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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5화 (445/488)
  • 445화

    제도에서 만난 레온은 아직 이엘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노아와 패티스의 대화를 끊고 끼어든 그의 얼굴엔 기쁨과 슬픔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랬구나. 아이를 가지셨구나. 축하드려야겠네.’

    ‘레온.’

    ‘아이는 축복이니까.’

    레온은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노아의 등을 툭툭 쳤다. 폐하께 축하드린다고 전해 줘. 그의 말에 노아는 더 대답할 수 없었다. 레온에게 새끼란, 설사 그녀의 마음을 얻어 연인이 된다고 해도 절대로 그녀에게 줄 수 없는 선물이었으니까.

    “마음은 전혀 여유롭지 않은데 여유로운 척하느라 내 속도 말이 아니거든.”

    피식 웃은 노아는 마시던 병을 도로 르네에게 건넸다.

    “조금만 마시고 들어가서 일찍 쉬어라. 난 누구 말처럼 폐하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막사에서 경비를 설 생각이니까. 넌 가서 쉬어.”

    “노아. 네 말처럼 그 아이는 희망이 될 거다.”

    “당연하지.”

    “너와 폐하만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희망.”

    “…….”

    “새 생명이 우는 소리가 멈춘 것도 벌써 수십 년이잖아. 그걸 깨뜨리는 희망이 될 테니.”

    그렇네. 이곳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도 벌써 수십 년 전 일이구나. 우리의 아둔한 잘못으로 인해.

    “생명은 신의 몫이야. 그 아이를 반드시 지켜 내서 신께 용서를 받자.”

    르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서를 받자.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신탁. 그게 이 희망의 증거가 될 것이다.

    *

    “이건 화해를 바란다는 뜻입니까, 공작?”

    올리세스의 비웃는 말투에 로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이 올리세스의 영지를 습격한 지도 몇 주가 흘렀다.

    올리세스는 뱀에게 제 손을 잡을 것을 제안했지만, 로빈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돌연 영지를 습격해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심지어 그 영지 안에 은밀하게 모아 두었던 보호석과 포필렌을 전부 없애 버렸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화친을 청하자며 찾아오다니. 올리세스로서는 저 간사한 뱀의 계략을 알지 못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법이지.”

    “그런 식이면 오늘의 친구는 또다시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겠군요.”

    “상황에 따라?”

    로빈이 웃으며 대꾸하자 올리세스의 미간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대체 저 뱀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예병들이 제도로 떠난 틈을 타 윌터 백작령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황제의 동맹군이 아닌 뱀들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올리세스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백작령은 요새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군사 주둔지였고 포필렌과 보호석의 저장 창고 역할을 하고 있던 곳이었다. 게다가 황제군도 아닌 뱀에게 빼앗겼다는 건 신경 쓸 요소가 쓸데없이 더 늘어났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뱀과 전쟁을 하려 했으나 그를 말린 사람이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님.”

    올리세스의 옆에 서 있던 아스타로가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와 로빈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로빈은 올리세스에게서 시선을 옮겨 아스타로를 빤히 쳐다봤다.

    “누구?”

    “아아. 올리세스 님을 모시고 있는 아스타로라고 합니다.”

    분명 완전한 인간인데 어딘지 모르게 동족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사기꾼이군. 로빈은 단번에 아스타로의 존재를 파악했다. 구린 냄새를 폴폴 흘리며 선한 사람인 척 웃는 가식적인 모습이 낯설지 않다.

    차라리 뱀으로 태어났다면 더 쓸모가 있었을 텐데, 쯧. 비웃음을 머금은 로빈은 아스타로가 안내하는 곳에 몸을 앉히고 본론을 꺼냈다.

    “올리세스. 그대의 영지를 돌려주겠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화친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허탈하군요.”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게 더 허탈할 상황 아닌가?”

    “…….”

    “내가 요구하는 건 단 하나다. 황제.”

    “…….”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말고, 온전한 상태로 내게 데려와.”

    로빈의 요구에 올리세스는 짧게 침음하며 고민했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건 조금 어려운 요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었다.

    “로빈 님. 대체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바꾸게 만드신 것이죠? 분명 이전에 제가 당신께 똑같은 제안을 드렸을 때,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나요?”

    “그때보다 지금의 네게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느꼈을 뿐.”

    “대체 무엇을 보고?”

    “네 동생 리노 윌터. 그가 알고 있던 것을 나도 알고 있거든.”

    리노의 이름이 거론되자 올리세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리노가 죽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폭발 사건으로 인해 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하필 그 마을에 리노가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동생이 죽어 슬펐냐고? 전혀 아니다. 그저 전력의 상실이 아쉬웠을 뿐.

    그리고 그 마을에 가두어 뒀던 피시. 헤르몬 산에서 탈취해 온 그 하이에나 역시 불타 죽고 말았다. 황제에게서 빼앗은 첫 번째 전리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제 손에 완전히 들어오기도 전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피시를 떠올리니 분노와 짜증이 솟구친 유클리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롭게 물었다.

    “리노의 존재를 각하께서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죠?”

    “그대는 내가 1제국 때도 작위를 지냈던 귀족이었음을 잊었나 보군.”

    “…….”

    “그대의 동생이 반역죄를 저질러 사형을 당했다는 걸 모르는 귀족도 있던가.”

    “그러셨군요. 사형당해 죽은 내 동생이, 사실은 계속 살아 있었다는 것까지 외부인에게 알려져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아니면 제 뒷조사를 단단히 하신 듯하고요.”

    “중요한 건 그대의 동생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가 아니다.”

    “…….”

    “그가 알고 있던 것을 나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로빈의 말에 올리세스는 입을 다물었다. 리노가 죽었고 누군가는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리노만큼 아는 자. 비밀을 공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자. 그런 자리가 여전히 공석이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

    “…….”

    “그게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잖아?”

    올리세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로빈의 말을 계속해서 기다렸다.

    “나는 ‘그’를 만났던 적이 있다.”

    “공작님께서요?”

    “너 역시 ‘그’를 만나고 싶어서 보호석을 모으고 있는 게 아닌가?”

    “…….”

    “내가 도와주지. 네가 ‘그’를 만날 수 있게 내가 돕겠다. 대신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나타니엘. 그 여자 하나만 내게 주면 돼.”

    로빈의 말에 올리세스의 눈동자가 아스타로에게 닿았다. 아스타로는 눈을 휘어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각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현명한 선택을 했군.”

    로빈은 올리세스의 손을 맞잡으며, 마지막으로 봤던 이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올리세스가 ‘그’를 불러들이려고 할 거야. 그 과정을 빠짐없이 내게 보고해.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가 이곳에 오겠지만, 그 타이밍을 주도하는 건 올리세스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한다. 로빈 공. 내 말을 온전히 이해했나?’

    ‘예, 폐하. 놈이 폐하의 계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제가 쥐고 뒤흔들겠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 찾아온 희망. 로빈은 그 희망에 모든 걸 걸었다.

    ‘나의 폐하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당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그녀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새 생명. 나타니엘과 그 아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래. 로빈은 기꺼이 그녀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로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앞에서 만족스럽게 낄낄 웃는 올리세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

    제도의 경계를 막 넘어 황궁을 목전에 두었을 때였다. 그때 이엘은 저 멀리서 펼쳐지고 있는 패티스의 정예군과 올리세스의 군사들의 접전을 지켜보며 제도로 들어가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건 용이다. 밀로가 독수리를 엄호해 줄 테니, 그때 르네 공과 독수리들이 먼저 날아가 매를 공격하도록 해. 혼란이 생기면 보호석을 보이는 족족 수거해서 가져와라. 그다음은 재규어가 능력을 사용해 몸을 키워서…… 잠깐.”

    “왜 그러십니까, 폐하?”

    말을 멈춘 이엘이 고개를 막사 입구 쪽으로 돌렸다. 뭔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선뜩했는데……. 아주 순간의 통증을 느꼈던 이엘은 손으로 제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이는 아니다. 아기는 잘 있는데, 그럼 대체 뭐지? 기분 탓이었나.

    “아무것도 아냐. 어디까지 설명했지? 아. 이카르 백작이 이끄는 재규어들이 몸을 키우면 그걸 신호로 늑대들이……,”

    “폐하!”

    다급한 목소리가 막사 밖에서 들려왔다. 벌벌 떨며 막사 안으로 들어온 리노가 그 가느다란 목소리로 울먹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아, 아르세니온 황자님이……!”

    “이온? 이온이 왜?!”

    이엘은 인파를 헤치고 바닥에 엎어진 리노를 잡아 세우고 그를 다그쳤다.

    “모, 모르겠습니다! 아까부터 몸이 아프다고 했는데 가, 갑자기 쓰러져서 비명 소리를 내, 내고 있습니다……!”

    “오드 님은?”

    “그게 저, 접근을 못 하고 계세요…….”

    “접근을 못 하다니, 그게 무슨…… 아냐.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노아 공. 공작이 작전을 맡고 하트 경. 경은 날 따라오도록.”

    “예, 폐하.”

    지휘권을 노아에게 넘겨주고 이엘은 하트와 함께 이온이 머물고 있던 막사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리노가 다급하게 말했던 게 무슨 의미인지 막사 앞에서 알아챘다. 오드는 마치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꼼짝도 못 한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엘이 오드를 불렀다.

    “오드 님.”

    “폐하.”

    “무슨 일인가요?”

    “아르세니온 황자님께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와 봤지만, 보시다시피…….”

    오드가 손을 뻗자 아무것도 없는 공기 중에서 텅텅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투명한 막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드의 손끝엔 차가운 막이 만져졌다. 그 막 같은 게 오드를 막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희는 가능합니다, 폐하.”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조금 전 오드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기사는 이온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까지 했다. 오드만 들어갈 수 없었다.

    “으아아악……!”

    그때 안에서 들리는 이온의 괴성에 이엘은 그 일을 뒤로하고 재빨리 막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작은 막사 안에 놓인 여러 겹의 모포 위에 이온이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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