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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4화 (444/488)

444화

“말하자면 복잡한데 정리하면 세잔티노에서 제도를 통과해 고니의 호수까지 이어진 그 땅굴 통로. 피시만 유일하게 경험해 봤던 그 통로가 1차 전쟁 이전에도 있었던 모양이야. 아니, 1차 전쟁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어.”

“그럴 리가. 난 그 땅굴이 최근에 생겼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예전에 턱수염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난 그 턱수염 일당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아니. 그러기엔 공간이 너무 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공간이야.”

노아의 마지막 말에 르네도 미간을 좁힌 채 긍정했다. 아주 오래전, 이엘이 턱수염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세잔티노에 도착했을 때의 그 공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상하긴 했다. 작은 영지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공간을 인간들이 단시간에 만드는 건 상식적으로 어려우니까.

“레온의 말에 따르면 나자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하더군.”

“나자르가?”

“어떤 나자르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래.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냐. 우리가 소탕했던 턱수염 일당이 머무르던 그 공간. 세잔티노 입구에서 거기까진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지만, 피시는 그 공간을 통과해서 제도를 지나 고니의 호수까지 걸어갔어.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피시가 걸어갔다던 통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 여전히 내 눈으로도 안 보여.”

보호석으로 막히지 않은 곳도 독수리의 눈으로 식별이 불가했다. 지하에 뭔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게 정확히 피시가 말한 통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공간은 약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 같다고 했어.”

“그게 가능해?”

“애초에 나자르가 만든 공간이니까. 제약을 걸어 둔다면 아무나 쉽게 찾을 수가 없지. 그 나자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든 공간이기도 했고.”

어쨌든 이 문제는 이엘이 깨면 자세히 나눠 봐야 할 문제로 치고. 르네는 생각을 대충 정리하고 막사 쪽을 힐끗 보며 낮게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뭘?”

“폐하 말이야. 아직 임신 초기인데도 저런 상태면, 앞으론 더 힘들어지실 거야.”

“알고 있어. 일단은 영지에 있는 둔 몇 마리에게 제도로 오라고 연락을 해 두었어.”

“잘했군.”

“칭찬 들을 만한 일은 아냐. 내가 생각한 게 아니니까. 패티스가 말하지 않았다면 난 까맣게 몰랐을 사실이지.”

노아가 씁쓸한 듯 중얼거렸다.

둔. 이종족의 계급 중 2계급에 속하며, 보통은 이종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개체를 이르는 말이다. 둔은 굉장히 독특한 계급이었는데, 성장기 동안엔 우논처럼 인간과 이종족의 모습을 자유롭게 오가며 적응 기간을 거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인간과 이종족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보통은 양쪽 부모 중 영향을 많이 끼친 쪽의 종족을 닮는 경우가 많았고, 때론 인간과 이종족의 평균 수명을 비교해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인간이 될 경우 이종족으로서의 능력은 모두 상실하지만 외관상 미미한 본체의 냄새가 남아 있기에 숨길 수는 없다. 이종족 본체의 냄새가 나는 것 외에는 인간과 완전히 같기 때문에, 같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완전한 인간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종족이 될 경우 다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없으며, 사실상 계급만 둔일 뿐이고 3계급인 테르와 다를 바 없어진다. 고작해야 테르보다 능력이 약간 더 강한 정도였다. 따라서 어떤 종족은 둔과 테르를 동급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둔은 굉장히 독특한 계급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개체수가 많지 않은 편이기도 했다. 게다가 모체가 인간일 경우는 더더욱 없었고.

“원래도 임신은 모체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인데, 우논의 아이를 가졌다면 버티는 게 힘드실 거다.”

르네의 말이 오늘따라 따끔따끔했다. 맞는 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자신을 질타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죄책감 때문에 괜히 더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론 폐하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라.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났을 때. 그땐 네가 폐하의 곁에 있어야 해, 노아.”

“알고 있어. 그럴 생각이야. ……이번 일은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녀의 곁에 아군이 가득하여 본인의 자리를 잠시 망각했다. 노아는 그녀의 그림자이며 황실의 기사단장이었지만, 이엘의 하나뿐인 연인이며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였다. 후자의 역할을 망각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애초에, 꼭 아이를 가졌어야 했나?”

그러나 이 질문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노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르네를 돌아보았다.

“무슨 질문이 그래? 르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해라.”

“폐하의 몸이 약하다는 걸 넌 알고 있지 않았나?”

“…….”

“날 때부터 몸이 약하셨는데, 그 몸에 이종족의 아이가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

“오드 님께서 그러셨다. 폐하의 자궁이 많이 약한 편이라고.”

르네 역시 자신이 선을 넘은 발언을 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이건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충신이라는 이름으로 조언하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히 넘쳤다. 하지만…….

하지만 왜 이렇게 분노와 서운함, 그리고 몹쓸 질투심으로 마음이 더럽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 어머니께서 릴리를 낳고 어떤 상태가 되셨는지 너도 알지 않나?”

“알아.”

“우논인 어머니도 그러셨는데, 하물며 폐하는 인간이시다. 보통 이종족도 아니고 늑대의 직계 중의 직계인 네 피를 가지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노아도 알고 있었다. 다만 늑대들 중엔 둔이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직계 중엔 그 계급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늑대는 단 하나의 반려만을 맞이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다른 종족과의 사랑은 금단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네.”

자조하듯 헛웃음을 터뜨린 노아가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우논치고 오래 산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더 무지했던 건지도 모른다. 인간을 혐오하기만 했지, 그 인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 적은 없었던 과거를 반성했다.

“르네. 네가 좀 도와줘라.”

“…….”

“그래도 넌 나보다 오래 살았잖아. 아는 것도 많고.”

노아는 자신의 부족함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의 담백한 태도에, 르네는 조금 전에 보였던 자신의 치졸한 질투심이 부끄러워졌다.

“아이를 왜 가졌냐고 물었지.”

“…….”

“단순히 폐하께서 원하시기만 했다면 갖지 않았을 거야. 뭐가 됐든 지금 상황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맞이하기엔 아직도 위험한 곳인 건 변함없으니까.”

“…….”

“하지만 그 아이가 폐하를 살렸어. 아이 덕분에 나타니엘이 미래를 꿈꾸게 되었거든. 내가 주는 사랑에도,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도…… 이 아득히 어두운 현실을 바꿀 수 없었는데. 그녀가 이름을 지어 주고 벌써부터 만나기를 소망하는 그 아이가, 이 아득한 현실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되었어.”

노아가 처음 만났던 어린 이엘은, 죽음의 고비를 거치고 살아남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 진흙탕 같은 곳에서 너희들을 모조리 짓밟고 군림하고 말겠다는 맹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본인에게 주어진 생을 연장하고픈 욕구로 이어지진 않았다. 때가 되면 언제든 생을 포기하고 이곳을 떠날 것처럼 변한 것이다.

그게 인간과 우논의 차이였다. 영원한 생을 살 수 있는 우논과는 달리 인간은 정해진 수명이란 게 있으니까. 짧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사는 게 인간의 삶의 목표였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다. 아이를 갖고, 그 아이가 아이를 또 낳고. 단순히 종족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번식하는 이종족과 달리, 가문의 명맥을 이어 가는 게 인간의 번식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는, 나타니엘에게 있어 아이는 이종족이 갖는 단순한 새끼가 아니었다.

“근데 그게 내게도 동일해. 나 역시 아이를 통해 미래를 꿈꾸게 됐다.”

“…….”

“르네. 네 말이 맞아. 이런 위험한 상황에, 게다가 몸이 약한 나타니엘에게 임신이란 위험한 부담을 준 건 내 책임이 맞다. 그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그녀와 내게 조금의 희망을 주고 있다면. 그래서 나타니엘이 조금씩 조금씩 이곳에서의 삶을 견디고 이겨 내고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르네는 깨달았다. 노아는 나타니엘을 너무도 사랑하고 사랑해서, 이젠 그녀가 사랑하는 것마저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순히 나타니엘 그 자체만 사랑하는 자신이나 레온과는 다르게, 노아는 나타니엘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사랑하게 됐다. 그게 연인으로서의 시선이었다.

“미안하다, 노아. 내가 주제넘는 말을 했어.”

“네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이런 조언을 하겠나.”

“그래도 내가 과했던 건 사실이야. 참견할 주제도 안 되면서.”

“앞으로도 네가 좀 많이 도와줘. 부끄럽지만 종족의 수장이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둔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래.”

“너도 알겠지만 폐하께서 널 많이 의지하신다. 내가 그리 똑똑하지 않은 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노아의 우스갯소리를 가만히 듣던 르네가 노아가 앉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다시 평소의 이성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여유를 많이 찾은 듯하군.”

“뭔 소리야?”

“한때는 날 연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지 않나?”

“네가 언제 내 연적이었어.”

르네의 말에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내 영지에서 나와 폐하의 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건 질투가 아니었나 보군.”

“……대체 몇 년 전 얘기를 꺼내는 거야?”

“그리고 네 영지에서도 말 한 마디 못 붙이게 했지.”

“이러다 내 부끄러운 어린 시절 얘기까지 다 나오겠군.”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여유로워진 듯해서. 그땐 폐하에게 눈길만 줘도 불같이 날뛰었잖아.”

저놈의 독수리 식 유머인지 조롱인지 모를 화법에 노아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어느새 르네는 손에 포도주병을 들고 있었다. 아까 이곳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먹고 남긴 포도주 같았는데, 남이 먹던 건 절대 손대지 않는 르네가 웬일로 포도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포도주도 잘 안 마시던 놈이 별일이네.”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좀 누그러질 것 같아서.”

“화라도 났나?”

“어. 치졸한 내 자신에게 조금.”

어느 정도 르네의 말을 이해한 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의 손에 들렸던 포도주병을 가져가 저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나도 여유롭지 않아. 여전히 질투도 많고 네가 폐하를 쳐다보는 게 싫어. 어디 너뿐인 줄 아나? 그 곁에 죽어라 붙어 있는 근위대장도 아니꼽고, 나타니엘의 사랑을 받는 작은 테르들조차 못마땅할 때도 많다.”

“…….”

“그래도 참는 거야. 티 내지 않는 거고.”

왜냐하면 결국 그들 눈에 자신은 승리자일 테니까. 나타니엘의 선택을 받은 수컷이란 건 그런 의미니까.

‘……폐하께서 임신을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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