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폐하께서 제 눈치를 보실 이유가 없습니다.”
“…….”
“폐하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제 감정이 폐하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솔직히 두렵습니다.”
결국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그 사실이 중요했다. 르네는 나타니엘의 마음을 얻어 내지 못했다.
“영원히 식지 않을 감정입니다.”
“르네.”
“하지만 폐하께서 제발 단념하라고 명령하신다면, 어떻게든 잘라 내겠습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잘라 내겠는가. 감정이란 게 무슨 종이처럼 쉽게 잘리는 게 아닌데. 이엘은 르네의 절절한 사랑을 알기 때문에 냉랭하게 쳐 내지 못했다.
그의 고백처럼 단념하라고 명령하면, 르네는 어떻게든 마음을 숨기고 없애려 하겠지. 자신의 마음이 이엘에게 독이 될까 두려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정을 없애려 할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할 것을 안다. 마치 릴리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품고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했을 때의 그 옛날처럼. 종국엔 감정을 잘라 내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숨을 꺼뜨릴지도 모른다. 르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엘은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대의 마음을 알면서 외면해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모진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제게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
“아이는 축복입니다. 폐하의 아이라면, 저는 제 아이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정말 그럴 수 있다. 내 아이였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나를 닮고, 너를 닮은 그런 아이였다면 온 힘을 다해 사랑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아비가 내가 아니라 해도, 나타니엘 너의 아이라면 나는 기꺼이 사랑할 거야.
“하트 경. 폐하를 모셔라.”
“예, 공작님. 폐하, 타십시오.”
눈치껏 두 사람의 대화를 모른 척하고 있던 하트가 이엘의 앞에 자세를 낮췄다. 이엘은 르네의 붉은 눈동자를 길게 바라보았다가 이내 하트의 등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르네는 저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이엘의 어깨 위에 잘 덮어 주었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십시오. 밤은 춥습니다.”
“고마워, 공작. 공은 후미에 있는 알폰스 경과 합류하여 무리를 통솔해 따라오도록.”
“예, 폐하.”
르네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이엘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치기 어린 감정을 정리하고 나니, 이젠 그녀의 건강이 가장 염려된다. 이종족의 아이를 가졌다는 건 갖는 과정만큼이나 혹독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가 우논의 직계를 가졌다면 더더욱.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르네는 이엘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고 제 옆에서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일라이저를 불렀다.
“러셀 후작. 이곳은 나와 알폰스 경에게 맡기고, 후작은 폐하를 따라가도록 하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후미 쪽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인간들이 합류했기 때문에 혼자 통솔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괜찮소. 이곳은 내게 맡기고 후작은 폐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시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폐하께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내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그렇잖아도 그녀의 경호가 걱정되었던 일라이저는 르네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기사단의 부단장과 이야기를 마친 후, 근위대인 하이에나 한 마리의 등에 올라타 이엘이 있는 선두 쪽으로 향했다.
전장이 익숙한 르네는 2기사단과 늑대들, 그리고 재규어들까지 능숙하게 통솔하며 대열을 정렬했다. 그러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와 매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하늘에서 눈이 되어 준다면 제도까지 가는 길이 그리 험난하진 않을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무리를 지켜보던 르네는 곁에서 보조하던 알폰스를 붙잡았다.
“알폰스 경. 노아와 이카르는 어디 있나?”
“노아 님은 제도에 계십니다. 제도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시기 위해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카르 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후미에서 재규어 몇 마리와 유클리드 님과 함께 오고 계실 겁니다.”
“알겠네.”
르네는 알폰스와 2기사단의 부단장에게 각각 역할을 일임하곤 이카르가 있다던 후미 쪽으로 향했다. 마침 대열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던 재규어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한 마리의 등 위에 이카르가 올라타 있는 게 보였다. 르네는 그를 향해 걸어가려다 움찔하며 멈춰 섰다.
“아르세니온.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안전하니까요.”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너랑 리노가 제일 걱정이다, 여기서.”
“그런가요. 몸이 전보다 가벼워져서 그런지, 고되지 않고 괜찮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다른 재규어의 등에 올라타 있는 저 남자. 후드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과 보석을 박은 듯한 녹색 눈동자.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굉장한 미인.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이카르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자?”
정말로…… 살아 있었단 말이야? 그녀의 말을 믿었음에도, 르네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것처럼 안색이 파리해졌다.
*
르네와 독수리들이 합류한 뒤로 제도로 향하는 과정이 순조로워졌다. 특히 피난 가지 못했던 인간들을 보호하느라 늦어졌던 속도는, 독수리들이 인간들을 동맹인 근처의 카노프 공작령으로 이동시킨 덕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안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
“오드 님을 불러라!”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르네가 오드를 부르라며 명령하는 사이, 하트가 다가와 바닥에 쓰러진 이엘을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새벽녘이었다. 이엘이 머무는 막사 쪽에서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막사 바로 앞에서 근위대의 경비를 지시하고 있던 하트와 르네가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엘은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폐하.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괜찮……으윽!”
“오드 님을 빨리 모셔 와라!”
“오고 계십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땀범벅이 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르네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폐하를 지켜 주십시오. 부디…… 부디 나타니엘마저 제게서 앗아 가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폐하!”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오드가 이엘을 부르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오드는 잠을 설치느라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오던 참이었다.
“폐하께서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
“비명 소리를 들은 건 조금 전입니다.”
“폐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지금 곧 통증을 낮춰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오드가 손을 뻗어 이엘의 배에 얹었다. 그의 손을 타고 전해진 성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제야 울렁거리던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엘은 축축하게 젖은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제 곁으로 다가와 있는 오드의 손을 더듬거리며 잡았다.
“오, 오드…….”
“엘. 괜찮니?”
“응……. 괘, 괜찮아…….”
“왜 그러신 겁니까?”
답지 않게 성질이 급해진 하트가 끼어들며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오드는 손등으로 물기 어린 이엘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 주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임신을 하셨으니까요.”
“…….”
“특히 공작의 아이니, 쉽지 않을 거예요.”
인간이 이종족의 아이를 갖는 게 결코 쉬울 리 없다. 아이를 갖기 위한 관계도 힘을 억제하는 약을 먹어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되는데, 그 이종족의 아이가 자라날 모체의 몸이 정상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폐하는 자궁이 많이 약합니다. 원래도 몸이 좋지 않게 태어났어요.”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혹여나 오드의 입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올까, 이엘은 끊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마. 아이가 듣지 않게 조심해 줘. 그녀의 간곡한 시선을 느낀 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의지가 중요합니다, 폐하. 지금처럼 의지가 있으시면 괜찮을 거예요.”
“응. 괜찮아.”
“그리고 폐하의 곁엔 제가 있으니까요. 전보다 더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고마워, 오드…….”
그제야 안도한 건지 오드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드의 성력으로 고통에 물들어 있던 그녀의 얼굴도 곧 좋아졌다.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이엘을 한 번 쳐다보던 오드가 르네를 향해 눈짓했다.
“하트 경. 경은 여기서 폐하를 지켜보다가 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날 부르세요. 막사 바로 앞에 있겠습니다. 그리고 르네 공. 공작은 나와 잠깐 이야기를 할까요?”
“알겠습니다.”
르네는 마지막으로 이엘의 잠든 모습을 확인한 후, 오드를 따라 함께 막사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막사 밖에서 불안하게 상황을 살피던 이카르가 날쌔게 달려왔다.
“폐하는? 폐하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통증을 느끼셔서 그래요. 지금은 제 성력으로 괜찮아지셨고요.”
오드가 부드러운 어조로 이카르를 진정시켰다. 나자르의 성력을 받았으니 정말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 이카르는 고개를 끄덕이곤 막사 쪽에 붙어 섰다. 언제라도 이엘이 깨어나면 달려 들어갈 기세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르네의 목소리에 이카르를 바라보던 오드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무슨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이성을 잃지 않았던 독수리가, 겨우 작은 비명 소리 하나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니.
“공작의 표정을 보니 폐하의 상태를 짐작하신 모양이군요.”
“이종족의 아이를 가진 인간 여자는 이전에도 많이 봤습니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도 알고 있겠군요.”
“…….”
“폐하는, 나타니엘은 날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똑같은 쌍둥이로 태어난 아르세니온과 전혀 달랐죠. 배 속에서부터 두 아이의 상태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머니인 리카르디스는 염려했다. 혹여나 황위계승권을 두고 두 아이가 싸우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몸이 약한 황녀를 암살하지는 않을까. 정쟁에 휘말려 사랑하는 딸이 희생당하는 건 아닐까. 몸이 약한 아이들이 성년을 채우기도 전에 죽는 게 의외로 비일비재했던 시대니까.
“잔병치레도 그 때문이에요.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나자르인들에게 기도를 받고 성력을 받은 덕에 잔병 정도로 유지하게 된 겁니다. 만약 이엘이 성장기 동안 체력을 기르는 일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했다면 아이를 갖지 못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