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6화 (456/488)

456화

납치가 아니라 인질 교환이었나. 이엘은 오드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는 여전히 평소와 똑같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오드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건…… 이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뜻일 것이다.

“각 영지와 제도로 향하다가 저희에게 붙잡힌 인간들이 아주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전쟁이 터지자마자 저희에게 납치되어 온갖 일을 당했는데도 제도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렬한 자들이죠. 폐하와 성전을 참 신실하게 믿고 있다고나 할까.”

“…….”

“그 인간들과 포필렌의 약효가 통하지 않아 쓸모없어진 이종족들. 그들 전부와 나자르의 교환을 요구합니다.”

포필렌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우논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우논이라면 곧장 전력이 될 텐데도 선뜻 보내 준다는 건, 그들이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일 테고. 온갖 고문과 실험으로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있을 이종족들. 그리고 한없이 약한 인간들. 그들과 나자르를 교환하는 것은 누가 봐도 올리세스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폐하. 안 됩니다.”

패티스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 일은 올리세스에게만 좋은 일이 될 거라고. 나자르를 빼앗기는 순간, 그녀의 모든 지지기반이 내려앉는다.

이전부터 패티스는 그런 생각을 해 왔다. 이 신성제국 르뷔는 강력한 신성을 기반으로 세워진 제국이다. 그러므로 그 주축이 되는 나자르가 곧 권력의 중심이 된다. 황제인 이엘은 처음부터 권력을 자신이 쥐지 않고 성전과 분립하여 나눠 가졌다. 게다가 그녀는 나자르와 성전의 권한을 황실보다 더 높게 주기까지 했다.

이러다 황실과 성전이 대립하는 일이 생기면, 황권은 몰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패티스는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

“안 됩니다. 나자르 님은 안 됩니다, 폐하. 인질을 포기하시는 게 낫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인질은…… 전력조차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전력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패티스의 뜻에 동조하는 자들이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입을 열지 않은 자들도 대부분 같은 뜻일 것이다. 누구보다 강한 전력인 오드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인지한 탓이다.

“게다가 오드 님을 보내면 놈의 목숨만 연장시키는 꼴이 됩니다.”

누군가의 주장에 올리세스가 웃었다. 그러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루하루를 포필렌에 의존해 겨우 버티고 있지만, 나자르의 성력 한 번이면 몇 주는 버틸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부작용을 남기는 포필렌과 달리, 성력은 신체와 정신에 좋은 것만 남길 것이다.

이엘은 술렁이는 좌중을 잠재우고 곁에 선 독수리를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르네. 나가서 올리세스의 진영을 확인해라. 인질이 정말 존재하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도.”

“알겠습니다, 폐하.”

르네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장 알현실을 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올리세스는 독수리가 나간 이유가 인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유로웠다.

“저희 협곡에 숨어 있는 수만큼 있습니다, 폐하.”

빠르게 돌아온 르네는 그녀의 귀에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속삭였다. 요새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수만큼 있다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단 소리다. 이엘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1기사단과 2기사단이 협력하여 인질을 데려온다.”

“폐하!”

“네 협상을 받아들이겠다. 인질을 교환하는 동안은 휴전이며, 이를 어길 시엔 네 목숨부터 내가 취할 것이다. 알았느냐?”

“그럼요, 폐하. 자비로우신 폐하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선 소문과 달리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공의를 따르시는군요. 솔직히 전 이 협상이 결렬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기사단은 무얼 하나. 어서 가서 인질들을 데려오지 않고.”

이엘의 엄한 목소리에 1, 2기사단이 모두 자리를 떠났다. 근위대는 올리세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의 목에 검을 갖다 댔다. 조금이라도 허튼 수법을 부리면 바로 응징하여 죽이겠다는 표정으로.

“올리세스. 인질이 교환되는 곳까지 그대는 근위대와 함께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근위대와 검으로 둘러싸인 올리세스는 흔쾌히 걸음을 옮겼다. 이엘은 뒤에 선 패티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는 고민하는 듯싶다가 지하실로 은밀히 움직여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곤 그것을 오드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해독제입니다, 오드 님.”

“해독제를 만드는 것에 성공하셨나요?”

“아직 확신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급하니까요.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그곳에 있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포필렌의 해독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까진 효과를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금단현상으로 괴로워하던 레온이 이 해독제를 복용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지.

“저는 ‘선’을 위해 움직입니다, 폐하.”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을 잃은 이엘을 향해 오드가 말했다.

“신의 뜻이 곧 ‘선’이니까요.”

“오드.”

“몸조심하세요, 폐하. 부디 이별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의 가호가 폐하께 있기를.”

“오드. 놈은 선황처럼 ‘그’를 불러내려 할 거야. 그래서 보호석을 모으는 거고. 어쩌면 로빈이 계획했던 것처럼, 널 데려가 희생시킬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테니까 꼭 다시 만나. 알겠지, 오드?”

“네, 폐하. 걱정 마세요. 제가 이곳을 떠나면 결계가 약해질 거예요. 공습을 조심하세요, 폐하.”

오드는 그렇게 말하며 황궁 밖으로 나갔다. 이엘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오드 님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폐하.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아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이엘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이별을 겪어야 하는 현실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어린 시절 제 전부였던 이온과 오드를 다시 멀리 보냈다. 우리는 정말 셋이 함께할 수 없는 걸까. 돌연 그런 생각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던 것 같다.

*

아스타로가 이끄는 이교도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아스타로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포필렌의 과다 복용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여기저기 날뛰었고 마침내 그 힘은 잘못된 방향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대장! 놈들에게 당했소!”

“젠장.”

이카르의 영지는 그곳 지리에 밝은 재규어들이 아니면 출입이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로부터 침략당할 위협이 적었다. 뿐만 아니라 영지를 빙 둘러싼 산은 높이가 높지 않은데도 특이할 정도로 기온이 낮아 만년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게 요새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래서 이카르와 재규어들은 만년설이 있는 쪽 근방에 성전을 지었다. 재규어의 영지는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 이카르가 사는 저택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곳에 성전을 세울 수는 없어서 일부러 영지 밖에 성전을 지었던 건데…….

“반파됐나? 침입한 놈들은?”

“침입자는 전부 처리했습니다. 근데 폭발까진 막지 못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다. 최근 들어 아스타로와 그의 이교도들이 제국 곳곳에 지어진 성전을 폭발시키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이종족의 영지까지 침입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겁도 없이 재규어의 영지에.

“물론 저희가 반격하기도 전에 휘몰아친 눈보라에 그쪽은 절반이 파묻혀 죽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군.”

“죄송합니다.”

“됐어. 너희가 사죄할 부분이 아니다. 방심한 내 잘못이지.”

이카르는 재빨리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 종족과 함께 성전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건물의 절반이 허물어졌다. 그 위로 몰아닥친 눈보라가 처량해진 건물의 외벽을 덮고 있었다. 이카르는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치우라고 명령하곤 뼈대만 남은 터를 둘러보았다.

“대장. 놈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소. 나자르님을 납치한 뒤로 기세가 미친 듯이 오르고 있소.”

“알고 있다.”

“그냥 우리가 가서 도로 모셔 오는 게 어떻습니까?”

며칠 전. 이엘을 찾아가 인질 교환을 요구한 올리세스는 결국 저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오드를 데려간 것이다. 그로 인해 반군의 기세가 올라간 건 당연한 결과였다. 르뷔 제국은 신성제국이었고, 성전과 나자르가 쥔 권력이 황권보다 높았기 때문에 나자르가 선 곳이 승기를 쥔 곳이었다.

게다가 올리세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오드를 납치하지 않았다. 인질 교환을 요구한 것이다. 그 과정은 정당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정당했다. 오드가 순순히 제 발로 그를 따라갔고, 올리세스의 진영에서 다친 자들을 성력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가 그랬다. 나자르는 올리세스의 편에 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린 놈이 원하는 짓을 하게 돼. 우리가 도리어 나자르를 납치하는 꼴이 된다고.”

그리고 오드를 데려올 계획이었다면 애초에 이엘은 오드를 올리세스에게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드가 포필렌 해독제를 가지고 갔을 확률이 컸다. 오드 역시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모두의 염려대로 올리세스가 오드를 데려간 뒤로 반군의 기세가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다만 이상한 점은 나자르를 데려가 놓고 하는 짓이 성전을 파괴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올리세스가 저희들의 구원 줄이라도 되는 줄 아나?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인간들의 판단력이 흐려진 걸 보면, 정말로 신의 축복이 그들을 떠난 게 맞는 모양이다.

이카르는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눈보라를 피해 설산을 내려갔다. 이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이곳은 계절도 의미가 없는 곳이다. 푹푹 파이는 눈길을 달려 내려오던 이카르의 앞으로 누군가 황급히 달려왔다.

“발트. 무슨 일이냐.”

“황자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아르세니온?”

이카르는 엄청난 속도로 눈 덮인 산을 내려와 저택을 향해 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