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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3화 (443/488)
  • 443화

    오드의 말에 동의한다. 모체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한 법이다. 르네는 그렇지 않은 상황들을 많이 보고 자랐다.

    르네에겐 여동생인 릴리 외에도 많은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거나 태어나는 도중 죽었거나, 혹은 새끼일 때 죽어 버렸다. 인간도 그렇겠지만 이종족은 새끼 때 죽는 개체가 상당히 많았다. 그 죽음의 위협을 다 뚫고 살아남는 개체만이 진정한 이종족으로 인정받곤 했다.

    한번은 동생을 가진 어머니가 졸도해서 며칠을 쓰러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 르네는 어머니가 죽을지 모른다는 겁에 질려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시 르네는 아주 어린 독수리였고, 그간 태어났던 동생들이 정을 붙이기도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에 차라리 그 순간 어머니가 아이를 포기하길 바랐던 것 같다.

    “건강하고 튼튼한 우논이었던 제 어머니도 동생들을 가졌을 때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갖고도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게 두려울 따름입니다.”

    결국 어머니는 동생을 낳은 뒤 얼마 안 돼 눈을 감으셨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여러 이유 때문에. 그렇게 어머니의 목숨을 맞바꿔 세상에 태어난 게 릴리였다.

    그땐 어머니가 아이를 포기하길 바랐는데. 태어난 동생 릴리는 너무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르네는 그때 품었던 제 마음을 이따금 후회하곤 했다. 동시에 어머니가 목숨을 바꿀 만큼 사랑한 릴리를,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릴리처럼 아끼고 사랑하게 되겠지.

    “공작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요.”

    “…….”

    “나타니엘이 ‘그’와 거래한 것들. 아르세니온을 살리는 대가로 아이와 나타니엘의 목숨을 취하기로 했던 그 거래를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겠죠.”

    오드의 지적이 맞다. 살아 있는 아르세니온을 본 뒤로 그 두려움이 더 커졌다. 막연하기만 했던 현실이 이제야 실감이 나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타니엘은 임신했고 아르세니온은 살아났다. 아이는 어미의 몸을 갉아먹고 태어날 테고, 결국 원치 않은 일은 벌어지겠지.

    “솔직히 말하면…… 노아가 원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공작.”

    “나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임신은…… 조금 미뤄도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럴 수 없는 사정이었다는 걸 안다. 이엘이 저지른 ‘그’와의 거래로 인해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 시기가 지금으로 맞춰졌을 뿐이다. 무엇보다 노아가 그녀에게 아이를 갖자며 강요했을 리 없다. 그는 누구보다 이엘의 의견을 존중하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친구인 노아를 조금은 미워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아플 때 곁에 없는 널 미워할 자격이, 내게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이게 질투란 감정인 걸 압니다. 감히 신의 대리자인 나자르 님 앞에서, 나쁜 감정을 표현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사과할 것 없어요.”

    르네를 부드럽게 달래던 오드가 돌연 웃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오고 있네요.”

    “예?”

    “노아 공작이요. 그가 오고 있습니다.”

    “…….”

    “타이밍이 아주 나빴던 건 아닌 모양이네요.”

    오드의 말처럼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검은 늑대가 보였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에 르네는 실소하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잠깐의 질투를 느낄 자격도 주지 않는군. 노아가 없는 시간만큼은 이엘의 옆을 자신이 채워 주고 싶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좋은 타이밍에 노아는 제 자리로 복귀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상황이 르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네 자리가 아니라고, 더는 욕심내지 말라고. 질투라는 감정조차 네겐 가당찮다고.

    “노아가 돌아왔으니 저는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부르십시오, 오드 님.”

    “공작. 아직도 폐하를 사랑하시나요?”

    너무 당연한 물음을 묻기에 르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엘의 막사 쪽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다. 한참의 침묵 이후에 르네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오드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

    “제 눈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 안에 담고 싶은 것은 단 하나라는 것을요.”

    “그렇군요.”

    “설령 이 눈이 뽑힌다고 해도, 제 시선은 그녀만 좇을 겁니다.”

    그게 독수리의 사랑 방식이라고. 르네의 붉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한편 노아는 제도에서 패티스로부터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듣고, 오랜만에 본 레온과의 긴 대화를 나누느라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알폰스를 비롯한 늑대 무리가 마중 나와, 이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노아는 숨도 돌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막사가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폐하는?”

    노아는 합류한 르네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하고, 급하게 이엘이 있는 막사 쪽으로 달려갔다. 벌컥 열어젖힌 곳엔 하트와 이카르가 이엘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노아를 발견한 하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리를 비켜 주었고, 이카르는 긴 한숨을 쉬며 상황을 짧게 전했다.

    “별일 아니야. 오드 님이 성력으로 안정을 취하게 해 주셨으니 금세 깨어나실 거다.”

    “…….”

    “이봐. 괜찮아?”

    이카르는 제 말에도 꼼짝 않고 이엘만 바라보는 노아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봤다. 별일 아니라고는 말했지만 그녀의 아픔이 임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이카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아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 주고는 막사를 나가 주었다.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간 노아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며칠 전에 제도에 있던 패티스로부터 들은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공작님. 늑대들 중에 둔이 있거나, 혹은 둔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직계를 찾으셔야 합니다.’

    ‘둔?’

    ‘곧 태어나실 아기님이 둔이시니까요.’

    패티스의 지적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되어 부끄러웠다. 정말 단편적인 것만 보았다. 아이를 갖기 위한 관계의 과정, 임신, 그리고 출산 정도. 하지만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건 겨우 그 정도로 간단히 정리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나 둔은……. 패티스와의 대화를 곱씹던 노아는 침대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엘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 주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엘의 미간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듯해서, 그는 검지로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그 손길에 이엘이 눈을 감은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 지켜보지 말고 들어와, 르네.”

    이엘의 자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노아가 막사 밖으로 일렁거리는 르네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조용히 그를 불렀다. 곧이어 천막을 들추고 르네가 안으로 들어섰다.

    “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야? 조르단 공작과 함께 매의 주둔지를 습격하러 갔었다며. 조르단 공작과 그의 병사들은 어디 가고 너희만 여기 있는 거야?”

    “폐하께서 깨시니 잠깐 밖에서 이야기하자, 노아.”

    “그래.”

    르네는 먼저 막사 입구를 들춰 나가려다 노아가 이엘의 이마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떼는 모습을 우연찮게 보게 됐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뭐 해? 나가자.”

    “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선 르네를 비켜 지나친 노아가 먼저 막사 밖으로 나갔다. 르네는 여전히 천막을 들춰 올린 채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꿈꿀 수도 없거니와 꿈꿔서도 안 되는 제 욕망을 감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도에 매 떼가 가득했던 건 알아? 너희가 매의 주둔지로 떠나는 바람에 그쪽은 밀릴 뻔했다고. 원래 너희 독수리의 역할은 제도를 책임지는 것 아니었나?”

    돌아서자마자 제게 쏟아진 노아의 힐난에 르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적으로 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결정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상공에서 제도의 방비를 단단히 하던 자신들이 그 자리를 비움으로써 올리세스의 반란군이 유리해진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매를 습격하겠다며 향한 곳은 되레 텅 비어 있었으니, 그 작전은 실패한 게 맞고.

    “널 탓하려는 건 아냐, 르네. 그리고 지금은 제도도 괜찮아졌어. 밀로랑 킨이 돌아왔거든.”

    “용?”

    “어. 잘 가지고 돌아왔어.”

    일단 1차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용들이 훔쳤다던 문제의 그 열매. 가져오는 건 고사하고, 밀로와 킨이 제때 돌아올지도 확신할 수 없었는데 예상보다 더 빨리 복귀했다. 르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 르네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던 노아가 넌지시 그를 떠보았다.

    “르네. 피곤한 일이라도 생겼나? 평소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긴. 내가 널 하루 이틀 봐? 무슨 일 있는 거지?”

    “조금 전에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그래. 알고 있어. 다 내 잘못이야.”

    이엘의 이야기가 나오자 노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정말로 제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라, 르네도 더는 지적할 수 없었다.

    적막이 찾아왔다.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 들리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정적을 유지했다. 그 적막을 깬 건 르네였다.

    “폐하의 외가 쪽 방계를 찾았다.”

    “외가 쪽? 방계가 살아 있었어?”

    “그래. 선황후의 숙부라고 하더군.”

    “근데 왜 여태 폐하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지?”

    “그 속은 그자만 알겠지.”

    “그자는 어디 있나.”

    “현재는 세잔티노에. 조르단 공과 함께 낙오됐던 인간들을 그곳에 내려 줬다.”

    “세잔티노? 설마 세잔티노에 있는 그 땅굴에 숨기려고?”

    노아의 질문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잔티노에 깊은 굴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쪽은 하이에나의 영지이니 그들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고. 인간들을 데리고 제도로 가기엔, 제도에 밀집해 있는 올리세스의 병사들의 주의를 끌 수도 있기 때문에 당시엔 세잔티노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근데 넌 왜 그렇게 놀라지?”

    다만 노아의 반응이 의외였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세잔티노의 지명을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노아.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냐. 문제는 아니고, 제도에서 들은 게 있어서.”

    “제도에서? 누구에게?”

    “제도에 있는 레온에게서. 아, 레온이 패티스와 상의할 게 있어서 현재 제도에 있거든. 근데 레온이 가족사에 관해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중에 세잔티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어.”

    “세잔티노는 하이에나의 땅인데, 레온이 무슨 상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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