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스승님은 10년 가까이 인식표의 독성을 제거하시는 것에만 몰두하셨어요. 연구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셨어요. 그것만 연구하셨다고 했어요.’
테런스 포르는 당시 촉망받던 연구원이었다. 차기 연구소장으로 여러 차례 언급될 만큼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유달리 이종족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던 테런스가 왜 연구소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았는지 조금씩 가닥이 잡힌다. 그는 그곳에서 인식표를 제거했을 때 번지는 독에 대한 해독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1차 전쟁이 터지고, 암컷 이종족들을 향한 무차별적 학살이 이어졌다. 보호석 앞에서 이종족의 능력은 소용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수컷들이 앞에서 막는 동안 암컷들은 도망쳤다. 그러다가도 쉽게 잡혔는데, 그게 저희 몸속에 심어진 인식표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다음 행동은 아주 당연하게 진행됐다. 모두가 인식표를 뜯어냈다. 그리고 죽었지.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든, 제거한 인식표가 남긴 독성 때문이든. 그렇게 전부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인간들은 몰랐다. 애초에 이종족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1차 전쟁을 무슨 연극이라도 보는 것처럼 관망했고,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
저것들이 전부 죽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그날그날의 유희를 즐기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니 인식표의 문제성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 눈엔 죄다 학살당해서 죽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연구원이었던 테런스 포르는 직감했다. 이런 식이면 안 돼……. 내 아이들에게도 인식표가 심어져 있어. 그는 그날로 연구에 돌입했다.
이종족을 좋아했던 그에게 1차 전쟁은 어마어마한 후유증을 남겼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테런스는 두 딸의 몸에 심어진 인식표를 안전하게 제거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2차 전쟁이 터졌다. 테런스의 우려대로 인간 여자들이 보복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2차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도망쳤고, 위치를 추적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식표를 뜯어냈다. 그리고 똑같이 독이 번져 죽었다.
안타깝게도 테런스 포르는 2차 전쟁이 터져 이종족에게 살해당할 때까지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었다.
‘포필렌의 해독제가,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와 코알라의 능력을 접합시켰다고 했죠?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땐 그 열매가 없어서 스승님이 실패하셨던 걸지도.’
리노가 드물게 의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전부 구해서 연구를 도왔다. 뿐만 아니라 늑대의 영지에 머무르고 있던 테런스 포르의 조카인 코르넬 포르를 데려왔다. 코르넬은 이엘이 재상으로 생각해 둘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갖고 있었다. 아마 리노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갑자기 불려 온 코르넬도 의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촌 누이들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늘 소극적이고 눈치만 보던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줄 몰랐다며, 친구인 일라이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리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테런스가 그토록 연구에 매진하고 몰입해도 만들 수 없었던 해독제의 해답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로 풀린 것이다. 그걸 조금 섞으니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단시간에 만들어 낸 해독제의 확실성은 부족했다. 당장 실험해 볼 피험체가 드레인의 영역에서 잠든 테런스의 딸들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고, 결국 미완성의 약을 들고 스완과 마주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대로라면 드레인의 영역으로 넘어간 스완과 이엘이 꿈이 아닌 현실에서 교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스완이 남겨 둔 백조의 깃이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어쨌든 어렵게 만들어진 약이 부디 효과가 있길 바라며 전쟁을 준비했는데, 결국 성공했단 소식을 스완이 전해 주었다. 긴 시간 끝에 얻은 희망에 이엘도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스완. 고마워.”
― 제가 뭘요. 그쪽에 있는 리노와 코르넬 자작 덕분이죠.
“그 애들의 상태는 어떠니.”
― 아직 깨어났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는 중이에요. 몸이 많이 굳은 상태라 드레인이 신경 쓰는 중이구요. 그보다 폐하. 전쟁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공습은 막아 냈어. 아직까진 성전기사단의 결계도 완고하고.”
오드가 떠나기 직전까지 성전기사단에게 성력을 가득 채워 주었기 때문에 요새의 방비를 맡고 있는 그들의 결계가 아직까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엘과 스완 모두 그 결계가 얼마 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 폐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저랑 폐하가 감각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됐잖아요?
“응. 그건 왜? 혹시 어디 아파? 내가 대신 아플까?”
―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 아파요. 그리고 제가 아픈데 그걸 어떻게 폐하께 떠넘겨요! 아후, 진짜 나타니엘! 날 뭘로 보는 거야!
종내는 화를 못 이기고 이름까지 불러 대는 스완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현재 이엘은 공습이 한창이던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숲을 수색 중이었다. 그녀를 태운 채 천천히 근방을 돌아다니던 하트가 웃음이 터진 이엘 때문에 걸음을 멈췄지만, 이엘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짓을 하며 다시 수색에 나섰다.
둔들은 경고했었다. 임신 이후에 찾아오는 위험한 시기에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그 위기를 잘 모면하면 당분간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출산 때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위기를 약 없이도 이겨 낼 수 있었던 건, 스완과 고통을 나눴기 때문이었다.
스완의 능력이 확장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대화만 간단히 주고받던 것에서, 이제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뿐 아니라 감각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됐다. 통증으로 괴로워하던 이엘이 정신을 못 차리는 새에 스완은 허락 없이 그녀의 통증을 나눠 가졌고 그 덕분에 이엘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에야 스완의 개입이 있었다는 걸 알고 그를 혼냈지만, 사실 이엘에게 스완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스완이 아플 땐 그 아픔을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말했던 걸 지금 이 상황에 농담처럼 꺼낸 것이다.
― 그게 아니라! 폐하와 제가 감각을 공유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폐하의 눈이나 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설마 그쪽에서 이쪽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소리니?”
― 네! 물론 거기서 직접 싸우는 건 아니니까 성력은 못 쓰겠지만. 그래도 이종족인 제가 인간인 폐하보다는 감각이 월등하게 좋으니 전장에서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이엘은 허리가 아플 정도로 부른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늑대의 피가 흐르는 아이 덕분에 이엘도 보통의 인간보다 감각이 확장된 상태였다. 여기에 스완의 감각까지 더해지면 효과가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이엘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완이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사실 스며들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지만, 이엘은 그 기묘한 느낌을 스며들었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돼? 내 몸에 스완과 내가 같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 아리송한 느낌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때였다.
“폐하!”
갑자기 하트가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땅이 푹 꺼지며 이엘과 하트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트랩이었다. 아주 잠깐 방심했던 하트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며 재빨리 제 등에서 떨어지는 이엘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들고 있던 창살로 절벽을 찍어 매달려 있었다. 하트가 이엘을 부르기도 전에 그녀의 날 선 감각이 계책을 찾아낸 것이다.
잠시 당황했던 하이에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절벽을 가뿐하게 올랐다. 도중에 창살에 매달린 이엘을 구출해 안전하게 지상에 착지했다.
―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무슨 근위대장이 이렇게 허술해? 내가 돌아가면 근위대장 자리부터 뺏을 거라고 전해 주세요.
스완의 말에 이엘은 웃었다. 이 목소리를 하트가 듣지 못한 것에 스완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엘은 하트의 등에 올라타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습이 터졌지만 주 격전지는 제도의 경계와 북쪽에 있는 요새였다. 아무래도 인간들과 약한 이종족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요새였기 때문에 제도군의 거의 모든 전력과 성전기사단은 북쪽에 포진되어 있었다.
그래서 수색을 마치고 숲을 빠져나온 이엘이 향한 곳은 제도의 경계 부근이었다. 여긴 입구와 같은 역할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반란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대부분의 전력이 요새를 지키는 중이었기에 이쪽은 핵심 전력만 남았다.
이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독수리와 매가 창공에서 싸우는 중이었고, 양 진영의 동맹에 속하는 다양한 새들도 함께 뒤섞여 맞붙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푸른 용이 모습을 드러내며 벼락을 날리고 있었다.
“폐하!”
저 멀리서 이엘을 알아본 노아가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엘은 등에 메고 있던 총을 앞으로 돌려 한쪽 눈을 감은 채 조준을 마쳤다.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늑대들의 뒤로 미친 듯이 쫓아오는 반란군이 보였다. 하트는 이엘을 위해 바위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이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을 쐈다.
탕! 탕! 탕! 장전하는 시간이 너무 빨라서 그냥 마구잡이로 연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총은 정확했다.
“스완과 테오의 합이 좋네.”
어느 순간부터 배 속의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함을 유지했다. 제 어미가 처한 바깥 상황을 인지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는 고요하게 주변을 주시하는 듯했다. 동시에 모체의 몸을 변화시키며 모체를 이종족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아이와 스완의 합이 좋은 것인지, 이엘은 몸이 전보다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공작님. 폐하께서 원래 저렇게 총을 잘 쏘셨습니까?”
노아와 함께 달려오던 알폰스가 기함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며 물었다. 노아 역시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였다. 원래도 총이나 검을 잘 다루긴 했는데, 조금 전 그 실력은 노아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임신한 이후론 몸이 무거워졌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임신 전보다 더 가볍고 민첩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늑대들의 인사를 받은 이엘이 하트의 등에서 뛰어내리곤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활개를 치고 다니는 유클리드와 스라소니들이 보였다.
“유클리드를 끌어들인 것에 불만을 가졌던 과거의 제가 멍청하게 보입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노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렇게 전쟁에 미친놈을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뒀다면 상상 이상으로 골치 아팠을 것이다.
유클리드는 홀로 곳곳을 뛰어다니며 가는 곳마다 물폭탄을 파도처럼 드넓게 퍼뜨렸다. 보통 저 정도로 능력을 과하게 사용하면 지금쯤 제약이 걸려 쓰러질 텐데,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는 이종족들과는 달리 유클리드는 쉬지도 않고 능력을 퍼붓는 중이었다. 그것도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끊임없이.
“저걸 아군으로 봐야 돼, 잠재적 반란군으로 봐야 돼……?”
알폰스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피시의 말에 의하면 유클리드는 암컷 용이 동맹군에 합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피시가 직접 말한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추측을 내놓은 걸 보면, 확실히 유클리드는 지나치게 교활하고 똑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