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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1화 (451/488)

451화

*

곰을 찾아가 화친과 원군 요청을 하고 돌아온 레온은 며칠 전에 제도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해는 컸지만 다행히 나타니엘은 무사했고, 그녀의 아이 또한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레온은 찻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르네의 침실 문 앞에 섰다. 반 정도 열린 틈새로 그 커다란 남자가 창문을 바라보며 골몰하는 게 보였다.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이렇게 문 앞에 있는데도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레온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제야 르네가 뒤로 돌아 레온을 쳐다봤다. 그의 오른쪽 눈은 검은색 안대로 가려진 채였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문을 두드려 노크했다.

“공작님의 사색을 방해했을까요?”

“별로. 들어오시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뒷짐을 진 채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레온은 갖고 온 트레이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르네의 옆에 서서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까지 보실 수 있습니까? 독수리의 능력으로요.”

“글쎄.”

“저 별도 볼 수 있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오.”

레온의 농담 같은 질문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르네는 조금 전에 레온이 트레이를 두고 온 테이블로 향해 찻잔 두 개를 들고 다시 창문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하나를 레온에게 건넸다.

“향이 좋군.”

“폐하께서 직접 달이셨으니까요.”

“…….”

“폐하가 걱정되시면 내게 물어보십시오.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릴 테니.”

벌써 이틀째였다. 전투에서 눈을 잃고, 충격을 받은 이엘과 멀어지게 된 게.

르네는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이엘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르네가 일부러 이 일을 벌인 것이라고. 평소의 그였다면 눈이 찔리는 실수를 했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일부러 공격을 당한 척하며 눈알을 뺀 것이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언젠가는 자신이 희생할 각오로 유리통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지만, 이번 일은 르네가 일부러 벌인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실수였다. 어린 우논도 하지 않을 멍청한 실수.

르네는 이틀 전의 사고를 떠올리며 피곤하다는 듯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일부러 그러셨습니까?”

“후작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별 상관없으니.”

“눈알이 담긴 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시오?”

“나 또한 언젠간 공작님과 같은 일을 벌일 테니까요.”

레온은 마치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르네는 언젠가 제 영지에서 레온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가 아프면 내 갈기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작님은요? 당신도 같습니까?’

그의 질문에 르네는 이렇게 답했었다.

‘기꺼이. 난 내 두 눈을 달라고 하여도 기꺼이 드릴 것이오.’

어쩌면 그날부터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언젠가 자신의 희생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이엘과 관련된 것이라면 르네는 주저 없이 희생을 택할 독수리였으니까.

“패티스 백작에게 전달했소.”

“역시 그렇군요. 그 남자는 이런 일에 꽤 냉정하니까.”

르네가 한쪽 눈을 잃고 본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심지어 노아마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르네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황궁에 있던 패티스는 달랐다. 그는 마치 언젠가 제 손에 독수리의 눈알이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엔리케에게서 르네의 눈알이 담긴 유리통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엔리케는 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며 불쾌해했으나 르네는 예상한 일이었다. 패티스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그렇게 말한 레온은 들고 있던 찻잔을 트레이에 내려놓고 침실 문까지 향했다. 그러다가 문고리를 잡고 다시 뒤로 돌아 르네가 듣고 싶었을 말을 남겼다.

“폐하께선 속상해하십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하네요. 그분을 죄책감 속에 두고 싶지 않다면.”

“…….”

“아시겠지만 폐하께선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시잖아요. 사실이든 아니든.”

그러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르네는 얼어붙듯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창틀에 발을 올렸다. 그러곤 창밖으로 뛰어내려 곧장 독수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날아 도착한 곳은 황궁 뒤편에 있는 별관 앞이었다. 그가 머물던 객실에서 별관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르네는 마음이 조급해 저도 모르게 독수리의 모습으로 그곳까지 날아간 것이다.

“맙소사. 르네?!”

그리고 정말 예기치 않게 나타니엘과 마주쳤다. 얇은 잠옷 위에 두꺼운 모포를 걸친 그녀가 별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뒤에서 이엘을 지키던 하트가 르네에게 목례하곤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동시에 벌떡 일어선 이엘이 달려와 르네의 상태를 살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혹 어디 아파? 눈? 눈이 아픈 거지? 안 되겠어. 지금 당장 오드 님께 가자. 가서 성력으로……,”

“진정하십시오, 폐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왜…….”

“보고 싶어서요.”

벌써 이엘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서글프게 자신의 오른쪽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의 모습이라 손이 닿지 않을 텐데도, 이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렸다. 결국 르네는 그녀의 손이 차갑게 식지 않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높게 뻗은 이엘의 손이 르네의 안대에 닿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곳을 어루만졌다.

“미안해, 르네.”

“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노아는 어디 있습니까? 왜 추운데 나와 계시고.”

“노아는 본성에 있어. 오늘은 객실에서 자겠다고 했거든. 요새 내가 자다가 자주 깨느라 노아도 계속 밤잠을 설쳤어.”

“왜 잠을 설치십니까?”

“그냥.”

그냥이라고 답했지만 사실은 배 속에서 느껴지는 진통 때문이라는 걸 르네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가 모체에겐 가장 피곤하고 힘들 때였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배 속의 아기가 모체의 영양분을 가져갈 텐데, 이런 상황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면 이엘은 마지막까지 견디지 못할 것이다.

르네는 어머니와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폐하. 폐하의 잠을 설치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저라면, 당분간 황궁을 떠나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폐하 자신부터 지켜야 합니다.”

“…….”

“감정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저는 그럴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어차피 그녀를 향한 제 감정은 멈출 수 없다. 그렇다면 저쪽에서 날 끊어 내도록 만드는 수밖엔 답이 없었다. 르네는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어 내려앉았다.

“사고였든 고의였든 이미 제겐 눈이 하나 사라졌습니다.”

“…….”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제겐 또 다른 눈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르네.”

“그걸 알려 주신 분이 폐하십니다. 실의하고 집단자살을 생각했을 때, 그런 저를 멈추게 만드셨던 분이 폐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요. 계속 살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고요.”

“…….”

“노아가 데려온 둔에게서 들었겠지만, 둔을 임신한 건 만만하게 볼 사안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어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엘이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사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둔을 품기에 완벽하지 않은 이엘이 고통을 호소하다가 끝내 ‘그’를 불러 자신과 아이 모두를 죽이게 되지는 않을까, 르네는 또 다른 걱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아는 그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상황은 매번 달라지는 법이다. 둔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인간 모체에겐 아주 괴로울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이기적으로 구십시오. 모든 것이 폐하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조금은 옆에 나누십시오.”

“…….”

“반은 노아의 탓. 또 반은 제 탓. 또 절반은 패티스 백작의 탓으로요.”

르네의 말에 이엘이 그제야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포를 여몄다.

“알겠어. 반성할게.”

“반성하시란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아냐. 반성해야 돼. 르네. 엄마가 되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려운 것 같아.”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일은 벌어진다. 아이를 가진 그 순간부터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좋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이렇게 매일 밤잠을 설치는데도, 그게 아이가 배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곧장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론 그대의 말처럼 이기적으로 굴게.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그대에게 미안함을 전해.”

“…….”

“애초에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그랬던 건데……. 그때의 내 선택이 옳지 않았나 봐. 그대들을 이런 식으로 이끈 걸 보면.”

“……나타니엘.”

“나의 나라에 그대가 함께할 것이란 그때의 고백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게, 내가 잘할게. 다시는 그대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다시금 뻗은 손으로 르네의 안대를 한 번 만졌다가 내렸다. 그러곤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마지막 말을 전한다.

“그러니까 내 곁을 떠나지 마.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약하게 굴지 않을 테니, 공작은 짐의 곁에서 짐을 제대로 보필하도록 해라.”

“예,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쉬어. 나도 오늘은 단잠에 빠질 수 있을 듯해.”

“예. 하트 경, 나와서 폐하를 모시게.”

르네의 목소리에 저 멀리 있던 하트가 이엘의 근처로 다가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르네는 이엘과 하트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전 그녀의 손이 닿았던 안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간헐적으로 느껴지던 통증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제겐,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리는 타이곤의 갈기보다 그녀의 손길 한 번이 더 특효인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줄곧 마음을 옥죄듯 억누르던 무언가도 사라졌다. 르네는 더 이상 자신의 짝사랑이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느꼈다. 이젠 그녀에게서 사랑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더 이상 아픈 사랑이 아니다. 나와 그녀 모두 성장시킨 좋은 감정이었음을, 르네는 그 순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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