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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9화 (439/488)
  • 439화

    이엘이 황위에 오르기 전. 인간들을 설득하기에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패티스는, 이엘이 원치 않는 방식을 택했다.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네. 신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지.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신께선 우리를 위해 마지막 희망을 남겨 놓으셨더라.’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쉽게 음을 만들고 저런 가사를 붙여 퍼뜨렸다. 절망밖에 없는 곳에 뿌려진 희망의 씨앗은, 별것 아닌 노래를 타고 타고 흘러가 파도를 만들었다.

    고작 노래 하나가 마치 신탁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간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패티스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전략을 올리세스가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니.

    “패티스 백. 내 생각엔 제도는 미끼 같아. 올리세스가 노리는 건 제도의 탈취가 아닌 듯하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놈은 다른 걸 노렸나 보군요.”

    “최근에 내 수하 중 한 아이가 납치되는 일이 있었어.”

    “후작님의 수하라면…….”

    “로. 타이곤.”

    “…….”

    “놈들에게 갈기를 빼앗겼어.”

    타이곤의 갈기. 치료용으로 성력에 비견될 만큼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걸 노린 놈들이 납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로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놈들의 근거지를 파악하기 위해 보낸 추적대가 이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늑대의 기름.”

    “…….”

    “타이곤의 갈기. 늑대의 기름. 이제 알 것 같지 않아?”

    아니길 바랐는데. 패티스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금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자는 나타니엘을 비롯한 동맹군, 그리고 로빈. 하지만 뱀은 스완이 소모라를 전부 정화시키고 보호석까지 모두 빼앗았기 때문에 사실상 전의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로빈이 완전히 이엘의 편에 섰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렇다면 올리세스가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확률이 커. 그는 동생인 리노 윌터로부터 모든 전말을 알아냈을 테니까.”

    올리세스도 선황처럼 ‘그’를 만나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 걸까.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고민에 빠진 패티스를 바라보던 레온이 앞에 놓인 찻잔을 매만지던 손짓을 멈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내 어머니에 관해 알아낸 사실이 있어 이곳으로 오게 된 건데.”

    레온의 말에 패티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온에게 있어 부모의 존재는 금기였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대할 때 암묵적으로 부모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변방의 영지에 머무르며 지냈던 하이에나들도 잘 아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레온에게 부모는 노아의 부모였던 무어와 루나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레온은 사자와 호랑이 양가의 적통이었지만, 정작 그는 저를 낳아 준 부모를 부모 취급하지 않았다.

    내막은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꼬여 있겠지만 어쨌든 레온이 말하는 ‘부모’란 보통 상황에선 늑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가 꺼낸 ‘내 어머니’는 말의 어감이 루나를 가리키는 게 아닌, 레온의 친어머니인 린다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패티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린다. 그리고 발레리안. 내 부모인데 그대도 알고 있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진 않습니다. 건너건너 들었을 뿐이라 어떤 분들인지는 모릅니다.”

    “하긴. 자식이라는 나도 잘 몰라.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의 부모에 관해 이야기하는 레온이 낯설다. 레온은 기본적으로 동족이 아니면 방어벽을 세우고 철저히 무시하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사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하이에나라면 치를 떨고 경계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찾아와 뜬금없이 가정사를 꺼내는 이 상황이, 패티스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당혹감을 읽은 건지 레온이 피실 웃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야. 다만 이 제도와 관련이 있어서 그대에게 이야기하는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내 부모는 연구소에 잡혀 와 나를 낳았고, 내가 태어난 뒤에 연구소를 탈출했어.”

    “아. 그 얘기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연구소에 잡혀 왔지.”

    “예? 후작님의 부모님께서 또 잡히셨다는 겁니까?”

    “의도적으로 잡힌 거야.”

    란트와의 대화 이후, 레온은 숙부를 찾아가 알고 있는 것을 감추지 말고 전부 말하라고 말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꺼려한다면 명령을 내려서라도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생각이었는데, 란트의 말처럼 숙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았다.

    란트의 가문 사람들이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린다는 연구소를 탈출하고 영지로 돌아왔지만, 연구소에 잡히기 전과 똑같은 생활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린다는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에 평소엔 특이점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따금 악몽에 사로잡히거나 열병을 앓는 날이 잦아졌다고 한다.

    ‘출산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하더군요.’

    ‘……후유증?’

    ‘인간들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인간들 말로는 산후우울증이라고도 하죠.’

    ‘…….’

    ‘그게 린다 님에게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요.’

    그래서 린다의 부친이었던 당시 사자 후작은 제 딸 몰래 계획을 짰다고 한다. 연구소에 침입해 그녀의 자식을 빼 오기 위한 계획을.

    정확히 말하면 죽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주로 인해 딸의 생이 송두리째 망가져 버렸기 때문에. 오롯이 사자의 피만 흐르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호랑이의 피까지 섞인 잡종이었기 때문에.

    그러던 찰나에 발레리안이 사자의 영지에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몰랐습니다. 린다 님이 낳은 아이의 아비가 발레리안 님이었을 줄은.’

    ‘…….’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는 린다 님의 안부를 물었지만 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분은 호랑이시니까요. 하지만 우연히 경비를 서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린다 님이 저희를 발견하고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셨기에 비켜 드렸고,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내 외조부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선대 후작님께선 모르셨습니다. 제가 보고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발레리안이 딱 한 번 찾아왔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발레리안은 린다와 만났던 그날을 기점으로 이따금 사자의 영지에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린다는 그를 만났고 숙부는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을 모른 척하며 비밀을 지켜 주었단다. 어떨 땐 경비를 서 주면서까지 둘의 만남을 덮어 주었다.

    ‘처음엔 두 분이 감정적으로 동한 줄 알았습니다. 비록 앙숙인 관계였고 억지로 맺어진 사이였으나 어쨌든 두 분 사이엔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관계를 갖고 아이를 출산했던 시기가 짧지 않았을 테니, 어쩌면 연구소에서 두 분의 마음이 서로에게 동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감춰 주었던 것이다. 혹여나 호랑이와 엮였다는 사실에 그녀의 아버지가 분개할까 봐. 그는 선대 후작의 충성스러운 부관이었지만, 린다가 처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두 분은 그런 감정으로 인해 만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아이를 탈출시킬 계획으로 만나셨던 겁니다.’

    ‘…….’

    ‘린다 님은 부친께서 자신의 아이를 죽일 것이라고 예상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두 사람이 연구소에 들어와 나를 탈출시켰던 것입니까?’

    ‘예, 맞습니다. 정확히는 린다 님께서 일부러 잡혀가 내부를 흔들었고, 그 틈을 타 발레리안 님이 레온 님을 탈출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양쪽 종족 모두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두 분 다 길길이 날뛰는 동족에게 아이를 데려갈 수 없었고, 고민 끝에 발레리안 님의 오랜 친우이신 늑대 공작님께 맡기셨던 겁니다.’

    그게 레온이 무어와 루나에게 맡겨진 과거의 전말이었다.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만 생각해 왔던 오랜 집념을 깨뜨려 버린 진실이기도 했다. 그들은 레온을 버린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 잠시 위탁했던 것이다. 루나의 말처럼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정말 부모를 만나게 됐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십니까, 후작님?”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을 깨운 건 그의 말을 경청하던 패티스였다. 그의 목소리에 레온은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안하게 됐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닙니다. 차를 더 드리겠습니다. 말씀하고 싶으실 때 하십시오.”

    패티스는 티포트를 기울여 레온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단순히 어린 시절을 말하고자 찾아온 건 아닌 듯한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저 타이곤은.

    아직 청년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한 소년의 외양과는 달리, 저 타이곤은 오합지졸의 네 종족을 이끄는 능력 있는 수장이었다. 인간 여자인 나타니엘이 찾아오기 전까진 동족을 한데 모으지도 못했던 어리숙한 자신들과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패티스는 레온을 인정했다. 사자의 피를 싫어한다는 사감을 제외하고.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했네. 본론만 바로 말할게.”

    “예, 말씀하십시오.”

    “그때 나를 구하러 연구소에 들어왔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했다고 했어.”

    “그게 누구입니까?”

    “나자르.”

    “…….”

    “연구소에 잡혀 있었던 나자르를 만났대.”

    그 시기가 나자르 대학살 시기보다 이른 편이었지만, 나자르는 워낙 예전부터 탄압을 받아 왔기 때문에 당시 연구소에 몇 명이 잡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패티스는 레온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반응했다.

    “그랬군요. 나자르인들은 몇 대에 걸쳐 끊임없이 탄압을 받아 왔으니까요. 황실과 반목하기도 했고.”

    “그때 만났던 나자르가 지하 통로를 내 어머니에게 알려 준 거야.”

    지하 통로라는 말에 찻잔을 입에 댔던 패티스가 아주 잠깐 동요했다. 지하 통로라면…… 설마 피시가 찾아냈고, 현재는 인간들이 숨어 있는 여기 땅 아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패티스의 의심은 레온의 다음 말로 인해 확신이 되었다.

    “난 그게 그대들의 영지인 세잔티노에서부터 고니의 호수로 이어지는 그 통로를 말하는 것 같아.”

    “그게…… 그때부터 있었던 곳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1차 전쟁 때, 암컷들이 숨었던 곳인 듯하고.”

    “무슨…….”

    “내 종족과 다른 종족의 일부 암컷들이 어머니의 인솔하에 거대한 동굴에 숨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내 숙부가 한 말이니 거짓말이거나 소문은 아닐 거야. 다만 숙부는 그 말에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처음 레온의 숙부가 레온에게 린다에 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린다의 산후우울증 때문이었다.

    가볍게 앓다 지나간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 당시 린다의 상태는 몹시 좋지 않았다. 지금의 레온처럼 잠을 포기할 정도로,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고 열병에 휩싸였으니까. 어떤 날은 졸도하며 쓰러지기까지 해서 저택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었다.

    숙부는 혹여나 진실을 알게 된 레온이 그것을 제 탓으로 생각할까 걱정이 돼 말을 아꼈던 것이다.

    “당시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조금 아픈 상태였거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렸지.”

    1차 전쟁이 터지고 모든 이종족이 혼란스러울 때, 린다는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며 무리를 안심시켰다. 자신이 아는 나자르가 알려 준 장소이니 안전한 곳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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