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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2화 (462/488)

462화

이엘은 르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정신을 붙잡았다. 흐릿한 눈을 뜬 이엘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르네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피로 물들었다. 폭음의 주인공은 그 괴생물체다. 놈이 자폭한 듯했다. 몸 안에 무언가를 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조차 놈의 능력인 건지. 아무튼 저 멀리 놈의 내장이 터진 채 시체 덩어리가 산재된 게 보였다.

“폐하, 잘 들으십시오.”

“르네.”

“도망치십시오.”

기시감이었다. 르네의 저 표정.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그가 이엘의 어깨를 조심스레 움켜쥐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꼭 사셔야 합니다.”

도망쳐라.

이번엔 꼭 살아라.

언젠가 그녀를 미치도록 괴롭혔던 그 악몽 속에서 르네는 그렇게 말했다. 싫다며 고개를 내젓는 이엘의 어깨를 억세게 쥐며 슬프게 읊조렸다. 그리고 지금의 르네는 그 악몽 속의 르네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쥐고는 그 끝에 입을 맞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르네의 적안이 세차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안 돼. 르네! 대체 왜……!”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그의 슬픈 표정은 끝을 직감했기 때문인가. 르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생물체가 나왔던 곳에서 놈과 닮은 괴물 한 마리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십시오.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 가십시오.”

“안 돼! 그건 안 돼!!”

저놈도 분명 자폭할 것이다. 그게 몸 안에 폭약이 있든 폭탄을 터뜨리는 능력을 갖고 있든, 어쨌든 놈이 땅을 나오자마자 터뜨려야 한다. 그래야 평야에 남은 동맹군의 피해가 적을 것이다.

르네는 안 된다며 소리 지르는 이엘을 남겨 두고 독수리로 변한 채 괴물을 향해 날았다. 보호석을 발동시켜 두더지의 능력을 무력화시킨 이후에 이대로 곧장 놈의 입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 상태로 내부에서 찢어발기면 땅이 폭발을 어느 정도 흡수해 아군의 희생은 줄어들 수 있다.

르네는 이게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안 돼! 제발, 르네!”

이엘은 다급했다. 그 끔찍한 꿈속에서 모두가 죽었다. 르네의 마지막도 저런 모습이었다. 다만 조금 다른 모습이라면 꿈속에선 무수하게 쏟아진 총과 화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지금의 르네는 스스로의 희생으로 이 상황을 단시간에 끝내려 한다는 점이었다.

“유클리드!”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이엘은 유클리드의 이름을 불렀고, 조금 전 자폭으로 쓰러져 있던 유클리드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무작정 달렸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전쟁 쪽 지략은 타고났기 때문에 그저 본능에 맡겼다. 저 멀리 괴물의 벌어진 입을 향해 날아드는 독수리가 유클리드의 눈에 보였다.

“성격 하난 끝내주는군.”

유클리드가 괴물 가까이에서 달리던 것을 멈췄을 때, 르네가 회오리치듯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괴물의 벌린 입 안을 꿰뚫며 몸통까지 파고드는 게 유클리드의 눈에 선명했다. 그 순간 유클리드가 괴물의 몸에 창살을 던져 꽂으며 소리를 질렀다.

“보호석을 전부 해제해!!”

마침 놈의 주변에 보호석을 가동시킨 채 있던 우논의 숫자가 적은 상태였다. 조금 전 첫 번째 괴물의 자폭으로 모두 밖으로 튕겨져 나가거나 죽은 상태라. 덕분에 유클리드의 소리를 들은 우논들이 보호석을 전부 해제시켰고, 그와 동시에 유클리드는 앞발로 바닥을 세게 쾅! 찍었다.

그의 발에서 뻗어 나간 엄청난 물줄기가 도중에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하나는 꽂힌 창살을 타고 괴물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괴물의 외관을 동그랗게 뒤덮었다. 그 순간 조금 전과 같은 폭음이 또 한 차례 들려왔다.

퍼어어억―! 이번에도 내장이 터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능력을 사용한 유클리드마저 괴물이 자폭하며 불어닥친 돌풍에 뒤로 넘어갔다.

다만 이번엔 첫 번째 폭발과 다른 양상이었다. 괴물의 몸통을 뒤엎은 유클리드의 물이 폭발을 막은 것이다. 폭발의 진동을 상쇄시킨 유클리드의 물은 촤악―! 소리와 함께 터지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적셨다.

작은 물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주변엔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능력을 사용하던 유클리드도 물벼락을 피하진 못했다.

“윽. 내 능력이지만 기분 더럽게 축축하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으며 일어서니, 저 멀리 괴물이 터진 곳에서 거대한 물방울이 무언가를 감싼 채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는 게 보였다. 유클리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능력을 거두자, 그 안에서 적색 독수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클리드가 던진 창을 타고 괴물의 몸 안으로 들어갔던 또 다른 물방울이 내부에 있던 르네를 폭탄으로부터 지켜 준 것이다. 괴물이 자폭하기 직전에 르네를 감싼 덕에 르네는 멀쩡했다.

“르네!”

저 멀리서 달려온 이엘이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쉬는 르네를 끌어안았다.

“정신이 들어? 르네!”

“……나타니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꿈처럼 되지 않았다. 막았어. 그 두렵고 무서웠던 악몽 하나를 깨뜨렸어. 이엘은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엔 엄청난 능력을 쓰고도 태연하게 서 있는 유클리드가 보였다.

꿈과 달라지기 위해 유클리드를 동맹군으로 끌어들였는데, 그 계획이 제대로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유클리드가 아니었다면 이 순간의 상황을 모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 유클리드 백작.”

“동맹군에게 그런 말씀 마시죠, 폐하.”

유클리드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엘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여전히 귀가 먹먹했다. 르네는 비틀거리는 이엘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제게 기대게 했다. 이엘은 그의 품에서 정신을 차리며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우 반나절 만에 몇 달을 밀고 당기던 전쟁을 뒤엎었다. 그녀의 강한 정예군이 봐주지 않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사태의 절반은 조금 전에 나타났던 그 괴생물체의 습격이 차지했다.

“1제국 때도 저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저 멀리서 무리를 정리하고 복귀하던 노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보고했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이카르 역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첨언했다.

“저희 재규어를 멸족시켰던 이유도 그거니까요. 이종족의 능력을 추출해서 인간에게 접목시키려 했죠. 그때부터 연구소에선 저런 실험이 비일비재했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은 그땐 결국 저런 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거고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어.”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괴생물체만 그런 게 아니다. 올리세스의 반란군은 다 어딘가 조금씩 비틀린 것 같았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 흡사 이미 한 번 죽은 시체가 누군가의 마리오네트 인형이라도 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몸으로 들이받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다.

“폐하! 요새 쪽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저 멀리서 독수리 몇 마리가 날아오며 소리쳤다. 이쪽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미 반란군의 진은 제도의 경계 너머로 물러났고, 조금 전의 폭발로 그나마 남아 있던 자들도 반 이상이 쓰러진 상태였다.

달아난 자들은 추적대를 꾸려 보내고, 지금부터는 영주들과 합쳐 올리세스의 반란군을 한데로 몰아야 할 때였다.

― 폐하. 느낌이 안 좋아요.

그때 돌연 스완이 그녀를 불렀다. 이엘은 조금 전 그 괴생물체가 나타났을 때처럼 인지하지 못한 적이 남은 건 아닐까 싶어 겁이 덜컥 났다. 갖가지 일을 겪었는데, 이처럼 두려웠던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이엘은 떨어진 검을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스완이 조금 전에……아!”

“폐하!”

이엘이 짧게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풀썩 내려앉았다. 그에 놀란 노아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채 하트의 등에 함께 올라탔다. 하트는 노아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땅을 박차고 달리는 중이었다. 노아는 하트의 빠른 속도에도 그녀가 멀미하지 않도록 뒤에서 단단히 붙잡아 제 몸에 고정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 다치셨습니까?!”

성문을 열고 뛰쳐나온 패티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엘의 안전을 위해 그녀가 황궁의 뒤쪽에 위치한 검은 숲을 수색하기를 청했었다. 실제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엘은 하트와 함께 숲으로 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왜 폐하께서 전장에서 돌아오고 계신단 말인가?

“그건 아니니 걱정 마시오, 백작.”

“그럼 폐하께서 왜……!”

“가진통이 심해져서 그런 거니 걱정 마시오.”

“그 얘기는…….”

“얼마 안, 안 남았어…….”

노아 대신 대답한 건 이엘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이를 악문 채 힘주어 답했다. 이엘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곤 심호흡을 하며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꽉 붙잡았다. 안정기도 이제 끝이었다. 통증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이 끝은 테오와의 만남이겠지.

그건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기쁨만 안겨 주는 건 아니었다. 테오를 만난다는 건 모든 걸 매듭지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매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그 괴생물체와 싸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통증……. 이엘은 제 배를 쓰다듬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진통이었다. 둔들이 경고했던 대로 위험한 시기를 넘기는 건 만만치 않았다. 스완이 제 통증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이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졸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출산이 임박한 진통은 그의 몇십 배는 더 괴로울 겁니다, 폐하.’

그 통증의 몇십 배나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디지? 벌써부터 손에 땀이 흐르고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그 속을 아는 건 노아가 유일하다. 그는 조용히 이엘의 손을 움켜쥐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럴 때마다 당신께 못할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원했고, 내 아이가 원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녀의 위엄 서린 목소리에도 노아의 기분은 여전히 우울했다. 이엘은 제 뒤에 앉은 커다란 사내의 모습에 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근 들어 노아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원래도 이엘의 일엔 감정이 앞서는 편이긴 했지만 요새는 그 정도가 심했다. 뿐만 아니라 노아는 거의 모든 일에 감정이 들쑥날쑥해져서, 오죽하면 그의 보좌관인 알폰스마저 노아의 상태를 걱정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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