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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8화 (438/488)
  • 438화

    이온이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낸 것처럼, 이엘도 기억의 봉인을 풀었다.

    “이제야 나도 기억이 나. 매일같이 꿨던 그 꿈. 선황이 어머니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어린아이가 목격하고 도망치면, 선황은 어머니를 죽이고 그 아이의 뒤를 쫓아가.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해서.”

    “…….”

    “그 아이는 네가 아니라 나였어. 내가…… 어머니의 살해 현장을 목격했던 거야.”

    나쁜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났던 어린 황녀는 유모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그날따라 곤히 자던 유모는 이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이엘은 황녀궁을 뛰쳐나와 바로 옆이었던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에게 갈 거야. 어머니 품에서 잘 거야, 오늘은. 그 생각 하나로 황후의 침실로 향했던 이엘은, 보아선 안 될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는군! 감히 짐을……! 짐을 능멸하려 하다니!’

    선황은 선황후의 목을 조르며 폭언을 쏟아 냈다. 깜짝 놀란 이엘은 저도 모르게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위험해!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죽이려는 아버지를 말릴 힘이, 어린 황녀에겐 없었던 것이다.

    ‘다, 당신 같은 사람은…… 주, 죽어야 해……!’

    한껏 억눌린 목소리로 황후는 소리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의 반항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단란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엘과 이온 앞에선 언성 한번 높인 적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이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죽어라. 그토록 원한다면 친히 해 주지.’

    선황이 어머니의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을 가했을 때,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읍……!’

    들켰다. 나도 죽고 말 거야. 엄청난 공포가 휘몰아쳤고, 정신을 차렸을 땐 황녀궁으로 돌아온 뒤였다. 샤워를 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이엘은 벌벌 떨며 주변을 살피다가 커다란 옷장을 발견하곤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소녀의 얼굴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로 엉망이었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 모아 옷장 구석에 몸을 둥글게 말고 처박힌 이엘은 작은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다.

    쿵. 쿵. 쿵. 누군가 제 침실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러 이곳까지 왔어……. 나도 어머니처럼 죽을 거야. 어머니가 죽는 걸 모른 척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나는…… 나는 정말 나쁜 아이야.

    ‘안 됩니다! 검을 내려 주십시오!’

    그때였다.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옷장과 선황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아주 미세하게 보이는 틈새로, 이엘은 그 주인공이 자신의 오빠 아르세니온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나와라.’

    ‘나타니엘에게 손대지 마세요. 이 애가 죽으면 저도 죽을 거예요.’

    이온의 당찬 경고에 선황이 비웃었다. 감히 네까짓 것이 내게 대드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한참 노려봤다. 하지만 이온은 지지 않았다. 이엘을 지키기 위해선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첫째 아이가 필요하시잖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우리가 죽으면 아버지의 계획은 다 끝나는 거잖아요? 신탁도 깨지고 ‘그자’와 거래하려던 것도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라고요. 만약 아버지가 잘못 안 거라면요? 나타니엘이 첫째 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어요? 그 산파의 말을 믿을 수 있어요?’

    ‘…….’

    ‘아버지가 나타니엘을 죽이시면 저도 죽을 거예요. 제 스스로 죽을 거라고요.’

    선황은 씩씩거리는 황자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제물은 성년이 되는 열일곱 살에 바쳐야 한다. 감정에 휘둘려 지금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순 없다. 게다가 신탁도 두 아이가 함께 생존해야 한다고 했기에 검을 쥔 손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얌전히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일게요. 여기서 기어 다니라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성년이 되는 해에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첫째가 아니라면 그때 이엘을 죽이세요. 그러니까 지금은 나타니엘을 죽이지 마세요. 제발 그때까지만이라도 이엘을 살려 주세요, 아버지……. 제발요.’

    이엘은 옷장 안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는 아르세니온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온은 나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버리려고 했는데, 정작 나는 저 애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선황은 이온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조금 전에 제게 대든 것에 대한 징벌은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어린 아들의 뺨을 연이어 내리쳤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 억지로 참았지만 잇새로 터져 나오는 이온의 신음.

    잠시 후 선황의 부름을 받고 들이닥친 시종들에 의해 옷이 발기발기 찢어지고 처참히 벗겨지는 모습까지……. 모든 걸 무력하게 목도했다.

    내가 누나일지도 모르는데…… 누나면서 동생을 지켜 줄 수도 없다니. 지켜 주지도 못하다니. 이렇게나 용기가 없다니…….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저렇게 죽어 가는데 나는 혼자 살아남으려고 옷장에 숨어 버렸다니.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극한의 공포가 방어 기제를 만들었다. 이엘의 머릿속에서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린 것이다.

    “너와 리노가 하는 이야기를 밖에서 들었어.”

    “…….”

    “그랬더니 묻어 뒀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더라고.”

    그렇게 중얼거린 이엘은 저와 꼭 닮은 이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젠 상관없다. 누가 첫째고, 둘째이고.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건 단 하나.

    “그때는 없던 힘이 지금의 내겐 있어, 이온.”

    “……나타니엘.”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게. 너를 모른 척하는 일은 다신 없을 거야.”

    어머니의 죽음도 모른 척했고, 이온의 용기 있는 모습도 못 본 척했다. 살아남기 위한 어린아이의 본능이었지만, 이엘은 그것이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고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와 달라져야 한다. 그러니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

    “너는 내가 지켜, 아르세니온.”

    “…….”

    “이번엔 내가 널 지켜 줄게.”

    어떤 위험에서도 널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생겼어.

    *

    “사자가 오고 있다고?”

    “정확히는 레온 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나가서 엄호해. 주의를 끌지 않게 조심하고.”

    레온이 말도 없이 제도에 방문할 리 없었다. 패티스는 급보를 전한 하이에나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곤 집무실을 나와 복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밖은 고요했다. 용들이 이곳에 온 뒤로 반란군의 기세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럴 때 올리세스를 잡아야 하는데 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라 갑갑하기만 했다. 어딘가에 꽁꽁 숨은 건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독수리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그들의 능력으로 찾아내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도에 나타난 건 뜬금없는 레온과 그의 무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제도는 근위대를 제외한 나머지 하이에나들 대부분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하이에나가 가득한 곳에 하이에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자들을 데리고, 그것도 사전에 어떤 전언도 없이 들이닥치는 레온이라니. 급한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디 그게 나쁜 일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레온과 사자 무리가 황궁으로 들어온 것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다행히 반란군 쪽은 고요했고 레온의 무리는 경계를 어렵지 않게 통과해 황궁에 진입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이오, 패티스 백. 미리 언질도 없이 들이닥쳐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닙니다. 전시 상황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지요.”

    “폐하를 만나 뵙기 전에, 백작과 먼저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것이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패티스는 하이에나들에게 레온과 함께 온 사자들이 머물 만한 곳을 안내하라 이르고, 자신은 레온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그곳에 앉고 나서 시종장을 비롯한 시종들이 들어와 간단히 입맛 돋울 음식을 차려 주고 다시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레온 님.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말씀 편하게 하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 올리세스가 이곳에 있나?”

    “예.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제도의 경계에서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최근이야?”

    “최근은 아닙니다. 몇 주 되었습니다.”

    “그럼 놈이 빠져나갔을 확률도 있다는 소리네.”

    “맞습니다.”

    레온의 지적대로 패티스 역시 올리세스가 이곳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도를 탈취하기 위해 정예군을 이쪽으로 다 보내도 모자란 상황인데, 벌써 며칠이 지나도록 쓸 만한 정예병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레온 역시 제도에 퍼진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었다. 피 터지는 전쟁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치열하게 접전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과는 다르게 제도가 조용했다.

    아무리 용의 참전으로 동맹군이 우세하게 됐다 쳐도, 이렇게까지 고요할 줄이야……. 폭풍 전야를 맞이한 것 같았다.

    레온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제국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이상한 소문이라니요?”

    “폐하께서 나자르인 오드 님을 납치하고 협박해, 자신의 황위 정당성을 억지로 취득했다는 소문 말이야.”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제도 밖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야. 아마 다 돌고 돌아 마지막에야 이곳에 도착할걸.”

    “…….”

    “어린아이들 사이에선 노래에 이런 괴소문이 가사로 실려 전해지고 있어. 전파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레온의 말에 패티스는 순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 방식은 자신이 과거에 썼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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