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피시. 폐하께선 쉬셔야 한다. 자리를 비켜 드려라.”
“괜찮아, 하트 경. 그리 피곤하지도 않으니까. 피시, 걱정했구나. 무사히 돌아왔으니 걱정 말렴.”
“그 공간에…… 폐하께서도 들어가 보셨어요?”
“응. 네가 말한 대로 신비한 곳이었어.”
“그쵸? 그 공간은 정말 있는 곳이었죠?”
“응, 있어.”
피시는 그곳에 대해 이엘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하트가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게 느껴져서 옆으로 자리를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이엘은 많이 지쳐 보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노아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별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별관은 고요했다. 원래도 이엘이 집무를 보다가 편히 쉬기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런 밤이면 작은 소음 하나 없이 적막만 가득하다. 별관 근처의 작은 정원에서 이엘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의 옆과 뒤를 따르던 노아와 하트도 멈춰 섰다.
“엘. 왜 그러십니까?”
“꽃이 다 죽었어. 관리를 못 했나 보구나.”
황실에 정원지기가 있지만 별관 안에 있는 정원은 이엘이 직접 관리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원정을 나가기 전에 황실 정원지기에게 이곳을 맡겼었는데, 아까 낮에 만난 시종장의 말에 따르면 그 정원지기가 올리세스의 수하 중 하나였기에 쫓아냈다고 한다.
“꽃은 다시 피우면 됩니다, 폐하.”
“그래.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서 봄이 오면. 그땐 꽃이 필 거야.”
“이번 겨울을 지나면 저 나무에 그네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테오도로가 태어나면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이요.”
노아가 가리키는 커다란 나무를 응시했다. 돌아올 봄에는 저곳에 그네를 달겠다는 노아의 말에 이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면 테오도로가 이 별관을 떠나지 않겠다고 떼를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 이곳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시면 곧장 저를 부르시거나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내가 폐하의 곁에 있을 테니 경은 돌아가서 눈 좀 붙여라. 내일부터 또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도 필요해.”
침실 문 바로 앞에 멈춰 섰던 하트는 노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먼저 침실 안으로 들어온 이엘은 안락하고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으며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노아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우선 눈을 감고 주무십시오. 여독을 푸셔야 합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매일매일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기분 탓이 아닙니다. 둔을 가지셨으니까요.”
심각한 노아의 표정에 이엘이 야트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엘의 건강을 걱정하느라 한껏 예민해졌는데, 정작 이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손을 뻗어 노아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물론 우논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보통의 임신과 다르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노아.”
“…….”
“나는 강한 모체가 될 거고 그러기 위해 체력 훈련과 둔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둔에 대해 공부하셨습니까?”
“그럼. 내 아이가 둔이니까 당연히 공부했지.”
역시 이런 면에선 자신은 이엘을 따라갈 수가 없다. 노아는 한심한 제 모습이 미치도록 부끄러워, 침대 시트에 고개를 파묻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엘은 그런 노아의 뒷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 나도 계속 공부하고 있는걸.”
“영지에서 둔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도움을 줄 겁니다. 저도 더 공부하겠습니다, 엘.”
“응.”
어느새 이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쩍 잠이 많아진 탓에 앓던 불면증까지 모두 날아갈 정도였다. 노아는 이불을 끌어 덮어 주고, 쌓여 있는 모포까지 가져와 추위를 완전히 차단시켰다. 화로에 불까지 붙이고 나니 침실이 어느 정도 따뜻해진 듯하다.
노아는 뜬눈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엘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올리세스는 물론이고 ‘그’와의 계약까지 전부.
하지만 그렇다고 조급하게 처리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가장 적절하게 공격해서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야겠다.
그때 닫힌 창문이 아주 조금 덜컹거렸다. 그 작은 소리에도 예민한 늑대는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창문을 향해 겨누었다.
“깜짝이야. 여태 안 자고 있었어?”
밖에서 들어오기 위해 창문 고리를 잡고 있던 밀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새벽을 틈타, 아주 잠깐만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온 건데 예기치 못하게 그녀의 곁을 지키던 노아와 마주했다.
노아는 피곤한 표정으로 검을 도로 집어넣고 창문을 열어 주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몰래 숨어들려던 밀로는 머쓱한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침실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언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아까 낮엔 용이었잖아.”
“너희가 통과하는 거 보자마자 곧장 돌아왔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돌아오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짧게 걸렸어. 원래 며칠은 걸리는데.”
보통의 우논이 이종족과 인간의 모습을 곧장 바꿀 수 있는 것과 달리, 용은 인간의 모습과 본체의 모습을 오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길게는 며칠씩 걸리고 짧아도 꼬박 하루는 걸리는데, 이상하게 이번엔 반나절 만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아마 내 힘이 강해져서 그런 것 같아.”
“그게 느껴져?”
“응. 열매가 우리 손을 떠난 뒤부터.”
밀로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중얼거렸다. 킨 역시 힘이 조금씩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 열매를 스완에게 건네고, 스완이 암컷 용에게 가져가면서 놀라울 만큼 몸이 가벼워졌다. 마치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있다가 그게 사라져 버린 것처럼.
“열매를 갖고 내려오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노아는 밀로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이엘은 밀로가 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밀로는 곤히 잠든 이엘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노아를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려웠지. 대전투였는걸.”
“반발하는 세력은.”
“다 재웠어. 비늘까지 모조리 떼어 왔고.”
“네가 용의 수장이잖아. 동족을 그렇게 대해도 괜찮나?”
“말했잖아. 우리는 너희랑 다르다고. 굳이 너희 식대로 따지자면 너와 비슷한 수장이라는 거지, 난 너희처럼 종족을 책임지고 이끄는 역할이 아니야. 우린 그냥 각자 살아갈 뿐이야.”
“…….”
“그래도 어려웠어. 도중에 몇 마리가 또 광증으로 미쳤거든. 열매만 보면 그렇게 눈이 뒤집혀.”
눈앞에 있는 욕심을 참지 못해서 종족이 미쳐 버렸다. 밀로는 그걸 이곳에 내려와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 네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용의 수장이야. 책임지고 이끄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용들을 대표하고 있으니까.”
“…….”
“이제는 올바르게 이끌겠어.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아.”
“가능하겠나?”
“응. 그 열매만 없다면 가능할 거야. 그보다 스완이 만나러 간 그 암컷 용에 관해 아는 것 좀 말해 봐. 난 킨과 달라서 그녀에게 원한도 없는걸.”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그 암컷이 아주 오래전에 가깝게 지내던 인간이 있었고, 현재는 그의 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스완이 그 아이들을 깨워서 데리고 나오는 것을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정도.”
노아의 말을 들은 밀로는 미간까지 찌푸린 채 끙 앓았다. 솔직한 말로 그 암컷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은 있다. 그녀가 용의 암컷이기에 갖는 본능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라, 용의 암컷이 갖고 있는 잠재성 때문에.
암컷이 한 마리라도 합류하면 승기는 이쪽으로 완전히 기울 테니까. 가능하다면 아예 이쪽 세상으로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허튼 생각 하지 마. 드레인은 우리처럼 전면에서 싸울 일 없으니까.”
“왜? 암컷이 갖고 있는 능력을 활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이기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드레인이 집중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열매랑 관련이 있는 거야?”
밀로의 물음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인에게 그 열매가 있다는 걸 ‘그’가 알면 모든 게 끝난다. 그녀의 정체는 들켜도 되지만, 열매의 존재는 절대로 드러나선 안 됐다. 노아가 밀로를 향해 눈짓하자, 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킨을 입단속시키라는 의미지?”
“그래. 물론 ‘그’가 이쪽 일에 관해 알 리 없겠지만 또 모르는 거니까. 킨이 우리 계획을 망치지 않게 네가 제어 잘 해라.”
“알겠어. 걱정 마.”
그렇게 답한 밀로가 성큼성큼 다가가 이엘의 침대 아래에 깔린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이불 밖으로 나온 이엘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아기를 가졌다고?”
“어.”
“그걸 둔이라고 하지? 신기하네.”
“너흰 우논밖에 없다고 했었나?”
“응. 테르도 없고 둔도 없지. 사실 새끼가 태어난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우린 너희가 치른 전쟁들보다 훨씬 더 먼저 암컷과 찢어졌으니까.”
그래서 신기하게도 번식의 욕망이나 성욕 같은 게 전혀 들지 않는다. 암컷을 향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게 다른 이종족이나 인간들처럼 욕구로 번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저 신기할 뿐이다. 새로운 생명체가 이엘의 배 속에 생겼다는 게.
“귀엽겠다. 앙증맞게 작겠지? 태어난 직후엔 인간의 모습이야? 아니면 늑대의 모습?”
“개체마다 달라. 보통은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모습이지만, 의지를 갖게 될 만큼 성장하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오. 역시 늑대의 수장은 달라. 모르는 게 없네.”
“이 정도로는 안 돼. 테오도로가 태어나기 전까지 내가 둔에 대해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런 건 킨에게 물어봐. 그렇게 보여도 걘 신께서 직접 손으로 만든 용들 중 하나니까. 살아온 시간을 셀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