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그때 앤디가 포레스트의 발치에 하얀 털을 떨어뜨렸다. 포레스트는 그 털의 주인공이 슈프임을 한눈에 알아챘다.
“나는 1기사단의 부단장이다. 그리고 폐하의 그림자이기도 해.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나?”
다소 짜증이 섞인 듯한 앤디의 목소리에 포레스트는 겁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는 검지를 입술 위에 대며 그들에게 진정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손에 쥐고 멈춰 섰을 때, 포레스트는 노래를 부르며 앤디의 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잿빛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잔뜩 성질을 냈지만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던 울음소리도 어느샌가 줄어들더니 포레스트의 앞에 자세를 낮추고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쉬이― 괜찮아. 괜찮아. 이리 와.”
포레스트의 손짓을 따라 늑대가 꼬리를 살짝 흔들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누가 봐도 야생 늑대를 길들인 듯한 포레스트의 재주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멈추지 않고 포레스트는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늑대는 얌전히 그의 손짓을 받으며 갸르릉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보셨나요? 전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이종족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어요.”
“세상에…….”
“저와 함께해요, 여러분. 아스타로 님과 함께하는 거예요.”
포레스트가 눈꼬리가 휘어질 정도로 예쁘게 웃으며 뒤편에 서 있던 아스타로를 가리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의 관심이 포레스트에게 쏠린 것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던 아스타로는, 곧장 제게 향한 탄성에 의심을 거두고 단상에 나섰다. 아스타로는 모든 게 제 능력이라는 듯 그곳에 서서 자랑스럽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포레스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앤디에게 물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 난 개인적인 용무로 왔다. 그것보다 여기서 지금 네 위치가 어느 정도 되지?”
“위치라고 할 건 없어요, 아직. 아스타로의 신뢰를 조금씩 받는 중이지만, 아스타로는 의심이 많아서 무리 안에 완벽히 스며들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아스타로의 신뢰를 받을 필요 없어.”
“네?”
“아스타로를 제외하고 다른 놈들의 신뢰를 다 받으면 되니까.”
앤디가 하는 말의 의도를 몰라, 포레스트는 아주 잠깐 주춤했다.
“내가 아스타로의 자리를 네게 뺏어 줄게.”
“네?”
“네가 아스타로의 위치를 차지해라. 그런 뒤에 난 저놈의 목을 뜯어 갈 생각이니까.”
아스타로는 이 모든 사태의 주원인이다. 놈의 화려한 언변과 잔재주에 심약해진 인간들은 넘어갔고, 잔악한 성정에 이종족은 이용당하고 있다.
그래서 아스타로를 죽일 생각으로 이곳에 왔던 건데, 앤디는 포레스트가 예상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걸 알고 그걸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뱀. 네 주인인 로빈을 좀 흉내 내 봐. 터는 내가 만들어 줄 테니.”
“그렇게 하면 폐하께 도움이 될까요?”
“당연한 소리지. 뱀인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움 아니겠냐?”
앤디의 말에 포레스트는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열심히 연설 중인 아스타로를 쳐다봤다. 앤디가 로빈을 언급해서인지 그간 뻔뻔해 보였던 아스타로의 모습이, 그저 로빈을 따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포레스트는 앤디의 말처럼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쓸모 있게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둔의 경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평소처럼 하트의 등에 올라 제도 경계를 정찰하던 이엘이 배를 움켜잡고 그의 등에서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하트가 늘 예민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기 때문에, 이엘이 제 등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자마자 곧장 몸을 틀어 그녀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나흘째 이엘은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잃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드가 성력으로 안정시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부디 이 통증 기간이 짧아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엘. 정신을 놓으면 안 돼. 날 봐. 응?”
노아는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한시도 그녀의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이 잠깐 멈출 때마다 이엘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가 자꾸 날 불러……. 이엘의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심장이 철렁였다. 가뜩이나 이카르로부터 이온에게 환청이 들린다는 편지로 인해 잔뜩 예민해져 있던 차였다. ‘그’는 이쪽 세계로 오기 위한 매개체로 이엘과 이온 모두를 공략하고 있었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 제발 정신을 놓지 마, 나의 엘. 응?”
노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이엘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정신을 놓지 않게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후회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럴 때마다 그녀가 임신한 것에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고통을 자신은 조금도 나눠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무력함을 느낀다.
“자꾸…… 자꾸 날 불러…….”
“엘! 정신이 들어? 하트 경! 물을 가져와!”
“예.”
버석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더니 이엘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대답, 대답하면…… 안 되겠지.”
“안 돼. 안 됩니다, 폐하. 제발 저만 보십시오. 다른 건 보지 말고, 다른 건 듣지 말고. 제 목소리만 들으십시오, 폐하.”
“너무 아픈데 포기할 수가 없어, 노아…….”
“엘.”
“……움직이잖아. 테오도로가 움직여.”
이엘은 잡고 있던 노아의 손을 이끌어 제 배 위에 올렸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노아도 신음을 집어삼켰다. 어떤 약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견디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이 시기를 지나면 안정기가 찾아온다고 했지만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후에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그녀를 위해 아기를 포기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포기, 포기하지 마……. 노아, 당신도 포기하지 마…….”
“…….”
“내가 견딜게. 약속했잖아. 우리 아기 지켜 준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그녀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그 눈물을 훔쳐 주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노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엘은 다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노아는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테오. 네 어머니를 너무 괴롭게는 하지 마라. 내겐 너무 소중해. 너만큼이나 소중하니까 부디 내게서, 그리고 네게서 네 어머니를 앗아 가지 마.”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짧고 강렬한 태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엘의 숨소리가 편해졌다. 신음이 뒤섞였던 소리가 줄어들고 평소의 고른 숨소리로 돌아왔다. 편해진 낯으로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노아는 다시 이엘의 배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고맙다, 테오.”
아주 잠깐이라도 널 포기할 생각을 하다니. 노아는 조금 전의 실수를 후회하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이엘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자도 예전의 체력만큼 회복되진 않았지만, 둔이 말한 위험한 단계는 무사히 잘 넘긴 게 틀림없었다. 다만 그때의 고통이 후유증으로 남은 탓인지 새벽에 짧게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제야 후작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폐하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오랜만에 별관에 있는 정원을 구경하러 나온 이엘의 농담에 레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우논이니 밤에 잠을 못 자더라도 큰 문제는 없지만 인간은 다르다. 특히 아이를 가진 모체라면 더더욱.
레온은 잠을 못 자 눈 아래까지 보랏빛으로 변한 이엘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폐하.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오는 것 같아. 냄새가…….”
그녀는 말을 잇다가 말고 고개를 돌려 본궁이 있는 곳을 향했다. 배 속의 아기 때문인지 감각이 이전과 달리 예민해졌다. 특히 후각이 심각할 정도로 발달해서, 어떤 때는 노아보다 냄새를 더 잘 맡기도 했다. 지금도 상당한 거리 너머에서 느껴지는 낯선 이의 냄새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졌다.
“제가 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냐. 내가 본궁으로 가는 게 좋겠어. 근위대장.”
“예, 폐하.”
하트가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에 몸을 숙이자 이엘은 날렵하게 그 위에 올라탔다. 그녀는 레온에게 별관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곤 빠른 속도로 황궁에 돌아왔다.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로빈이 보낸 심복이 적군의 공격을 피하며 제도의 경계를 막 지나쳤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엘은 옷을 차려입고 알현실에서 뱀을 만났다.
“폐하를 뵙습니다. 저는 로빈 공작님이 보낸 하렌이라고 합니다. 폐하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여 왔습니다.”
뱀이 건넨 종이를 받아 읽은 이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오른편에 서 있던 오드에게 닿았다. 나자르인 그는 당연하게도 이 일을 예상했던 건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엘은 로빈의 수하를 돌려보내고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를 불렀다.
“지금 당장 성전기사단장인 사피라 경과 함께 오드 님과 성전을 지키도록 하게. 3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1, 2기사단을 더 보강해도 좋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올리세스가 오드 님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군.”
“…….”
“무슨 일이 있어도 오드 님이 납치돼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폐하.”
우렁차게 대답한 라니에로는 오드의 뒤에 섰다. 오드는 그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한 뒤, 이엘을 향해 살짝 묵례하곤 라니에로가 안내하는 곳으로 사라졌다.
“올리세스가 어떤 방식으로 나오더라도 오드 님을 지켜야 한다.”
“예, 폐하.”
“패티스 백과 노아 공은 놈이 어떻게 나올지 전략을 짜고 보고하도록.”
“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드만큼은 빼앗겨선 안 된다. 올리세스는 그를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려고 이런 짓을 꾸민 거겠지만, 이엘에겐 오드가 부모이고 친구이며 가족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겨선 안 된다. 겨우 만난 가족과 다시 헤어지는 건 이온 하나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