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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5화 (455/488)
  • 455화

    *

    “드레인. 너 나쁜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스완의 볼멘소리에 드레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스완이 열매를 가져온 날부터 지금까지 열매만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드레인을 보고 있으니, 스완은 킨과 로빈으로부터 들은 말들이 떠오른 것이다. 저 열매가 한번 눈에 들어오니 그 다음부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혹여나 드레인도 킨과 수컷 용처럼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왜. 내가 그 멍청한 수컷들처럼 될까 봐 그래?”

    “응. 네 눈빛이 의미심장했어.”

    “사실 좀 욕심이 생기긴 했어.”

    “뭐?!”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저걸 갖고 신께 돌아가면 날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하고.”

    드레인의 시선은 어딘가에 숨겨 놓은 소녀들에게 향했다. 스완이 자신의 능력 안에 들어오는 것에 성공했고 그가 가져온 이 열매도 이곳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정작 그 아이들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저 열매는 수컷들이 가지고 달아난 물건이다. 저걸 가지고 돌아가면, 어쩌면 자신이 규칙을 어기고 테런스의 딸들을 살려 둔 것에 대한 죄를 모른 척해 주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사실 드레인은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신께서 제게 화가 나셨다면 저 수컷 용들처럼 어떤 형태의 저주를 받았겠지.

    하지만 드레인은 지금까지도 멀쩡하다. 그저 동족과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저 소녀들을 버리고 신께 돌아간다면, 그분은 반드시 자신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테런스의 소중한 딸들을 이곳에 버려두고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지지부진한 거겠지.

    “드레인. 정신 차려. 저 요망한 열매 따위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그런 거 아니니까 혼자 난리 치지 마. 그리고 저 열매는 신의 열매야. 감히 내 앞에서 요망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그게 신성모독이란 건 알고 하는 소리야? 미쳤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네. 그것도 욕망이야. 나쁜 마음이라고.”

    “…….”

    “그 애들 때문에 그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깨워 줄 테니까 나쁜 마음 먹지 마. 열매는 폐하께 드리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어딘지 모르게 간절하게 느껴지는 스완의 목소리에 드레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욕망이라고. 나쁜 마음이라고……. 스완의 말에 동의한다. 저게 눈앞에 보이기 전까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니까.

    오히려 열매에 홀려 신을 떠난 수컷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열매를 이렇게 덩그러니 마주하니…….

    “네 말이 옳아, 스완. 이건 우리 용들에게 위협적이야. 암컷이든 수컷이든.”

    스완이 처음 들고 이곳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 열매가 정말 그 열매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그녀의 동족인 암컷 용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는 중이다. 드레인 역시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그 나무의 곁에 머물렀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열매의 존재를 잘 알 수밖에.

    하지만 스완이 가져온 열매는 죽은 상태의 열매였다. 겉으로 보면 인간들의 세계에 있는 과일과 다를 바 없이 생겼는데, 그건 이 열매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의심했다. 그 수컷 용들이 스완과 이엘을 속이기 위해 가짜 열매를 가져온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열매는 이곳에서 본모습을 되찾았다. 수컷 용들과 인간들의 축복을 빼앗은 신은 그것들을 전부 암컷 용에게 주었고, 그들의 성력 역시 전보다 몇 배는 증폭됐다.

    그러니 드레인의 영역에서 열매는 금세 본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성력이 충만하니까. 다만 이곳을 나가면 도로 죽어 버릴 것이다.

    드레인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자신의 시야에서 열매를 사라지게 했다.

    “당분간은 가려 두는 게 좋겠어. 그나저나 스완. 밖의 상황은 어때. 폐하께선 괜찮으셔?”

    “응.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아. 몸도 괜찮고, 전체적으로 다 괜찮아.”

    스완의 성력이 점점 완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이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스완은 이제 그녀의 감각까지도 원한다면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며칠 전에 이엘이 배 속의 둔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을 때, 이곳에 있던 스완도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눴다.

    “근데 늑대의 새끼를 가져서 그런가. 폐하 말씀으론 유독 냄새를 잘 맡는 것 같대. 난 여기 있어서 그런 건 잘 모르겠다고 답했지만.”

    스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레인이 손가락을 튕겼고, 커다란 테이블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 위로 온갖 음식들이 빼곡하게 차려져 있었다. 스완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진짜네. 뭔가 예전이랑 달라. 후각이 예민해진 것 같아.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늑대가 된 기분이라서 별로네.”

    “스완. 앞으론 네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폐하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언제나 그쪽에 신경 써야 해. 알겠어?”

    “물론이야. 다시 폐하를 만나는 날까지, 내가 이곳에서 전력을 다해 서포트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스완의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영롱하게 빛이 났다. 그 눈빛이 처음 만났을 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드레인도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완전한 성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저 고니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하겠지. 아마도 그의 필요가 끝나는 날까지, 스완은 끝없이 성장하고 또 성장할 것이다.

    *

    오드가 납치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이엘은 성전과 황궁의 경비를 최고 단계로 올렸다. 물론 오드의 성력으로 결계를 쳐서 방어할 수 있긴 하지만, 사건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올리세스가 폐하의 알현을 청합니다.”

    “뭐라고?”

    황당함에 반문한 건 이엘이 아니라 노아였다. 곧장 황궁에 잠입해 습격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는데, 올리세스는 돌연 방향을 틀어 황궁 문을 두드리는 쪽을 택했다.

    제도 앞에 주둔해 있던 올리세스의 병사들은 진을 한참 뒤로 물렸고, 맞대응하던 이엘의 동맹군도 황궁 쪽으로 철수한 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올리세스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가 당당하게 진영을 뚫고 다가오더니 황궁 문을 두드렸다. 그것도 주변엔 떠돌이 이종족들을 잔뜩 데리고.

    이 이종족들 때문에 동맹군들 사이에서 또다시 분열이 날 뻔했다. 자의로 올리세스의 편에 선 자들도 있지만, 포필렌에 중독되어 세뇌된 자들도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그들을 적군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봐야 할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던 차에 경비를 서던 위병이 올리세스가 황제와의 알현을 청한다는 말을 갖고 온 것이다.

    “황궁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은 무기를 뺏고 놈의 곁에 선 이종족들의 출입을 막은 채 들여보내는 건 어떠십니까.”

    “그러다 한순간에 일이 터지면 어쩌려고?”

    “폐하의 곁엔 우리가 있다. 뭘 걱정하지?”

    어느새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제각기 의견을 나누다가 점점 더 소리가 커지자, 이엘이 머리를 짚으며 소리쳤다.

    “그만. 머리가 아프니 그만들 해.”

    순식간에 집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이엘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선을 오드에게로 돌렸다. 철통같은 보호 속의 그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어 줄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이엘의 몫이다.

    “들여보내.”

    “하지만 폐하……!”

    “알현실 내의 보호석은 전부 해제하여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하고, 올리세스와 함께 온 이종족들은 황궁 안뜰조차 밟을 수 없게 밖에 세워 두고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이엘은 근위대와 기사단을 대동해 알현실로 향했다. 이윽고 알현실 문이 열리며 이름을 듣기만 해도 지겨운 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올리세스는 몇 달 전에 그의 영지에서 보았을 때보다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군.”

    “그렇게 보이십니까?”

    “무슨 생각으로 적진인 이곳까지 홀로 왔지? 항복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엘의 질문에 올리세스가 짧게 폭소했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 곳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이종족들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엘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올리세스를 향해 손짓했다.

    “한 걸음 가까이 오라.”

    “이런. 제가 폐하께 다가가 칼로 찌르면 어쩌시려고.”

    “그 전에 그대의 목이 내 손에 틀어쥐겠지.”

    “아뿔싸. 그렇군요. 체술로는 폐하께 비할 수가 없으니.”

    “약에 의존하여 겨우 연명하는 것치고는 입은 살았구나.”

    “…….”

    올리세스는 처음으로 당황한 듯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큰 병을 앓았다는 건 몇몇 귀족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해 포필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는 건 측근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누군가 내부의 비밀을 빼돌린 걸까?

    “오랜만이야, 올리세스 남작. 내가 이쪽에 네 정보를 모조리 싹∼ 줬거든. 이제 폐하께선 너에 관해 모르는 게 없지.”

    이엘의 뒤쪽에서 조롱하며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유클리드였다. 저 스라소니……! 모리아 사건으로 한 번 결렬됐던 동맹이긴 하지만, 그가 다시 제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스라소니까지 황제의 편에 선 건가. 올리세스는 유클리드를 노려보다시피 쳐다보다가 다시 태연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래서 폐하께선 제게서 약까지 빼앗아 갈 심산입니까? 나의 피시까지 죽였으면서?”

    “나의 형제를 네 더러운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

    듣다 못한 패티스가 역겨움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놈이 피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희소식이나, 감히 제 형제를 입에 담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패티스의 대꾸에 올리세스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족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것만큼은 하트도 참을 수 없었던 건지, 그는 이엘이 말리기도 전에 능력을 사용해 벽에 걸려 있던 단창을 올리세스의 얼굴 옆으로 날려 버렸다. 올리세스는 스친 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고개를 돌려 벽에 꽂힌 창을 바라보곤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보호석을 해제하셨군요, 폐하.”

    “그대가 이곳에 온 게 항복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럼 더 이상 널 봐줄 이유가 없지.”

    “진정하세요, 폐하. 일단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시겠어요?”

    그는 그 말을 하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퍽! 하고 가볍게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황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올리세스의 진영 쪽이었다.

    “지금 인질 한 명이 죽었습니다.”

    “뭐?”

    “저희 쪽 이종족엔 개가 많아서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작은 소리도 잘 듣고 주인의 말을 따를 수 있죠. 제가 핑거 스냅을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인질이 모두 죽을 겁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흥분한 앤디가 금방이라도 검을 겨눌 자세를 취하자 노아가 그를 뒤로 밀며 이엘의 곁에 바짝 붙었다. 늑대와 개는 한 끗 차이이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까다롭고 귀찮은 종족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개가 많다면 이 싸움은 꽤 길어질지 모른다.

    그런 노아를 힐끔 보며 올리세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십시오. 그들을 죽이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요.”

    “그럼 왜 온 건데.”

    “협상하러 왔습니다. 인질 교환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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