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1화 (441/488)
  • 441화

    “제게 약속하셨습니다.”

    “약속?”

    “황자님의 대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응. 그랬지.”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폐하를 믿고, 또 신을 믿습니다.”

    “…….”

    “겨우 이런 잡스러운 올리세스의 농간에, 마음이 흔들리셔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정말 그대의 아비를 닮았구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내게 몇 번이고 깨우침을 줬던 그대의 아비와 닮았어. 이엘은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지적이다. 임신한 탓에 몸 상태가 변해서 그런 건지, 최근 들어 심리가 많이 불안했다.

    “좋아. 그러니 후작도 내 약속을 지켜다오.”

    “…….”

    “내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그대가 지켜보도록. 그대가 스승이 되고 대부가 되어, 아이가 바르게 클 수 있도록 말이야.”

    “명을 따르겠습니다.”

    일라이저의 맹세를 곱씹으며 후미로 돌아왔다. 선두에선 피 터지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후미 쪽은 알폰스를 비롯한 몇몇 늑대들이 인간들과 약한 개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민가의 인간들을 행렬에 데려와 함께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후미 쪽은 거의 약자로만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엘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는 하얀 늑대 슈프를 불러들였다.

    “폐하!”

    “슈프. 네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네! 무엇이든 맡겨만 주세요!”

    “포레스트. 너도 오렴.”

    알폰스의 곁에서 독기를 바닥에 뿌려, 적의 침입을 대비하던 포레스트가 그녀의 갑작스런 부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포레스트는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버려질 것을 직감했다. 그동안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웠기 때문에 간신히 이 무리에 남을 수 있었지만, 사실 이곳의 그 누구도 뱀인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전력에, 자신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뱀의 능력인 은신과 독기는, 자신처럼 약한 개체에게는 딱히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다.

    은신을 공격력에 사용하려면 전면전에서 맞서 싸울 만큼 강해야 하지만, 포레스트는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약한 뱀이었다. 고작해야 도망치는 용도로밖에 쓸 수가 없다. 갖고 있는 독기조차 미미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버려질 것이다. 여기서…… 나는 버려질 거야. 포레스트는 턱까지 덜덜 떨며 이엘의 앞에 다가섰다.

    “부, 부르셨습니까, 폐하.”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떨고 있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할 수 있겠니?”

    해야 할 일? 이곳을 나가라는 게 아니고? 포레스트의 녹색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이엘은 제 옆에 있던 슈프를 포레스트의 곁에 붙여 주었다.

    “둘이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 임무가 꽤나 막중한데, 너희가 할 수 있겠니?”

    “네!”

    슈프는 우렁차게 대답하면서도 곁눈질로 뱀을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하고많은 늑대들과 하이에나들 중에 자신이 발탁된 이유는, 유일하게 저 뱀을 꺼려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저 뱀을 꺼려하고 무시하지만, 슈프는 혼자 겉도는 포레스트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주 약간!

    “너희가 내 귀가 되어 주어야 해.”

    “귀요?”

    “지금부터 포레스트 넌 인간으로 변장해서 올리세스의 마을로 잠입하고, 슈프는 밖에서 포레스트를 지켜 주렴.”

    올리세스가 한 가지 착각한 게 있다. 내부를 분열시키는 일은 이쪽이 더 잘하는 일이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내부를 분열시킨 이엘은 물론이고, 제2의 능력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천적으로 기질을 타고난 뱀까지.

    “지금 당장 떠날 채비를 하렴.”

    “폐하.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알폰스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저가 대신하겠다며 나섰다. 슈프는 괜찮지만 저 뱀은 안 된다. 알폰스는 아직도 포레스트를 믿지 못했다. 저 나약하고 약아빠진 뱀을 어떻게 믿겠는가. 분명 조금만 위협적인 상황이 닥치면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게 빤하다. 그러면 함께 간 슈프가 위험하게 될지 모른다.

    “제가 올리세스의 마을에 잠입하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보내 주십시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두 주먹을 꽉 쥔 포레스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이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낼 수 있고, 제 존재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고 어쩌면 이엘이 제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세작 일뿐 아니라 내부를 흔들게요.”

    “가능하겠니?”

    “네. 할 수 있어요.”

    이엘이 만족한 듯 웃었다. 역시 로빈이 보낸 아이다. 알폰스가 걱정하는 것처럼 저 어린 뱀은 마냥 어린애가 아니었다. 눈치도 빠르고 무엇보다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분수를 아는 만큼 끼어들고 빠져야 할 때를 정확히 알았다. 그 특화된 기질이 이번 일에 누구보다 적합했다.

    “제 목소리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제 노래요.”

    “그래, 맞아. 그게 필요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올리세스의 곁에 아스타로라는 남자가 있어. 그 남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를 돕는 척하며 이교도가 전파되는 걸 막고 혼선을 주렴. 후에 우리가 만든 해독제를 유통시키는 것도 해야 돼. 그게 너와 슈프가 해야 할 일이란다. 할 수 있겠니?”

    “네. 할게요.”

    포레스트의 답을 듣자마자 슈프가 그의 앞에 자세를 낮췄다.

    “얼른 가자!”

    “조심히 다녀오렴.”

    알폰스는 여전히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슈프와 포레스트를 쳐다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포레스트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적임자는 절대로 자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알폰스 경.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구나.”

    점이 되어 사라진 슈프의 흔적을 좇는 알폰스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알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히 폐하께 어찌 불만을 갖겠습니까.”

    “경은 슈프의 친척이 아닌가. 혹 슈프가 위험할까 걱정이 되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모든 가문이 다 친척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걱정되는 건 슈프가 아닙니다.”

    “괜찮을 거야. 슈프만큼은 아니지만 포레스트도 제 몫을 잘해 주고 있으니까. 그러니 저 애를 믿어 줘. 믿는 게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쉬워.”

    “혹시 스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알폰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로 향한 스완에게서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이제 곧 드레인을 만나러 갈 거라는 마지막 연락 이후로 스완은 사라져 버렸다.

    제도에 주둔해 있는 올리세스의 사병들과 그곳의 정태를 살피기 위해 떠난 노아 역시 아직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다. 약속대로라면 이전 지역에서 합류했어야 하는데, 제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의 합류가 늦어지고 있었다.

    “스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녀석은 강합니다.”

    “경은 맹수인 슈프와 포레스트는 믿지 못하면서 백조인 스완은 믿는군.”

    “그건…… 뭐, 그렇긴 하네요.”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던 건지, 알폰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제 뒷목을 긁적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따지면 어린 뱀과 늑대보다, 성력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스완 쪽이 병력엔 더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 백조가 늑대 무리에 섞여 제 지휘 아래서 얼마나 굴려졌는데. 확실히 스완은 전력이 된다.

    “아무튼 경도 준비하게. 선두 쪽은 정리가 끝나가는 중이야. 다시 제도를 향해 출발해야 하니까 경은 후미 정리를 해 주게.”

    “예, 폐하!”

    그때였다. 저 멀리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며 햇빛을 가리는 게 보였다. 처음엔 먹구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거대한 새의 무리였다.

    “독수리입니다!”

    근위대 중 하나가 용케 독수리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모두가 그 무리를 독수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르네를 앞세운 독수리들은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활강했다. 개중 일부는 혼란스러운 전장을 정리라도 하듯,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내려와 적의 몸통을 낚아채 집어 던졌다.

    “저건 매인데요?”

    어쩐지 독수리 같지 않은 속도와 방식이라고 생각했더니, 독수리들 틈에 매가 몇 마리 섞여 있었다. 이엘은 가만히 창공을 바라보다가 제 앞으로 부드럽게 내려온 적갈색 독수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독수리의 깃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르네 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응. 오랜만이야. 보아하니 일부 매도 합류했구나.”

    “예. 마음이 돌아선 개체들이 몇 있었습니다. 합류를 원하기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잘했어. 수고했어, 공작.”

    이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폈다. 이렇게 그녀의 관심을 오롯이 받는 건 꽤나 오랜만이다. 그간의 그리움이 눈 녹듯 죄 녹는 순간이었다. 르네는 부리를 그녀의 손바닥에 살짝 비비적대며 온기를 느꼈다.

    전쟁이 터지고 할 일이 많은 제도로 향해야 했지만 언제나 르네의 마음은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늘 그녀의 옆을 지키는 노아의 사랑만큼이나, 자신의 사랑도 견고하고 우직하게 그녀의 곁을 지켰다. 표현하지 못했을 뿐.

    “타십시오. 제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미안해. 지금은 그대의 등에 타는 게 어려울 듯해.”

    “예?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황손을 가지셨습니다.”

    독수리와 매의 도움으로 습격을 잘 막아 낸 일라이저가 얼굴에 피를 묻힌 채 다가와 말했다. 그는 멀리서 이엘의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르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그녀가 르네에게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 또한.

    “아기님이 태어나실 때까진 되도록 높은 곳엔 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경하드립니다.”

    “응. 고마워.”

    독수리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르네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녀와의 사이를 벌린 채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척에서 부리를 비비적거리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아이……. 그렇군. 결국 그렇게 되었군. 알고 있었는데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이 더 아리고 괴롭다. 그녀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아이가, 제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르네를 끝도 없이 괴롭게 만들었다. 줄곧 괜찮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정말 온전히 축하만 할 수 없는 자신의 못된 마음이 싫었다.

    “르네. 나는…….”

    이엘은 말하던 것을 멈추고 르네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르네에게만큼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다. 르네는 진심을 다해 축하하겠지만, 그게 그 감정의 전부는 아니란 것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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