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명쾌하게 해답을 준 밀로는 이엘의 손을 놓고는 다시 창문으로 다가갔다. 들어올 때처럼 그곳으로 나갈 모양인지 창문을 열고 다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멈추고는 한쪽 발은 침실에, 다른 쪽 발은 창밖으로 걸친 채 창틀에 앉아 버렸다.
“우리가 가져온 그 열매. 정말로 암컷 용의 영역에서 되살아난다면 잘 생각하고 사용해.”
“…….”
“하나밖에 없으니 쓸 수 있는 기회도 단 한 번뿐이야.”
밀로의 충고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는데도 안심이 안 된 건지, 밀로는 상체를 창밖으로 뺐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고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알지? 그건 신의 힘을 빌린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 신의 완전한 능력이 아니야. 아주 일시적일지도 몰라. 혹은 다른 형태의 효과일지도 모르고.”
“알아. 걱정 마.”
“이엘의 선택을 믿으니까 널 믿는 거야, 노아.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너희가 마음에 들어서 합류한 게 아니니까. 넌 무조건 나타니엘을 지켜. 알겠어?”
“그래. 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게.”
“좋아. 그 정도 의지를 바랐다고.”
휘파람까지 불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밀로는 마지막으로 잠든 이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
당연하게도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하트의 등에 올라탄 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인간들을 엄호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
“예!”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제 종족인 스라소니들을 데리러 갔던 유클리드는, 제도로 오는 도중에 피난길에 오른 인간들과 여러 이종족을 발견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인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스라소니들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유클리드는 발 빠른 부관을 황궁으로 먼저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이엘은 기사단을 파견해 스라소니들과 합류시켰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심각한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원이 정예병이었던 이엘의 무리도 제도로 들어오는 데 애를 먹었는데, 하물며 노인과 환자들이 많은 피난민들이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스라소니와 기사단 역시 그들을 보호하면서 역공을 펼치는 건 어려운 상황이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머리 위에서 르네가 고함쳤다. 이윽고 활강하듯 내려온 독수리가 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커다란 날개를 퍼덕였다. 덕분에 이엘에게 쏟아지던 화살들이 독수리의 날갯짓에 저 멀리 날아가 팽개쳐졌다. 변장한 이엘을 알아본 건지 적군의 공격은 그녀와 근위대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잘됐어. 내가 시선을 분산할 테니 스라소니와 3기사단은 피난민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향해라.”
“폐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저쪽엔 지시를 내려야 할 사령관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무법 지대예요.”
패티스와 레온의 예상대로 이곳엔 올리세스가 없었다. 그를 대신할 만한 주체도 없었다. 그냥 보이는 것들과 움직이는 것을 향해 닥치는 대로 달려드는 자들만 가득할 뿐이다.
하나같이 약물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 힘을 감당하지 못해 폭주하는 자들이 절반을 넘었다.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차라리 사령관이 있었더라면 전략이라도 유추해 보고 그에 따른 대응 방식을 바꿔 나갈 텐데, 이성과 본능을 잃고 그저 공격하고 죽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적군을 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저쪽의 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피해의 정도는 적군이 더 컸지만, 비율로 따지면 이엘과 동맹군의 피해가 더 심각했다.
르네는 그 말을 전하면서도 쏟아지는 공격을 막느라 진을 뺐다. 보호석이라도 전부 걷어 내면 좋겠는데, 축적된 보호석이 얼마나 많은지 수거하고 강탈해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더군다나 보호석을 빼앗아 능력을 쓸 틈을 벌리면, 저쪽에 합류한 이종족들 역시 능력으로 역공을 펼치니 끝이 나질 않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폐하.”
“그렇잖아도 곰의 영지에도 지원군을 보냈어. 그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공작은 유클리드와 함께 저들을 피난시키는 것에 집중해라.”
“저는 폐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드물게 르네가 고집을 부렸다.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안 뒤로 그의 신경이 예민해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이엘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다는 걸 느끼곤 고개를 끄덕여 그렇게 하라고 전했다.
“근위대 전군 정렬!”
이엘이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자,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하이에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엘의 곁으로 모였다.
그 탓에 적군의 시선이 다시 이엘 쪽으로 쏠렸고, 그녀는 저 멀리 있는 유클리드와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에게 각각 눈빛을 보내 신호를 줬다. 그들은 적군의 시야에서 벗어난 틈을 타, 피난민들을 데리고 재빨리 황궁을 향해 달렸다.
“더 이상 봐주지 마라! 더 이상의 희생은 용납하지 않아.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 하지만 죽어선 안 된다. 다쳐서도 안 돼. 이 지긋지긋한 줄다리기를 오늘 여기서 끝내고 돌아간다!”
그동안은 올리세스의 동태와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봐줬지만,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게 확실한 현재로서는 더 이상 밀리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이엘의 목소리에 그녀를 둥글게 감싸고 정렬을 마친 근위대들이 울음소리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일라이저가 이끄는 2기사단들 역시 각기 하이에나와 늑대의 등에 올라탄 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우논인 독수리들은 테르들의 등에 올라타 창공에서 적군들을 향해 활을 들어 시위를 겨누었다.
그사이 우왕좌왕하던 적군이 다시 무자비하게 달려들며 공격을 퍼부으려 했으나 이엘이 조금 더 빨랐다. 그녀가 하트의 등에 묶어 두었던 장총을 재빨리 꺼내 그들을 향해 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신호로 동맹군의 공격도 시작됐다.
더 이상 힘을 제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의 명령에, 근위대와 기사단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격했다. 동맹군의 맹렬한 기세에 적군은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들판이 피바다가 되어 가는 게 보였지만 멈출 순 없었다.
“노아! 가서 폐하를 보호해!”
“알겠어!”
계속해서 이엘의 곁을 떠나지 못하던 르네가 노아를 불러와 그녀의 곁에 붙여 두었다. 지금 그 누구보다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사람은 나타니엘이었다.
‘나는 ‘그’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반드시 안전할 수밖에 없어. 내 목숨 줄이 ‘그’에게 달려 있으니까. 어느 곳에서든 내가 ‘그’를 부르기만 하면 나는 ‘그’의 공간에 빨려 들어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어. 하지만 부르지 않을 거야. 제도를 더럽혀서는 안 돼. 그를 이곳에 불러들여서는 안 돼. 그러니까 내 몸은 내가 지키겠다. 경들도 기억해.’
1제국이 ‘그’를 불러들이는 장소가 되었던 건 더러움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드의 성력으로 정화되었지만 이렇게 전쟁이 이어지고 피로 물들게 되면, 다시 1제국 때처럼 더러워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기다 이엘이 위험에 처해 ‘그’를 부르게 된다면 더더욱 더러워지겠지.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면 안 된다.
르네는 노아가 이엘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걸 봤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어린 황손까지 지켜 내려면 저쪽에 더 많은 호위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르네는 활을 들어 화살을 쏘면서도 이엘이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였나. 순간적으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나. 돌연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어 몸을 틀었지만, 르네는 저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몸을 피한 덕에 얼굴이 정통으로 뚫리지는 않았지만 날아온 화살은 르네의 눈을 명중했다.
“공작님!”
하늘에서 소리를 내지른 이는 엔리케였다. 누구보다 빨리 제 주인의 부상을 알아챈 그는 테르의 등에서 뛰어내려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그 탓에 팔이 부러졌음에도 엔리케의 시선은 르네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내달려 르네의 앞에 도달했다.
“르네 님!”
“괘, 괜, 괜찮……크윽!”
“가만히 계십시오. 지금 당장 성전으로 가서 치료를……!”
“아니. 엔리케. 내 안쪽 주머니를 뒤져라.”
“예?!”
화살이 눈알을 꿰뚫었다. 이 상태로 화살을 뺐다가는 눈알까지 빠질 게 분명해서, 엔리케는 어떻게든 그를 황성 안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르네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알아. 소생 불가……윽! 소, 소생불가다…….”
“각하!”
“어서 안쪽 주머니를……! 어서!”
엔리케는 일단 시키는 대로 그의 주머니에서 유리통을 뺐다. 언젠가 르네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의의 사고로 내가 죽게 되면. 경이 내 눈알을 꺼내서 폐하께 드리도록 하게.’
젠장. 이런 일이 정말로 벌어질 줄 몰랐다. 엔리케는 사색이 되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르네는 주저하는 엔리케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화살을 빼내 눈알까지 다 빼 버렸다.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피의 양을 보며 엔리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걱정 마라, 엔리케 경. 이 눈 하나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
“각하.”
“내 불찰이야. 한눈을 판 내 불찰. 그 덕에 정말 한 눈이 되었군.”
“…….”
“이걸 갖고 그대는 곧장 황궁으로 가, 패티스 백작에게 건네라. 그 남자라면 이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을 테니.”
패티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상황을 준비했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독수리의 눈알,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그래서 예전에 르네에게 독수리의 눈알이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해 물어봤었지. 어느 정도면 자신이 구할 수 있겠냐고 대담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그러니 자신의 이 눈알을 그에게 가져가면 패티스는 뜻을 헤아리고 준비할 것이다.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충 옷을 찢어 피가 쏟아지는 눈을 막았다. 어차피 자신은 우논이라 이런 피는 금방 멎을 것이다.
“각하, 제발……. 지금이라도 치료를 받으시면……!”
“무슨 수로? 화살이 뚫은 순간부터 신경이 다 끊어졌고 내 능력이 멈췄다.”
“…….”
“그리고 이렇게 내 몸을 벗어나 실온으로 나온 이상 눈알의 크기는 변해 버리지 않나. 이미 소용이 없는 신체가 되었다.”
독수리의 눈알은 온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미 저렇게 신경이 끊어져 죽은 순간부터 사체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이 통 안에 넣어 두면 유지는 되겠지만 도로 르네의 눈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르네……?”
그 순간 가느다란 목소리가 절망에 잠긴 채 르네를 불렀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무슨 상황인가, 엔리케 경?”
“폐하…….”
“그대 손에 들린 그것은 대체 누구의…….”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한 이엘이 아래턱까지 덜덜 떨며 엔리케의 손에 들린 유리통과 피로 젖어 붉게 변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선 르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르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