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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7화 (447/488)
  • 447화

    굳게 닫혀 있던 성벽 문이 열리고 오랜만에 보는 패티스와 레온이 그 앞까지 나와 그녀와 무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이야, 백작. 내 명령을 잘 지켜 주었군.”

    이엘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패티스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패티스는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죽을 경우, 황좌와 제도를 지킬 사령관으로 라니에로 페루츠 후작을 지명해 달라며 이엘에게 연락을 취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패티스의 요청대로 칙서를 써 주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남겼던 말이 있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백작에게 써 주었던 그 칙서가 실현되지 않기를 명령했는데, 잘 지켜 줘서 고마워.”

    “폐하께 일임받은 자리인 만큼, 다시 폐하께 직접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패티스의 말에 이엘은 미소 지었다. 그러곤 익숙하게 하트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려는데, 눈앞에 하얀 손이 불쑥 다가와 있었다. 레온의 것이었다.

    “잡고 내리십시오, 폐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응. 고맙네, 레온 후.”

    레온은 이엘의 손과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지탱하며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냘픈 몸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게, 레온으로서는 놀랍기만 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어머니 린다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어머니도 날 가졌을 때 늘 이렇게 조심하셨을까? 아니면 원치 않은 자식이라 배 속에서 죽기를 바랐을까?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런 의미 없는 궁금증이 늘어났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각인하기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기도 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생겼네.”

    그때 패티스와 레온 사이로 푸른색 머리카락이 일렁이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나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의 킨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패티스와 레온을 밀쳐 내고 이엘의 앞으로 나왔다.

    “그동안 이 말 안 통하는 하등한 종족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폐하는 왜 이제 와?”

    “폐하께 말을 가려라.”

    열심히 뒤따라 달려온 앤디가 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이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패티스가 킨을 잡아당겨 제 뒤로 보내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용들이 가져온 그 열매. 스완이 그걸 가지고 떠났습니다.”

    “스완에게서 연락이 끊겼어. 그가 확실히 제대로 떠난 건 맞나?”

    “죄송합니다, 폐하. 현재로선 저희도 확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패티스의 대답에 이엘도 동의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스완의 마지막 모습은 패티스와 모두가 지켜봤겠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정신적으로 연결돼 있는 이엘 자신뿐이었다.

    “우선은 스완이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네. 그리고 전장에 전력을 더 보충해서 늑대와 독수리, 그리고 기사단이 귀환할 수 있도록 해라.”

    “예, 폐하!”

    우렁차게 대답한 앤디가 1기사단인 늑대들을 이끌고 노아와 무리가 있는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줄곧 제도에 있었던 성전기사단과 3기사단은 반대편 요새 쪽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땅 아래로 대피하지 못한 인간들과 피난길에 오른 다른 영지민들을 그곳에 모아 결계를 치고 단단히 방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도 입구가 적에게 노출돼 있었던 듯했다.

    제도와 황궁의 상황을 짧게 전한 패티스는 시선을 돌려 이엘의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곁은 늑대들과 하이에나들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이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패티스 경. 누굴 찾고 있나?”

    “노아 님과 르네 님이 전장에 계신 건 알고 있으나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신지…….”

    “전력이 될 만한 자들은 전부 전장에 남아 있다. 그냥 통과하려고 했는데 아예 소탕하고 오는 게 제도로 피난 오는 자들에게 좋을 듯해서. 유클리드는 스라소니들을 모으기 위해 떠났고 포레스트는 할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카르 백작도 떠났습니까?”

    “응. 아르세니온을 데리고.”

    “…….”

    “아르세니온의 소식이 궁금했던 거지?”

    전력이 될 만한 자들이 전부 전장에 남았다면 아르세니온과 리노는 이엘과 함께 먼저 황궁으로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이엘의 뒤로 두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패티스는 에둘러 그들의 소식을 물어봤던 거였다. 이엘이 웃으며 묻자 패티스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자가 깨어나 합류했다는 소식을 노아 님에게 들었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들어올 수가 없었어.”

    “예?”

    “황자의 목숨이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니야. ‘그’가 쥐고 있어.”

    이엘의 말을 패티스는 온전히 이해했다. 제도는 성전이 있고, 성전기사단도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절박해진 인간들이 그 어느 때보다 신을 간절히 찾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오드까지 합류하게 되면 그 어느 곳보다 성력이 강해질 것이다.

    그건 신의 편에 선 이엘과 동맹군에겐 좋은 소식이었지만, 목숨의 주체가 ‘목소리’에게 달린 이온에겐 독이 되는 소식이었다.

    “이카르의 영지에서 쉬고 있다가 합류할 테니 걱정 마라. 어차피 이온은 안전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정리한 이엘은 무리를 이끌고 성문을 넘어 안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온 황성은 변한 게 없었다. 언제 귀환할지 모르는 주인을 반기기 위해 늘 청결하고 정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 먼저 쉬시고……,”

    “아니. 은신처로 안내해라.”

    “은신처라면 제도민들이 숨은 땅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오면서 노아에게서 대충 설명 들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예. 위치는 대충 알 수 있지만, 저희는 입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입구를 찾아도 들어가진 못합니다. 결계가 쳐져 있는 것처럼 저희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피시가 돌아오는 대로 그곳을 찾게……,”

    “기다릴 시간이 없어. 안내해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제도민들을 안도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앤디와 기사단이 합류했으니 피시와 노아도 곧 황성으로 돌아오겠지만 그걸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엘은 걸음을 재촉해 패티스를 따라 성전 근처로 향했다.

    커다란 성전은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위용이 대단했다. 이곳만은 어떻게든 사수하겠다는 패티스와 기사단의 일념이 보였다. 이엘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음에 신께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올린 뒤 성전을 지나치려는데 순간 느껴지는 무언가에 걸음을 멈췄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만.”

    높은 성전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엘은 손으로 벽을 만졌다. 오드가 떠난 뒤로도 성전기사단과 사람들이 관리를 잘한 덕인지 성전 곳곳엔 미세한 성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벽을 타고 느껴지는 잔잔한 진동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스완. 제발…….

    스완의 종적이 끊긴 지점이 이곳이었다. 성전. 용의 암컷과 가장 가까운 곳이며 드레인의 능력에 스며들기에 가장 쉬운 장소. 이곳에서 스완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이엘이 스완의 이름만 정신없이 불렀을 무렵이었다.

    ― 맙소사. 폐하? 폐하예요?!

    “스완!”

    이엘이 소리쳐 스완의 이름을 부르자, 그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와 패티스가 눈을 크게 뜨고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롯이 홀로 남은 이엘에게 스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스완.”

    ― 지금 어디세요? 제도예요?

    “응. 넌 어디야? 잘 도착한 거야? 드레인을 만났어?”

    ― 네, 폐하. 만났어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돌렸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스완. 누구에게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답답했던 시간이 끝났다. 계약이 종료되는 날을 하루 앞두고 스완과 겨우 연락이 닿은 것이다.

    ―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됐어, 무사하면 된 거야.”

    ― 저도 계속 폐하께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스완은 드레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있었던 우여곡절을 모두 털어놓았다. 꿈을 통해 의식으로만 드레인을 만났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로웠다. 하마터면 몸과 의식이 각각 다른 차원에 묶일 뻔했다며, 스완은 울먹이듯 하소연했다.

    ― 아무튼 지금은 괜찮아요, 폐하. 드레인을 잘 만났어요.

    “응. 나도 무사해. 제도 안에 잘 들어왔고.”

    ― 아기님은요? 괜찮죠?

    “응. 아기도 잘 있어.”

    이엘은 손으로 제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인간과 이종족의 성장은 다르기 때문에 임신 주기도 다를 터였다. 그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하루 만에 배가 더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드레인이 축하드린대요.

    “고맙다고 전해 줘. 그보다 그곳은 어때? 테런스 포르의 딸들은?”

    ― 제가 조금씩 상태를 지켜보고 있어요. 실은 제게 아버지의 성력이 다 들어왔거든요.

    “정말?”

    ― 네. 그래서 괜찮을 것 같아요.

    “알겠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참! 드레인에게 한 가지 물어봐 주겠니?”

    ― 뭔데요?

    이엘은 대충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를 설명하며 이 아래에 있을 땅굴에 관해서 물었다. 스완 역시 드레인에게 가기 전에 패티스로부터 전해 들은 건지 땅굴에 관해 알고 있었다.

    ―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나자르가 만든 땅굴이라고요?

    “그렇대. 레온 후작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어.”

    ― 어…… 설마…….

    아주 잠깐 스완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이엘이 성전을 둘러보며 그를 기다리다가,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듯해 은신처인 땅굴을 찾기 위해 성전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 폐하. 제가 떠나기 전에 패티스 님께 제 깃을 맡겨 두었어요.

    뜬금없이 깃 이야기를 하는 스완에게 의문을 가졌다.

    ― 아무래도 그 은신처.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고니의 저주와 관련된 것 같아요. 그때 나자르 소녀와 계약을 맺었던 흑조와 백조 이야기 기억하시죠? 아마 그 나자르 소녀가 그 땅굴을 만든 것 같아요.

    “뭐?”

    ― 흑조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그게 저희 호수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스완은 아직 확실한 미래를 보지는 못했다. 여전히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게 예지인지 꿈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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