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1화 (461/488)

461화

“저쪽은 유클리드에게 맡기고, 그대들은 세 갈래로 나눠져서 공격하도록. 지금부터는 격전지를 제도 밖으로 넓힐 것이다. 더는 봐주지 말고 밀어내. 땅을 빼앗기지 마.”

“예!”

그동안 제도 경계에서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며 밀고 당기는 영역 다툼을 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직 전쟁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주변 영지들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까지 보호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모든 영지들이 방어벽이 단단해졌으니 이쪽 제도로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밀리는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엘의 명령을 받은 제도군은 반란군을 거침없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이미 보급로를 차단당했고, 로빈이 그들 내부를 찢는 중이라 더는 제도로의 인원 충당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식이면 물리적인 싸움은 금방 종료될 터였다.

하지만 뭔가 이렇게 쉽게 끝나는 게 이상해. 이엘은 검을 휘두르며 밀려드는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면서도 불안한 예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몇 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노아의 영지에 숨어 지낼 때, 인간과 연합한 뱀이 쳐들어와 주드의 목숨을 앗아 갔던 그날을.

그 기시감을 똑같이 느낀 건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을 물어뜯고 있던 늑대들이 일시에 멈췄다. 그녀가 타고 있던 하트 역시 다리를 멈추고 섰다. 땅을 딛고 있는 제도군은 모두 멈췄지만 공중전에 여념이 없던 독수리와 새들은 끊임없이 맞붙고 있었다.

“전군, 멈춰라.”

기묘한 기운을 느낀 건 제도군만이 아니었다. 무차별적으로 들이닥치던 적군도 무기를 쥔 채 그 자리에 멈췄다. 그제야 이엘은 피로 얼룩진 평야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엉망이었다. 적과 아군의 것으로 뒤섞인 피와 시체가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게…… 맞을까? 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이렇게 안 하면 안 끝납니다, 폐하∼”

날쌔게 달려온 스라소니가 능글맞게 일갈하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유클리드였다. 온몸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음에도 흉터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유클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들고 있던 검을 손안에서 가볍게 몇 번 돌려 댔다.

“큰 놈이 올 것 같은데, 일단 거기에 집중하시죠.”

모두가 멈춘 상태에서 유클리드는 거의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튀어 올라 아군이었던 곰의 등에 올라탔다. 유클리드의 말을 들은 곰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바닥을 향해 힘껏 찍었다.

콰드드득―! 지반을 뚫고 파고든 곰의 능력이 땅을 쩍쩍 갈라뜨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괴상하게 생긴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건…….”

곰의 등에서 뛰어내린 유클리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색이 보였다. 곰이 찢어뜨린 땅을 뚫고 나온 건 그조차 당황하게 만들 만한 존재였다.

언뜻 보았을 땐 두더지인 줄 알았다. 땅 아래서 올라온 데다가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에서 단단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옷처럼 단단한 방패로 총알마저 튕겨 내는 게 두더지의 능력이었기에 추측에 확신이 실렸지만…….

“저걸 두더지라고 볼 수가 있어? 이봐, 공작님. 그쪽 눈에도 저게 두더지로 보여?”

유클리드는 기가 차단 표정으로 옆에 있던 노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노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건 두더지가 아니다.

아니. 두더지만이 아니다.

“꼬리는 뱀 같습니다.”

“다리는 늑대처럼 보입니다…….”

이어지는 추측을 보고받던 이엘은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지압했다. 혼종이 되어 버린 생물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평야 위의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일단 정렬해서 상황을 주시하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밀어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이엘이 때마침 주변에 있던 동맹군의 수장들을 괴생물체를 둘러싸도록 배치시켰다. 아직까진 그 괴생물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사이 이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조부 피에르를 향해 눈짓했다. 피에르의 지시를 받은 나머지 제도군이 괴생물체의 등장에 얼이 나가 있던 반란군을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으아아악!”

“아아악!”

반란군에 속한 인간과 이종족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으니까.

줄곧 초점 없이 흐릿한 눈으로 시체처럼 공격만 퍼붓던 자들이 처음으로 살아 있는 존재들 같았다. 겁에 질려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반란군을 보며 이엘과 동맹군도 들고 있는 무기를 고쳐 잡았다.

……저게 대체 뭐지?

괴생물체는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와그작. 와그작. 뼈째 씹어 먹는 소리가 대지를 울리는 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놈을 지켜보던 노아가 이엘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놈들은 저게 뭔지 아는 것 같습니다!”

“창공에 있는 독수리와 새를 불러서……!”

― 폐하! 피하세요!!

아직도 땅 위 상황은 알지 못한 채 상공에서 전투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독수리와 새를 불러들이기 위해 지시를 할 무렵이었다. 머릿속에서 스완의 외침이 들려왔고, 이엘은 저도 모르게 하트의 등에서 뛰어내려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이번엔 스완보다 배 속의 테오도로의 본능이 더 빨랐다.

“크아아악―!”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이엘을 향해 괴물은 달렸다. 놈을 둘러싸고 있던 이종족들은 당황했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온갖 능력을 놈에게 쏟아 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놈이 여태 접고 있던 깃털을 활짝 펼친 순간, 이종족의 공격이 그 거대한 깃털을 맞고 사방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공격을 받게 된 제도군은 쏟아지는 온갖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도망쳤다.

“공작새의 깃털입니다!”

그중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저 거대한 깃털이 공작새의 것이라면…… 더 이상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공작새의 깃털에 달린 무수한 동그란 무늬들은 거울처럼 반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본체 자체는 방패처럼 단단한 두더지라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혼종이었다.

이엘은 가까이 다가온 하트의 등에 도로 올라타며 그에게 물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저런 생물체를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1제국 때도 본 적 없는 생물입니다.”

“올리세스가 만들었다고? 저런 걸 만드는 게 가능해?”

“확실한 건 겉으로 드러난 부위가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놈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게 두더지의 얼굴과 몸통, 늑대와 비슷한 다리, 공작새의 깃털과 뱀의 꼬리까지.

“보호석을 켜고 검을 들어라. 깃털부터 잘라 낸다. 화살과 창은 안 돼. 총도 안 된다. 꼬리에 맞지 않도록 유의하며 전면으로 달려들어 깃털을 자른다. 서로를 엄호해!”

“예!”

이엘의 명령을 들은 동맹군은 품에서 보호석을 꺼내 발동시켰다. 각각의 보호석에 걸린 결계식이 서로의 결계식과 엉켜 파장이 더 커졌다. 우논들은 보호석을 발동시킨 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테르들의 등에 올라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일제히 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온갖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곳에서 이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하트에게 조금 더 속도를 내라고 명령한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긴 창살을 여러 개 주웠다. 그러곤 혼란한 틈을 타, 놈의 다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창살을 앞다리에 꽂는 데 성공한 순간, 창살 끝에 달려 있던 줄을 잡아 놈의 주위를 몇 바퀴씩 돌았다.

아주 잠깐 무게 중심을 잃은 괴생물체가 한쪽 앞다리가 푹 꺾여 쓰러지기 직전에 이엘은 다른 창살들을 놈의 배를 향해 연이어 던졌다. 보호석이 가동 중이라 몸체의 단단한 능력도 꺼진 상태였다. 창살은 이엘이 던지는 대로 놈의 배에 푹푹 꽂혔다.

“크어어억!”

천지를 울리는 괴성과 함께 앞다리 두 개가 완전히 무너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우논들이 검을 휘둘러 깃털 몇 개를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저 무수한 깃털을 잘라 내려면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겠지만 어차피 보호석이 존재하는 한, 놈은 이종족의 능력을 쓰지 못할 테니 소용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 잘라 내라!”

“예!”

우렁차게 대답한 동맹군이 대답하는 것을 듣고 다시 창살을 들어 놈의 하체를 공격하려는 찰나였다.

― 폐하!

스완이 그녀를 애타게 불렀고 이엘은 또 한 번 하트의 등에서 뛰어내리려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뚝 떨어진 독수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질 뻔한 이엘을 낚아채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 주었다.

동시에 뭔가가 하트의 옆구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조금 전 이엘이 타고 있었던 곳을 겨냥한 듯했지만 그녀가 피한 뒤라 하트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르네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르네가 이엘의 허리를 감싼 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이엘이 떨어지는 타이밍과 르네가 그녀를 구하려 달려든 타이밍이 맞았던 터라 외상은 없었다. 그보다 하트가 걱정이었다.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졌던 하트가 그르릉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섰다.

그들을 공격한 건 놈의 꼬리였다. 뱀의 능력인 은신이 보호석의 범위에 닿지 않는 부분에선 가능했던 건지, 몸통의 부분 부분이 투명해진 터라 더 괴상하게 보였다.

창처럼 날카로운 꼬리의 끝이 이엘과 하트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본체가 이종족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음에도 마치 꼬리는 다른 자아를 가진 것처럼 자유자재로 이엘을 향해 공격했다.

재빨리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엘을 데리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던 르네는 뒤늦게 그녀의 몸 상태를 깨닫고 도로 땅으로 내려왔다. 괴물에게서 조금 멀어진 곳이긴 했지만 여전히 공격 범위 내에 있었다.

“폐하! 아직 놈의 사정거리 내에 있습니다. 꼬리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됩니다.”

“보호석 때문에 그대의 눈도 소용이 없구나.”

“꼬리를 자르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여기서……,”

퍼어어억―!

르네의 말은 다 마치지 못했다.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엘과 르네가 모두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명이 들렸다. 폭약을 준비했나?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 하늘 위에서 놈들의 무기를 주시하고 있던 게 독수리들이었다. 하지만 폭약 같은 건 보지 못했다. 근데 대체 어디서……. 르네는 그 와중에도 그녀를 품 안에 감싸 보호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폐하!”

“…….”

“폐하!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으윽…….”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