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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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온 오드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오드가 그에게 성력을 내려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물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죠?”
“네. 잘…… 모르겠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절 살려 준 분은 누군가요? 당신이 아니신가요?”
“명확하게 답하긴 어렵네요. 질문이 조금 모호해서.”
“왜 모호하다는 거죠?”
“이온. 당신을 죽지 않게 했던 건 내가 맞지만, 지금의 당신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건 내 덕이 아닙니다.”
오드의 대답에 이온은 골몰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정말 날 살린 사람은 누굴까? 난 대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난 거지? 그 생각에 점점 더 인상을 찌푸리는 이온을 보며 오드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푹 쉬도록 해요, 이온.”
“이카르 님에게 들었어요. 당신과 내가 친구였다고요.”
“지금도 친구예요. 아르세니온, 우리는 영원한 친구니까요.”
오드의 대답에 이온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이곳에 오고 나타니엘과 만난 이후로는 이온에게도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온은 식사 때를 제외하면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방에 갇혀 있다시피 지내는 이온이 안쓰러워, 어제는 이엘이 찾아와 그를 데리고 함께 산책을 나섰었다.
이온은 그때 이엘과 거닐었던 곳이 보이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한창 전쟁 중이라더니, 저택 안팎으로 이종족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온은 늘 오드의 방문이 끝나면 그 자리에 서서 밖을 하염없이 구경했다.
오드는 이온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자신이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의 침실을 나왔다.
“오드 님. 평온한 아침 되셨나요?”
“아,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신의 축복이 폐하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드 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오드는 침실을 나오자마자 이엘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도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노.”
“아…… 네…….”
오드는 손을 뻗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리노에게 따뜻한 성력을 부어 주었다. 그 덕분에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리노의 몸짓들이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차차 안정을 찾아가는 리노를 바라보며 오드가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온을 만나러 가실 생각이군요, 폐하.”
“네. 오늘은 이온과 리노를 만나게 해 주려고요.”
리노는 스완의 환각 능력 덕에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마주하는 오드의 성력이 조금씩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 증세를 보이는 건 여전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이곳에 그가 안정을 취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노에겐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엘은 오드에게 살짝 묵례하고는 이온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아르세니온. 들어가도 되니?”
“물론이야!”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웠던 건지, 이온은 직접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벌컥 열린 문 사이로 이온의 맑은 얼굴이 나타났다.
“어서 들어와, 나타니엘.”
“……황자님?”
리노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이온의 시선이 이엘에게서 리노에게로 옮겨 갔다. 그러나 이온은 역시나 리노를 기억 못 하는 건지, 그를 향해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할 뿐이었다.
“나타니엘. 이분은 누구신지 소개해 줘.”
“리노. 네가 직접 소개해.”
이엘은 그 말을 남기며 리노와 이온을 침실 안에 떠밀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졸지에 침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문 앞에 서서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먼저 정신을 차린 이온이 침실 끝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쪽으로 리노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와서 몸을 좀 녹이세요. 화로가 여기 있거든요.”
“…….”
“어서요.”
리노는 이온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의자에 앉았다. 그의 근처로 화로를 가져온 이온은 빙그레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몸을 앉혔다.
“리노 님이라고 하셨죠?”
“…….”
“들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리노 님에 대해 잘 몰라요. 제게 당신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리노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온을 한참 쳐다봤다. 리노 역시 오랜 시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온의 얼굴과 성격을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흐릿한 기억 속을 헤집으며 머뭇거리던 리노는 저를 끈기 있게 기다려 주는 이온의 배려에,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주 어릴 때 황실 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차자라 가문을 이을 수 없었던 데다가 형님이 많이 아프셔서…… 제가 가문에 남아 있게 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수 있었거든요. 마침 저를 좋게 봐주신 분이 계셔서, 그분의 소개로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이해했던 리노는 스스로 연구소로 향했다. 윌터 백작가는 대귀족에 속했기 때문에 아이가 둘 이상 존재해도 큰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어린 리노는 아픈 형님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소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곳은 삭막하고 무서웠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그들에겐 탐욕만 남아 있었고 인간 외엔 그 어떤 것도 생명체로 보지 않았다. 어린 리노는 두려웠지만 자신을 아껴 주었던 스승, 그 한 사람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테런스 포르. 늘 따뜻하고 자애로운 스승은 이종족을 인간처럼 생각해 주는 유일한 연구원이었다.
“연구소에서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제게, 어느 날 스승님께선 친구라며 한 사람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
“그게 바로 황자님이셨어요.”
스승인 테런스 포르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아르세니온 황자였다. 깜짝 놀란 리노의 앞에 아르세니온이 먼저 친근하게 다가왔다. 연구원에 또래가 없었던 리노는 금세 황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와 황자님은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듣게 되었습니다.”
“비밀?”
“황제 폐하께서 ‘그자’에게 부, 불로, 불로불사를 원하셨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것도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여기서 말하는 황제는 자신의 아버지인 선황을 가리키는 거겠지. 이온은 미간을 좁힌 채 조심스레 물었다.
“그자가 누군데요?”
“……목소리요.”
“목소리?”
“악마……. 악마 같은 목소리라고 했어요.”
사실 이온은 지금 리노가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애당초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리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온은 모르는 내용일 터였다. 하지만 뭔가가…….
“그리고 말했어요. 쌍둥이 중 첫째는 황녀라고…….”
“네? 황녀라고요? 그렇다면 폐하가 제 누님이란 말씀인가요?”
“모르겠어요. 산파를 잡아 왔다고, 그 여자에게서 답을 알아냈다고. 그렇게 말하던 중에 몰래 듣고 있던 저와 황자님이 놀라서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
“그렇게 전…… 잡혀갈 수밖에 없었어요.”
도망치던 리노는 걸음을 멈추고 황자를 먼저 도피시켰다. 둘이 함께 도망치다가는 둘 다 잡힐 것을 깨달은 탓이다. 불행 중 다행은 황제가 몰래 훔쳐본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리노는 저보다 어린 황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르세니온을 먼저 도망치게 하고 저 혼자 잡혀갔던 것이다.
곧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잡혀간 리노가 고문을 당하고 끝내 죽어 버렸으니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슬픔과 죄책감에 젖은 이온을 위로해 주는 건 테런스 포르, 리노의 스승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두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어린 꼬마였던 두 소년은 이제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재회했지만 한쪽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다른 한쪽은 이전의 기억을 전부 지워 버린 채다.
“언뜻 울었던 것 같아요. 그 무렵에 울었던 것 같은데…… 그게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해서였나 봐요.”
이온은 조금씩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맞춰 가기 시작했다. 리노의 죽음에 오열하며 엉엉 울던 자신의 모습. 그런 자신을 안아 주며 위로하던 성인 남성. 그렇게 단편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들 속에서 이온은 또 다른 기억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타니엘이 위험했어요. 그 애를 죽이려고…….”
아버지가 그 애를 죽이려고 했어……. 나타니엘은 무슨 이유로 옷장 안에 들어가 달달 떨고 있었고, 아버지인 선황은 검을 들고 그 앞에 선 상태였다. 새벽에 잠에서 깬 이온은 말리는 시종장을 밀쳐 내고 황녀궁으로 들어가 옷장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섰어요. 처음으로…… 처음으로 대들었어요. 나타니엘을 지키기 위해서…….”
검이 옷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아르세니온은 황제에게 무슨 말을 하며 그를 멈춰 세웠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었냐면…….
“나타니엘에게 손대지 마세요. 이 애가 죽으면 저도 죽을 거예요. 우리가 죽으면 아버지의 계획은 다 끝나는 거잖아요? 신탁도 깨지고 ‘그자’와 거래하려던 것도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라고요. 만약 아버지가 잘못 안 거라면요? 나타니엘이 첫째 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어요? 그 산파의 말을 믿을 수 있어요?”
그 말을 한 건 아르세니온이 아니었다.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온 이엘이었다. 그녀의 말에 이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뒤섞인 기억 속에서 비슷한 말을 떠올렸기 때문에.
“맞지, 이온? 네가 날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잖아.”
“나타니엘…….”
“그 자리에서 넌 아버지와 약속을 했어. 성년이 될 때까지 얌전히 지내다가 순순히 아버지의 제물이 되겠다고. 그러니 지금은 나타니엘을 건드리지 말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
“아버지는 그 조건을 듣고 고심했고, 끝내 수락했어. 하지만 감히 자신에게 덤빈 너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지.”
“그건…….”
“그 자리에서 널……. 사람을 불러 네 옷가지를 다 벗겨 버렸고, 누더기 같은 옷을 입혀 버렸어. 네 자부심이었던 황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빼앗아 농락했고, 나는 옷장 틈새로 그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옷장에 숨은 어린 소녀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빈틈 새로 보이는 학대의 현장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숨을 죽였다. 명령을 받고 다가온 하인들에 의해 강제로 탈의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옷으로 갈아입혀져,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 변한 쌍둥이의 모습에 이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 그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엘이 누군가 제 시중 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 게. 낯선 이의 시중을 받을 때마다 헛구역질을 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던 건, 다 옷장 틈새로 보았던 어린 날의 학대 현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