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최근 들어 아르세니온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드와 성전이 가까이 있을 땐 이온의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이 성력을 거부하느라 앓았다면, 최근 들어선 제국 전체에 성력이 약화됨으로써 이온의 몸에 ‘그’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느라 앓았던 것이다. 이건 이온이 ‘그’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나아질 수 없는 병이었다.
“아르세니온!”
“아…… 오셨습니까.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박차고 들어간 이온의 침실은 어쩐지 조금 전에 머물렀던 설산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이카르는 화로에 불을 때라고 명령하고는 이온이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의 곁엔 리노가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별일 아니에요. 그냥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리노.”
“예, 예?”
“네가 말해라.”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고집 센 건 제 누이를 꼭 닮았다. 이카르는 아무리 추궁해도 이온이 사실을 말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줄곧 이온의 곁을 지켰던 리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에 당황한 리노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다가 이온을 슬쩍 바라보았는데, 이카르가 누워 있는 이온의 눈을 가려 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지 못하게 차단시켰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영지의 주인이 아르세니온이 아니라 나라는 걸 알고 있다면.”
“너무하세요, 이카르 님. 그렇게 협박하시면 리노는 겁을 먹는다구요.”
이온이 예쁘게 웃으며 제 눈을 가린 이카르의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제 친구를 위해 이카르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제가 잠깐 정신을 놓고 부름에 답할 뻔했어요.”
“뭐?”
“지척에서 들렸어요. ‘그’의 목소리가. 대답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조금 전엔 정말 저도 모르게 답할 뻔했어요. 그리고 그걸 리노가 막아 주었고요.”
우연히 산책하러 나가자며 이온의 방에 들렀던 리노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리노가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던 이온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하마터면 ‘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예요. 제가…… 정신력이 많이 약해졌나 봐요.”
“아르세니온. 네가 수면장애를 겪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네? 제가요?”
“그래.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다가 일어나서 저택 밖으로 나가곤 하더군.”
“……몰랐어요.”
일종의 몽유병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온의 몽유병을 목격한 것은 이카르였다. 이온의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편지를 적던 이카르는 복도에서 들린 작은 소음에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가 횡설수설하며 걷고 있던 이온과 마주쳤다. 그러나 무슨 일이냐는 이카르의 물음에, 이온은 대답하지 않고 스르르 쓰러져 버렸다.
그 뒤로 이온의 감시병이 두 배로 늘었다. 밤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온을 도로 침대에 눕히기도 하고, 악몽을 꾸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 대는 이온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그렇게 난동을 부리는데도 막상 아침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온을 보며, 이카르는 그가 수면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지?”
“……네.”
“아르세니온. 내겐 솔직히 얘기해야 해.”
“알겠어요. 사실은…… 기억이 돌아왔어요.”
“뭐?”
이온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살아났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쌍둥이마저 잊어버린 채로.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카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이온을 바라보았다. 아르세니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뜨린 채 중얼거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가 루스 경에게 황녀궁에서 이엘을 구해 내라고 명령했던 그날까지. 전부요. 전부 기억이 났어요.”
“아르세니온.”
“근데 가끔씩은 기억이 안 나요. 또 잊어버려요. 순간순간, 의식하지 않으면 기억이 휘발돼요.”
“…….”
“제가 회피하고 있나 봐요, 이카르 님. 이 무서운 현실에, 불안한 상황에, 사랑하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방어기제로 자꾸만 기억을 잃나 봐요.”
이카르는 손을 뻗어 눈가가 발개진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아이는 몸은 성인이 됐지만, 정신은 여전히 일곱 살에 멈춰 있다. 2차 전쟁이 터졌던 그날에 멈춰 있는 상태다.
아직 어린애였다. 그래서 갑자기 눈앞에 닥친 이 견디기 힘든 현실이, 자꾸만 이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음이 다쳤군. 이카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골몰했다. 신체가 허약해지면서 정신력도 많이 약해졌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여린 영혼이 자꾸만 상처 입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제 쌍둥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에게 제 병을 감추고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현실이다. 일곱 살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이카르는 쓰다듬어 주던 이온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날 채비를 해라.”
“예?”
“제도로 향한다. 폐하께 가자.”
“하지만 거긴 황자님께 위험하지 않나요……?”
이온이 걱정된 리노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카르 역시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일전엔 이온이 제도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하게 작용하는 성력에 거부반응이 생겨 결국 이곳으로 피신한 거니까.
“일단은 도전해 본다. 어차피 성력이 가까이 있으나 없으나 아르세니온은 죽어 가고 있어. 성력이 있으면 거부반응으로 힘들어하고, 성력이 없으면 몸 안에 심어진 ‘그’의 힘이 증폭되어 죽어 가고. 이러나저러나 죽어 가는 거라면, 차라리 신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게 낫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이엘의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
이온이 주먹을 세게 쥐며 이카르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은 아르세니온이 제 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동기였다. 그녀가 설령 누나라 할지라도, 아르세니온에겐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토록 신신당부하며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가겠습니다. 설령 제 심장이 멈춰 죽는다고 해도, 이엘의 곁에서 죽을래요.”
“무서운 농담 하지 마. 넌 절대 안 죽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이카르는 결연한 눈빛을 보이는 이온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극소수의 재규어만을 데리고 영지를 빠져나온 이카르는 시름시름 앓는 이온을 데리고 무작정 제도를 향해 달렸다.
영지로 오는 길은 쉬웠을지 몰라도, 제도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눈 덮인 설원을 지날 땐 의식을 잃은 이온이 제 등에서 떨어져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다.
이온은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몸과 정신이 모두 약해진 상태였다. 결국 이카르와 재규어들은 제도의 경계를 코앞에 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대장.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잠든 이온을 지켜보다가 막사를 나오던 이카르의 앞에, 제도에 입성하기 전에 양쪽 진영의 상태를 정찰하러 떠났던 재규어가 돌아와 보고를 준비했다.
“아직까진 휴전 중입니다. 제도 쪽 상황은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주둔하고 있는 올리세스 쪽 진영은 승기라도 잡은 것처럼 들뜬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 모릅니다. 차라리 저희가 여기서 올리세스 진영을 치고 제도에 합류하는 건 어떨지 싶은데요.”
“그건 안 돼. 인질들이 온전히 돌아갈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유지해야 한다. 그걸 먼저 제안한 건 폐하시니 우리가 그걸 어겨선 안 돼.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군법은 어겨선 안 된다. 이건 이종족의 영역 다툼이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올리세스가 인질을 더 얼마나 데리고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니 괜한 짓은 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카르도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는 게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독단적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저들의 눈을 피해 쓰러진 이온을 무사히 황궁에 데려가는 것이니까.
이카르는 다시 이온의 막사 안으로 들어와 잠든 그를 흔들어 깨웠다. 오는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인지 이온은 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이카르가 이온을 처음 만났던 땅굴에서처럼 빼빼 말라, 보는 이로 하여금 염려가 들게 할 정도로.
“이카르 님. 제가 또 잠들었습니까?”
“정신 차릴 수 있겠나? 이제 곧 제도의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네. 괜찮습니다.”
“심장의 통증은?”
“전보다 괜찮아요. 그땐 숨도 못 쉴 것처럼 아팠는데, 지금은 그것보단 낫네요.”
이온의 대답에 이카르가 막사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전에 왔을 때보다 이온이 괜찮아졌다는 건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이온이 ‘그’에게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상태가 나아졌을 리가. 그냥 이곳 제도가 전보다 많이 쇠약해졌다는 뜻이다.
오드가 떠났다. 그리고 수차례 이어진 전쟁으로 평원은 피로 물들었다. 포필렌이 만연하게 번졌고 이교도들이 제도 내부까지 파고들었다.
그나마 제도군에 남아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를 치고 있을 성전기사단들은, 갈수록 약해질 오드로 인해 종내에는 빌린 성력을 모두 잃겠지.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제 우린 제도로 들어가려 한다. 괜찮겠나, 이온?”
“물론이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에게 있어 이온은 이엘을 휘두를 인질이니 이온을 죽이진 않겠지만……. 어쨌든 고통을 견디는 건 이온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이온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 보였다. 저럴 때마다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카르는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온의 침상 앞에 자세를 낮춰 그를 제 등에 태웠다. 그것을 신호로 재규어들은 임시로 세웠던 막사를 빠르게 정리하곤 모두 허리를 숙여 풀숲에 몸을 숨겼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다른 재규어의 등에 올라탄 리노가 이온을 향해 조용히 그의 상태를 물었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는데도 이온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청명해 보였다.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리노는 저가 쥐고 있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생을 공부만 하느라 이런 무기를 손에 쥘 줄 몰랐는데…….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전장은 자신의 형이 만든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 절반은 제 책임이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고는 해도, 절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꺼낸 건 리노 자신이었다.
‘지하에 가둬라.’
어려서부터 영특하다 칭찬받았고 일찍이 연구소에 선발되어 전도유망한 인재로 취급받았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서는 안 될 선황의 비밀을 듣게 된 이후, 아끼던 친구인 황자의 몫까지 대신하여 고문을 받다가 미쳐 버렸다.
그렇게 돌아온 가문에선 리노를 반기지 않았다.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황제에 의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윌터 백작은 돌아온 리노를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지하에 가두라는 명령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뭐라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