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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8화 (448/488)
  • 448화

    그래서 그는 드레인을 만나러 가기 전, 패티스와 마지막 인사 할 때 자신의 성력을 응축해서 넣은 깃을 그에게 맡겼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지를 보고.

    ― 그걸 가지고 가세요. 그 깃을 사용하면 은신처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같은 뿌리를 가진 고니의 깃이니까요.

    “알겠어. 고마워, 스완.”

    연락을 끊은 이엘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패티스를 찾고 그에게서 깃을 받아 냈다. 패티스와 무리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녀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엘은 깃을 들고 성전의 뒤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숲속 한가운데서 멈춰 선 그녀는 들고 있던 스완의 깃을 내려놓았고, 순간적으로 불어온 바람에 깃이 좀 더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깃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이엘과 무리는 이종족이 한 마리 정도 오갈 수 있는 크기의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다. 이엘은 부유하다 떨어지는 스완의 깃을 받아 들고 거침없이 그 구멍 안으로 뛰어내렸다.

    *

    “그 마녀를 처형해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선황과 그 딸인 마녀 때문이라고!”

    “그 여자를 끌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재앙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종족이 전부 황제의 편인데……. 그들이 힘을 합치면 2차 전쟁 때처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라고요.”

    “차라리 이종족들을 전부 멸살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이 사라지면 애초에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을 게 아닙니까!”

    “우리의 원수예요.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해!”

    아스타로의 현란한 말솜씨에 인간들은 쉽게 현혹됐다. 그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신보다 눈에 보이는 가짜 신인 올리세스가 더 간절했다. 극도의 공포는 인간들의 총기를 앗아 갔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스타로 님. 저희를 구해 주세요, 제발……. 이 전쟁이 멈출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여러분. 올리세스 님께선 여러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이 전쟁을 멈춰 주실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2차 전쟁처럼 서로 뿔뿔이 흩어져선 안 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예, 예. 제도엔 아직도 황제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가 가서 그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아스타로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시의적절하게 터진 전쟁이 아스타로에게 승기를 안겨 주었다. 완성 단계에 접어든 포필렌의 개량도 한몫했다. 이제 테르 정도는 가볍게 통제할 수 있었고 둔 역시 완벽에 가깝게 통제했다.

    문제가 되는 건 1계급인 우논이었는데, 실험체로 쓸 만한 우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개량에도 한계가 있었다. 테르나 둔의 경우, 무리 생활을 하는 종족이라고 해도 몇 마리 납치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우논은 다르다. 아무리 어린 개체라 해도 납치하기 위해선 이쪽에서도 상당수의 전력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영지와 무리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이종족들을 타깃으로 지정했으나 그마저도 우논은 어려웠다.

    아스타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논까지 모두 통제해야 황제의 발을 제도에 완전히 묶어 둘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아스타로의 앞에 그의 수하가 나타났다.

    “아스타로 님. 제가 최근에 암시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뻐꾸기와 같은 인간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뻐꾸기는 멸종한 종족인데 그와 같은 인간이 있다는 소린 또 무슨 소리지?”

    뻐꾸기는 아주 오래전에 멸종했기 때문에 둔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니 수하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뻐꾸기처럼 노래로 사람을 홀린다고 합니다.”

    “노래?”

    “예, 아스타로 님. 아스타로 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아주 적합한 자입니다.”

    아스타로는 노래를 만들어 포교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일에 적임자를 찾은 것이다. 그는 화색을 띠며 그자를 당장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떠난 아스타로의 수하는 정확히 사흘 만에 소문의 그 인간을 찾아내 아스타로의 앞에 데리고 왔다.

    “네 종족을 밝히거라. 뻐꾸기가 네 종족이 맞더냐?”

    “아닙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외양이 이종족에 가까울 만큼 굉장히 뛰어난 미색을 갖추었다. 게다가 저 매력적인 녹색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었다. 저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색이 검은색이었더라면, 그를 뻐꾸기가 아니라 뱀이 아닐까 오인할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남자는 아스타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순진한 눈망울로 저가 끌려온 곳을 두리번거리며 한참 살펴보더니 두 손을 모은 채 살려 달라고 간절히 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사람들을 홀린 적이 없어요. 정말로…… 그냥 다들 제 노래를 좋아했을 뿐이에요. 제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내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볼 수 있겠느냐.”

    “하지만…….”

    “괜찮단다. 나는 자애로운 신의 대리인이란다. 널 처벌하거나 혼내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마음껏 노래를 부르렴.”

    그러나 그 말에도 남자의 의심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아스타로는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고 달랬다.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게 안락한 공간까지 허락해 주었고 며칠에 걸쳐 마음을 편히 먹게 해 주었더니, 결국 남자도 아스타로에게 마음을 열고 말았다.

    커다란 공간에 남자가 섰다. 그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그들이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과연 뻐꾸기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돌 만도 했다. 뻐꾸기의 능력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인간과 이종족을 모두 홀리는 것이었으니까. 그 능력 때문에 인간에게 멸종당하기도 했다.

    “정말 네가 뻐꾸기가 아니라는 것이니?”

    “네, 정말이에요……. 저를 이종족으로 의심하신다면 보호석으로 확인해 보세요. 보호석이 발동되면 전 이런 노래도 못 부를 테니까.”

    이미 그가 노래를 부르기 직전에 보호석을 발동시켰었다. 그런데도 남자가 부르는 노래엔 힘이 있었다. 노래를 듣는 순간 두통이 사라졌고 무기력했던 마음이 활기로 가득 찼다. 이건 이종족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포레스트라고 합니다.”

    “그래, 정말 숲을 닮은 아름다운 눈동자구나.”

    “감사합니다.”

    “나와 함께 일하지 않으련? 나는 신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간단다. 그리고 그분께서 직접 보내신 작은 신을 섬기고 있어.”

    “그럼 당신은 나자르 님이신가요?”

    “나자르 님의 가르침을 받았지. 안타깝게도 나자르 님은 지금 황제에게 붙잡혀 계시단다. 하지만 곧 그분을 모시고 나올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에겐 가장 강력한 아군이 생기는 것일 테고.”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아스타로는 포레스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네가 할 일이 아주 많단다. 그의 웃음에 포레스트도 마주 웃었다.

    “무엇이든 할게요. 이 무서운 전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요.”

    “그래, 나와 함께 가자.”

    아스타로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포레스트는 우거진 숲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 어딘가에 슈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엘의 계획대로 안에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내부의 분열을 가져와야 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건 뱀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린 뱀이라 할지라도 타고난 재주는 숨기지 못하니까.

    *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제 막 땅 아래서 나온 이엘을 맞아 준 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패티스와 무리들이었다. 아직 얼떨떨한 상황에 정신이 혼미한 그녀의 앞에 물을 건네는 이는 노아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어떻게 된 일이지?”

    “폐하께서 스완의 깃을 들고 은신처에 들어가신 이후로 반나절이 넘었습니다. 돌아오시지 않기에 수색을 하던 중에 이곳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습니다.”

    노아의 뒤에 있던 패티스가 상황을 설명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이엘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불안한 듯 그녀를 지켜보던 패티스가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그곳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인간들은 무사합니까?”

    “다들 무사해. 아직까진 큰 문제도 없고. 패티스 백이 챙겨서 보낸 식량도 아직은 넉넉한 듯해.”

    “깃은…….”

    “스완이 주고 간 깃이야. 이게 있으면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곳에 결계식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해. 이 깃이 필요해.”

    이엘은 깊은 공간으로 떨어지면서 어떤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들었다기보다는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아주 구슬프고 괴로워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완의 말대로라면 과거 백조와 흑조의 친구였다던 그 나자르 소녀의 목소리겠지.

    “그 공간은 나자르가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만든 곳이래요. 그래서 존재는 하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어요.”

    레온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니가 인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나자르 소녀는 깊은 땅굴을 만들어 고니의 호수까지 연결했다.

    아마도 레온이 말하는 연인이란 스완의 선조인 백조가 아니라 또 다른 고니인 흑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나자르 소녀의 죽음에 분개하여 성력으로 인간들을 죽였다던.

    둘은 단순한 우정을 뛰어넘은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내부 공간은 충분히 넓어. 그냥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더 대피시킬 수 있으니 제도 뒤편 요새에 숨어 있는 인간들도 이곳으로 이주를 시키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낸다.”

    “예, 폐하.”

    “우선 황궁으로 돌아가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 찬 곳에 너무 오래 있으시면 안 됩니다.”

    패티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곤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바로 옆으로 다가온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채 하트와 이엘의 경호를 자처했다.

    이엘은 웃으며 손을 뻗어 검은 늑대의 털을 어루만졌다. 그러곤 대열 정리를 마친 동맹군들에게 신호를 주며 황궁을 향해 일제히 출발했다.

    “폐하! 괜찮으세요?!”

    황궁에 다다랐을 때 정원 밖에서부터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 나온 피시가 안부를 물었다. 이엘이 은신처를 찾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피시도 그 장소를 찾기 위해 향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네가 강해졌기 때문일지도 몰라.’

    ‘강해졌다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내 추측으론 그래. 그 은신처는 나자르가 만들었고 제약을 걸어 두었으니까.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약한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니, 상대적으로 강한 개체는 진입이 불가해. 지금은 네가 그 안에 있는 인간들보다 상대적으로 강하니까 설령 입구를 찾는다고 해도 들어갈 수 없을 거다.’

    ‘그렇구나.’

    ‘그리고 전보다 네가 강해졌으니까. 더더욱 어렵겠지.’

    패티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필요한 때에 도움이 안 되다니. 피시는 강해졌다는 패티스의 칭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결국 이렇게 황궁에 남아, 오매불망 그녀의 안전한 귀환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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