이엘은 한숨 끝에 패티스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패티스. 백작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위험한 시기도 잘 견뎠어. 진통을 못 견딜 리 없으니 그대도 레온 후작의 것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 이건 엄명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러나 호를 그린 그의 미소가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또 한 번 그를 꾸짖으려던 이엘은 다시 배 속에서 느껴진 크고 작은 통증에 노아의 팔을 붙잡으며 황궁을 향해 걸었다. 일단은 조금 쉬는 게 낫겠어.
― 폐하. 괜찮으시겠어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이엘보다 이엘의 몸 상태를 더 잘 아는 스완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이엘은 괜찮다며 대답했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테오도로가 탯줄을 타고 제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어미를 곧 만나러 가겠다고. 그러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고. 이 통증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
제도에서 대규모 전쟁이 터진 것을 알고도 그곳에 가지 못하는 앤디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아스타로를 납치하기 위해 포레스트와 슈프가 있는 곳에 합류했지만 좀처럼 적당한 타이밍을 찾지 못해 발이 묶였다.
앤디는 몸으로 부딪치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곳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게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오늘도 앤디는 늑대로 변한 채 무료하게 엎드려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지금이라도 빨리 제도로 달려가 폐하의 힘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아스타로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앤디 님……!”
뒤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누군가 앤디를 불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돌아본 곳엔 새하얀 털의 슈프가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제도 쪽이 하도 걱정돼 슈프를 보내 정찰하게 했던 것이다.
“제도는 괜찮습니다! 그것들이 두 마리 있긴 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는 피해가 적었습니다.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그것들이 두 마리나 있었다고?”
“예. 둘은 동종이었어요. 일단 실험에 성공한 건 그 종류뿐인 듯한데, 그것도 불확실해요.”
슈프의 말을 곱씹으며 앤디가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세스는 바다와 맞닿은 버려진 땅 곳곳을 본거지로 삼아, 다양한 이종족을 한곳에 접붙이는 실험을 몇 년째 행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1제국 때부터 이어진 연구 자료를 토대로 실험에 성공한 듯싶었다.
“저는 그자가 싫어요! 올리세스요!”
슈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작게 소리 질렀다. 그럴 만도 하다. 놈이 만든 괴생물체엔 동족인 늑대도 포함됐으니까. 그게 만들어지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동족이 죽어야 했을까.
슈프나 앤디처럼 노아의 무리에 속해 영지에서 생활하는 늑대들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무리를 떠나 전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도 슈프에겐 모두 동족이었다.
“나도 싫어. 그 자식은 선황과 똑같아. 여전히 환멸 나는 인간의 표상이야.”
“그냥 저랑 앤디 님이 몰래 습격해서 그자를 죽이면 안 돼요? 죽일 수 있잖아요!”
“슈프. 진정해라. 나무만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숲을 모조리 태울지도 몰라.”
앤디라고 왜 그걸 원치 않겠는가. 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자는 고작 올리세스 따위가 아니다. ‘그’와의 일을 해치우려면 안타깝게도 올리세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직 포레스트의 입지가 미약해. 아스타로 놈의 자리를 빼앗을 정도는 돼야 일 처리가 쉬워지니까,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앤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사람들을 몰고 복귀하는 포레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은 홀린 듯 포레스트를 졸졸 따라다녔다.
인간들이 정한 미의 기준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게 우논의 외형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인간의 질투를 받기도 했다. 거기다 뱀은 원래도 화려하게 생긴 종족이니 그런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논 뱀인 포레스트가 인간들을 홀리는 데 있어 제격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포레스트 님의 노래를 들으면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어요.”
“포레스트 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좋아요. 아스타로 님은 조금 무섭거든요……. 이건 아스타로 님께 비밀이에요!”
“포레스트 님. 전 사실 포레스트 님이 더 좋아요. 저희 마을은 아스타로 님 말고 포레스트 님이 지도해 주시면 안 되나요?”
“자자, 여러분. 전 아스타로 님의 제자예요. 저에겐 스승과 같은 아스타로 님을 이길 힘이 없답니다. 그러니 제게 자꾸 그런 부담을 주지 마세요. 물론 저도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해요. 저 역시 여러분과 오래오래 있고 싶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아스타로 님은 저를…… 앗! 아니에요. 제 말은 잊어 주세요. 전 제 스승님을 존경하니까요…….”
저것 봐라. 손등으로 눈가를 콕콕 찌르며 처연한 미소를 짓는 포레스트의 행작에 앤디는 짧게 혀를 찼다. 하여간, 뱀이란 놈들은 다 똑같다. 저렇게 인간을 홀리는구만.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포레스트의 모습에 기가 찼지만, 사실 앤디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였으면 절대로 저렇게 못 해. 아우, 생각만 했는데도 끔찍하다.
아무튼 여기는 나름대로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려 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조르단 공작으로부터 조달받는 해독제를 아스타로의 눈을 피해 제도 곳곳으로 퍼뜨리고 있었고, 특히 아군이 된 로빈과 뱀이 해독제를 흩뿌리며 제도 밖을 정리해 주고 있다. 앤디 본인만 조금 무료할 뿐.
“저희가 포레스트 님을 지지할게요!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레스트 님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앤디는 상념을 지우곤 광신도가 된 인간들을 바라보며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한번 이교도가 되어 사상이 변질된 놈들은 또 저렇게 다른 쪽으로 변질되는구나.
내부를 찢는 게 생각보다 쉽긴 했지만, 동시에 씁쓸함도 불러왔다. 저런 것들도 동족이라며 지키려고 했던 이엘이 안타까워서.
“슈프. 우리도 슬슬 정리하자. 넌 계속해서 조르단 공작으로부터 받은 해독제를 포레스트와 뱀들에게 나눠 주도록 해라. 외곽이 다 정리되면 우리도 제도로 향할 거니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앤디 님.”
또랑또랑하게 대답한 슈프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홀로 남겨진 앤디는 며칠 전에 엿들었던 아스타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이번 전쟁은 이종족의 멸살이 목표다. 이게 끝나면 인간들을 전부 데리고 제도로 향할 테니 준비에 만전을 기해라.’
이번 전쟁이 이종족의 멸살이라고……. 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조금 전 슈프에게서 보고를 받고 나니 이해가 간다. 그 끔찍한 괴생물체를 보내 제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괴물들이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릴 것 없이 보이는 대로 먹어 치우고 공격을 퍼붓는다는 것을 알면서 제도로 보낸 것이다. 그 결과 이엘의 제도군뿐 아니라 올리세스의 반란군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 맞아. 아스타로가 말한 멸살당할 이종족은, 반란군에 속한 이종족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앤디와 같은 이엘의 제도군이 아니라 올리세스의 반란군.
포필렌으로 길들이거나 혹은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저희 편에 선 자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들과 손잡은 건 한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치가 떨린다. 여전히 이종족을 소모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울화가 솟았다. 올리세스의 세상엔 이종족은 필요하지 않다. 그 미치광이는 어차피 미래 따위엔 관심이 없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태로 그저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선황을 닮았다. 저밖에 모르는 선황과 올리세스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았다. 앤디는 이를 빠득 갈았다. 다른 건 몰라도 올리세스와 아스타로의 목은 자신이 뜯어 버리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결국 전략 회의는 이엘이 없이 진행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계속해서 참석하겠다며 나섰지만, 좀처럼 멈추지 않는 통증 탓에 결국 이엘이 먼저 포기하고 침실에 몸을 뉜 것이다. 그녀가 없는 집무실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폐하는?!”
그때 그 정적을 깨고 밀로가 집무실 문을 박살 내듯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그는 온몸이 피에 젖어 있었는데도 씻는 것보다는 이엘의 상태를 살피는 게 더 먼저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까 그것들은 대체…… 대체 뭐야?”
“폐하께선 안정을 취하고 계신다. 일단 괜찮으시니까 걱정 말고.”
그리고 그걸로 얼굴 좀 닦아. 보다 못한 패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밀로에게 던지고 핀잔을 줬다. 밀로는 제 손에 안착한 손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벅벅 문지르고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곤 성큼성큼 다가와 서류가 쌓인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쿵 내려쳤다.
“다들 말 안 해? 아까 그것들이 다 뭐냐고!”
“넌 하늘에서 뭘 한 거지?”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레온이 피곤한 얼굴로 밀로를 향해 물었다. 분명 하늘을 지키는 건 밀로의 몫이었지만 어쩐지 오늘 하루 종일 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