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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40화 (440/488)

440화

하여 그녀의 아버지는 린다를 따라 그 장소로 향했다. 크기는 어느 정도이고, 깊이는 얼마만큼인지 파악한 후에 약자와 암컷들을 그곳에 옮길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안내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동굴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혹시 땅 아래일까 싶어 바닥을 파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파도 땅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린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동굴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곳 따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간이 없었다. 인간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암컷들을 대피시켜야 했던 린다의 부친은 우선 린다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때 린다 님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셨습니다. 선대 후작님이 몇 번을 타이르고 혼내셨는데도 계속 동굴 이야기만 하시더군요. 결국 저희가 한눈판 사이에 암컷들을 데리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암컷들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예. 그리고 시간이 지나, 홀로 전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들은 안전한 곳에 잘 피신시켰고, 자신은 무리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처럼 린다 님은 1차 전쟁 때 전장에서 전사하셨습니다.’

당시 린다가 가리킨 대피 장소는 제도 쪽이었다. 황실과 인간들이 이종족을 죽이러 오는 와중에 도망치기는커녕 제도로 가야 한다니. 린다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는 이가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저를 따르는 암컷 일부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들을 숨긴 채 홀로 돌아왔다.

‘그때 저는 차라리 린다 님이 말씀하신 곳이 존재하길 바랐습니다. 그곳에 모두가 안전하게 숨어 있기를요. 그만큼 당시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그런 곳이 존재해 봤자 암컷들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추적을 피하기 위해 쇄골에 심은 인식표를 제거한 게 모든 일의 단초가 됐다. 그때 당시, 인식표를 제거하면 독이 퍼져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종족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암컷 중 인식표를 제거하지 않은 암컷이 없었다. 모두가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린다는 포효했다. 기껏 숨겨 놓았는데, 이미 인식표를 제거한 이상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고 날뛰던 그녀는, 결국 전장에서 인간의 손에 죽고 말았다.

“내 숙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했지만 난 그 공간이 존재했다고 생각해.”

“……세잔티노에서 고니의 호수로 이어지는 이 통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대의 생각은?”

레온의 말에 패티스는 잠깐 침묵했다. 언젠가 피시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오른 탓에.

‘사체 특유의 냄새가 미미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어. 최근의 것은 아니고 꽤 오래된 듯했고. 정말 사체가 맞다면, 거기 파묻힌 사체가 상당히 많을지도 몰라.’

그땐 피시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그 통로 자체를 믿지 않기도 했으니까. 아무도 가 보지 못했으나 피시에게만 열렸던 그 지하 통로. 정말 그 지하 통로를 레온의 모친인 린다가 알고 있었던 걸까?

그 땅굴 같은 통로는 실재한다.

“사실 그 통로에 어린 이종족들과 인간들을 피난시켜 놓았습니다.”

“그 통로를 찾았어?! 그대의 형인 피시 남작 외에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그랬잖아.”

“전쟁이 터지고 인간들을 피난시켜야 했는데 그 인원을 수용할 만큼 크고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피시가 말했던 그 지하 통로를 떠올렸고 찾아 나섰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패티스는 황실도서관에서 가져왔던 지도를 보며 피시가 말했던 그 지하 통로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었다. 과거엔 릴프 강이 고니들이 사는 호수로 이어져 있었고, 피시가 지나온 통로는 그 방향과 위치가 매우 비슷했다.

그래서 제도를 지나는 통로의 위치를 대충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무리 땅을 파도 파도 그 통로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레온이 얘기했던 1차 전쟁 때의 선대 후작과 린다의 상황처럼.

“하지만 어떤 인간 아이가 통로 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

“제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게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몇 번씩 파헤쳤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곳인데, 그 아이가 발견한 뒤로 줄줄이 땅굴로 향하는 깊은 구멍들이 나왔다고 보고받았습니다.”

“…….”

“나자르 님이 지하 통로를 만드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통로 자체에 성력과 비슷한 기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때론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고 넘겨 버렸습니다.”

당시의 린다와 이종족의 암컷들. 그리고 현재의 인간들과 어린 이종족들. 패티스는 공통점을 알아냈다.

“결국 약한 자들에게만 열리는 통로 같은 거였군요.”

“그런 모양이네. 어쩌면 신께서 약한 자들이 도망치고 숨을 수 있는 곳을 안배해 두신 걸 수도 있고.”

“그럼 린다 님께서 만나셨다는 나자르 님이, 이 지하 통로를 만드신 분이신가요?”

“아니. 그건 아냐. 통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했어. 어떤 나자르가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이라고 하더군.”

“연인이요?”

“그 이상의 일은 나도 더는 몰라. 숙부가 기억하는 것도 거기가 끝이었어.”

연구소에 갇혀 있던 나자르가 린다에게, 그리고 린다가 몇몇 우논 사자들에게. 그렇게 몇 번에 걸쳐서 전해진 내용이라 완벽히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숙부가 믿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나자르의 연인이면 같은 나자르였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고, 혹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수도 있지.”

“이종족일 수도 있을까요?”

패티스의 질문에 레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자르는 종족으로 따지면 인간에 속하지만,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점에서 인간과 차별화된 종족이기도 했다. 평범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확률적으로 낮은데, 하물며 대상이 이종족이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얘기였다.

“인간과 이종족의 사랑은 파괴적이야.”

“…….”

“종족을 넘는 사랑은 아름답지 않아.”

그렇게 말한 레온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타니엘의 즉위식 모습을 짠 태피스트리가 오늘따라 더 아름답게 보였다.

“짝사랑은 더더욱.”

내가 나타니엘을 사랑하고, 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듯.

‘발레리안 님은 린다 님을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숙부. 지금 뭐라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처음 린다 님이 연구소에 끌려가셨던 건 황실에 의한 강제 사항이었지만, 발레리안 님은 자원해서 들어가셨다고 하더군요.’

‘…….’

‘린다 님 때문에요.’

숙부의 말은 여전히 신빙성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의 짝사랑은 비관적으로 끝난 셈이다. 어머니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인 레온 역시 부모를 모두 미워했으니까.

웃기게도 그랬다. 이종족은 이상할 정도로 부모의 습관과 성향에 영향을 받는 편인데, 그게 사랑에 있어서 유독 심했다.

이종족인 내가 인간인 나타니엘을 사랑하고, 호랑이인 발레리안이 사자인 린다를 사랑했듯. 종족을 넘은 짝사랑의 결말은 언제나 파괴적이었고 희생을 요구했다는 것을, 레온은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백작님!”

“무슨 일이냐.”

“노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허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걸 반기지 않는 패티스였지만, 그의 수하가 가져온 소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노아가 왔다고?”

그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

하트의 등 위에서 뛰어내린 이엘은 능숙하게 장전한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연이어 터지는 총소리에 맞춰 하이에나 근위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달려드는 적의 목을 물어뜯었다.

제도로 향하기 위해 포르 자작령을 나온 이엘의 무리를 덮친 건 한 무리의 이종족 떼였다. 하나의 종족이 아니라 여러 개의 종족이 합쳐진 이종족들은 이엘을 비롯한 인간들을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정렬을 유지해라!”

“돌아서지 마!”

근위대를 통솔하는 하트와 2기사단을 통솔하는 일라이저의 고함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려왔다. 이엘은 그들에게 인솔을 맡기고 자신은 근처를 지나던 하이에나를 잡아 그 위에 올라타며 다시 총을 장전했다.

“페른. 가장 앞으로 향해다오.”

“예, 폐하.”

그녀의 명령을 받은 하이에나는 괴성과 총성이 난무하는 전장을 누비며 빠르고 안전하게 선두로 그녀를 데려다 주었다. 이엘은 맞은편에서 총을 들고 일라이저를 노리는 남자를 향해 총을 쐈다. 그녀 덕에 위기를 면한 일라이저는 약식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이곳 정리는 곧 끝나니 후미에서 체력을 보충하셔도 될 듯합니다.”

“원래 이곳은 민가였어. 근데 인간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는구나.”

“피난을 갔을 확률이 큽니다. 이 근방에는 백작령이 있었으니까요.”

일라이저의 대답에도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방에 있는 백작령의 영주는 그녀를 지지하는 신귀족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엘의 명령대로 주변에 있는 민가를 보호했을 것이다.

“안심하십시오. 올리세스의 군단은 오합지졸이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렇게 예고 없이 진행된 습격은 오히려 그들에게 역풍이 될 겁니다.”

“물리적인 전쟁은 그렇지.”

“…….”

“올리세스가 노리는 건 이런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다.”

이엘의 말에 일라이저도 동감했다. 이런 식의 파괴적인 전쟁은 지난 두 번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간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기에 적합했다.

놈이 노리는 건 그런 약해진 인간들의 마음이었다. 이런 전쟁의 결과로 땅이 황폐해지든 말든, 혹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든 말든. 그건 올리세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전쟁이라고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면, 나약해진 인간들의 마음은 금방 꺾이고 말 테니까.

“희생자는 최소한으로 해라, 후작.”

“예, 폐하.”

이엘은 일라이저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며 격려하곤, 타고 왔던 하이에나의 등 위에 다시 올라탔다. 벌써 이 전쟁의 책임이 방탕하고 무능력한 황제에게 있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엘의 무리는 포르 자작령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들을 통제할 재간이 없었고,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엘은 막을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이 황좌에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향한 무성한 소문들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엘은 생각을 멈추고 손을 배에 올렸다. 과연 이 아이에게 안전한 세상이 올까? 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고 해도…… 나처럼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이 세상은 과연 행복한 곳일까?

“폐하.”

그 순간 일라이저가 떠나려는 하이에나를 붙잡아 세우고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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