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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6화 (436/488)
  • 436화

    *

    “아이구, 아스타로 님. 오드 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저희가 언제쯤 오드 님을 뵐 수 있을까요.”

    “오드 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간교한 악의 무리들이 이곳에 당도하지 못하게 애쓰고 계신 것이지요.”

    “아스타로 님. 저희에게 성수를 주십시오. 그것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살 것 같습니다.”

    “형제님. 성수는 언제든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으니, 신의 뜻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아스타로의 말에 그곳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세스는 뒤에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제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황제는 자신이 제도를 공격하는 반란군에서 지휘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곳을 빠져나온 지가 언젠데. 검과 총으로 꾸려진 전쟁은 보여주기 식일 뿐이다.

    올리세스의 진짜 속셈은 황제의 연합군이 제도와 영지 곳곳의 전쟁에 신경 쓰는 동안, 인간들을 홀려 민심을 휘두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제도가 피에 물들어 더럽혀지면 더 좋고.

    “여기 우리의 작은 신께서 와 계십니다. 이분은 신의 부르심을 받아 여러분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포필렌을 탄 물을 나눠 주던 아스타로가 뒤에 있던 올리세스를 민중들 앞에 소개했다. 그들은 멀끔하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올리세스를 선망하듯 바라보았다. 올리세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와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었다.

    “이제 안심하세요. 제가 여러분을 이곳에서 구해 드리겠습니다.”

    “어, 어떻게…….”

    “제국을 휘어잡은 악한 무리들을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저 마녀 같은 여자에게서 여러분을 반드시 구해 내겠습니다.”

    “마녀……?”

    “황제 폐하가 마녀라고?”

    “그럴 리가…….”

    “폐하께선 분명 오드 님의 축복을 받고 즉위하신 건데…….”

    ‘마녀’라는 단어 하나만 흘렸을 뿐인데 사람들의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이를 이어받은 아스타로는 세 치 혀를 놀리며 사람들의 마음에 근거 없는 낭설을 심어 주었다.

    사실 나자르인 오드는 황제의 강압 때문에 억지로 그녀의 황위를 인정해 주었지만, 더는 신의 뜻을 위배할 수 없기에 사제인 자신을 보내 여러분에게 바른 교리를 가르치게 했다고.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관계없다.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건 끝나지 않는 전쟁의 연속이고, 그런 전쟁 통에서 자신들의 앞에 서서 지켜 주는 건 황제가 아닌 올리세스와 아스타로의 군사들이라는 것 외에는. 보이는 것만 믿기에도 버거운 현실이었다.

    올리세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점령해 간 곳들이 수두룩하다. 비록 대부분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던 제도를 탈취하는 데엔 실패해 그곳에 있는 제도민들은 제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지만, 그것도 곧 무너질 것이다. 원래 인간들은 마음이 가장 나약한 종족이니까.

    올리세스는 아스타로의 눈빛을 받아 다시금 사람들 앞으로 나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이런 벌을 받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그거야 신께서 저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주원인이 된 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

    “다 선황이 악마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에요.”

    악마라는 말에 모두가 기함한 듯 입을 벌렸다.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존재의 등장에,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자들도 나왔다.

    “선황이 살아 있을 때, 악마와 거래를 했습니다. 이걸 목격한 사람도 있어요. 바로 제 동생이지요. 그 애는 그걸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황궁에 끌려가 숱한 고문을 당했고, 종국에는 미쳐 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그날 껍데기뿐인 동생을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올리세스의 과장된 감정과 목소리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차 커졌다. 한순간에 똑똑한 동생을 잃은 형의 슬픔에 동화되어 갔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전쟁을 겪었고, 전쟁을 겪는 중이었다. 모두가 상실의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을 올리세스에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는 제 동생을 돌려받았고, 그 애는 제게 말하더군요. 곧 나라가 망할 거라고. 선황이 딸을 제물로 삼아 악마에게 바치기로 했는데 그러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선황은 자기 딸을 끔찍이 귀애했기 때문에요.”

    “맙소사!”

    “그 대가로 제국이 무너질 거라고 했지만, 당시에 저는 동생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르뷔 제국은 강했으니까요!”

    미쳐 버린 동생의 말을 믿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듯, 올리세스는 손을 제 가슴에 대며 아주 잠깐 흐느껴 우는 듯했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이내 아니라며 소리를 쳤다.

    “그게 왜 나리의 잘못입니까! 나리는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맞습니다! 잘못은 선황이 했습니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올리세스는 저를 감싸 주는 인간들을 조롱했다. 1제국 때는 이종족을 하위에 두고 황실의 권세를 힘입어 귀족이고 평민이고 관계없이 황제를 찬양했던 놈들이, 아주 조금 벌어진 틈 때문에 저렇게 처세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게 우습기 짝이 없다.

    “아무튼 선황은 황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2차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이종족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이럴 수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벌인 짓 때문에 신이 버리신 줄만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신께서는 슬퍼하는 저를 찾아와 제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사악한 황제와 이종족 무리들을 모두 없애고, 이 땅을 인간들의 전유물로 만들라고 말이죠!”

    올리세스는 제 말에 인간들의 눈동자에 광기가 일렁이는 것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아스타로가 말을 잘한단 말이야.

    그가 적어 준 내용을 그대로 읽었더니 이렇게 인간들은 마음이 동화되어 제 편이 되었다. 올리세스는 아스타로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다시 흐름을 이어받은 아스타로가 포필렌을 탄 물을 병에 나눠 주며 나긋나긋 설명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마녀 같은 황제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악마의 제물일 뿐이에요. 신앙의 힘으로 우리는 그녀를 밀어내고, 새로운 르뷔아 핏줄인 올리세스 윌터 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 올리세스 님이 르뷔아의 핏줄이셨습니까?”

    “그럼요. 윌터 가문은 황족에서 갈라져 나온 핏줄입니다. 방계라고는 하지만, 글쎄요. 저는 악마에게 현혹된 직계 황녀보다, 신의 부름을 받고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방계 귀족 나리가 더 황제답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별 얘기도 안 했는데 저희가 나서서 올리세스를 황위에 올리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올리세스는 그 모습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멍청한 인간들의 나약함을 마음껏 조롱했다.

    *

    이엘이 눈을 떴을 땐 아주 이른 새벽녘이었다. 그녀는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노아의 커다란 팔을 풀고 떨어진 가운을 주워 걸친 후에 침대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려고 했는데 예민한 노아가 품에서 사라진 그녀의 온기를 모를 리 없었다.

    “폐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미안해. 나 때문에 깼구나.”

    “원래 훈련할 시간이라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폐하를 모시느라 게을러졌지만요.”

    하품을 하며 웅얼거리는 노아의 말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엘은 기지개를 켜며 침실을 한번 둘러봤다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걱정을 알아챈 노아도 상체를 세워 일어났다.

    “황자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냐.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잘 모르겠어.”

    살아 움직이는 이온이 낯설다. 꿈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제 눈앞에 나타나서, 이엘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엘은 손으로 제 배를 쓰다듬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이온과 이 아이, 둘 중 누굴 지켜야 하는 걸까. 둘 다 지킬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눈이 번쩍 떠졌던 것이다.

    “제가 레온을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폐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레온 후? 아니. 그 이야기는 들어 보지 않았어.”

    “이쪽으로 오십시오. 날이 추워서 몸을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하셔야 합니다. 아기도 똑같이 추위를 타니까요.”

    노아는 말하기에 앞서 그녀의 건강부터 챙겼다. 그가 새하얗고 푹신한 이불을 들춰 올리며 아기 얘기를 꺼내니 이엘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고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가, 노아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얘기해 줘. 레온 후작과 처음 만났던 날.”

    “레온의 아버지가 연구소에 들어가 레온을 납치했지만, 그 애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 가장 친한 사이였던 제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레온을 맡겼습니다. 그때의 레온은 아주 어린 새끼 우논이었고, 저는 안정기를 막 지난 어린 우논이었습니다.”

    말은 제대로 할 줄 아는지 의심될 정도로 레온은 작고 어렸다. 새끼라고 쳐도 상당히 작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타이곤은 원래 다른 이종족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노아도 외관이 일고여덟 살 정도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루나는 레온에게 노아를 붙여 주었다. 비슷한 또래이니 우애 좋은 형제로 자라길 바랐던 듯했다.

    “그런데 절 보더니 꺄악 소리를 내지르며 울더군요.”

    “레온이?”

    “예. 아주 자지러지는 듯이 울어서 방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버지도 함께요.”

    이엘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진짜냐는 듯 재차 물었다. 노아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의 일을 가만히 회상했다.

    루나는 몸을 뒤로 뻗치며 기절할 것처럼 우는 레온을 품에 안아 들었고, 서둘러 남편 무어와 아들 노아를 방에서 내쫓았다. 졸지에 아이를 울려 버린 두 부자는 복도에 멍하니 서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나중에 레온에게 물어봤는데 자긴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저더러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냐더군요.”

    이엘이 폭소하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노아도 만족한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인지 오기가 생겼어요. 어떻게든 저 녀석과 친해지고 말겠다는.”

    “결국 바라는 대로 됐네.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됐으니까.”

    “예. 비록 다른 종족이지만 한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형제가 됐습니다.”

    “응.”

    “그래서 폐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녀의 고민을 어림짐작할 뿐이지만, 조금은 이해한다. 같은 피가 흐르는 쌍둥이 오빠를 외면할 수 없는 거겠지. 심지어 이쪽은 자신과 레온의 사이를 뛰어넘은 지독한 애착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노아는 이엘의 머리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안았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지금부터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

    “그게 제 방법이었거든요. 경계하는 레온에게 다가가 친해졌던 방법.”

    노아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엘의 이마 위에 입술을 도장 찍듯 여러 번 눌렀다가 뗐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배에 닿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듯, 테오도로가 있는 곳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폐하의 사람들은 모두 강합니다. 이 아이도 강합니다. 폐하와 저를 닮아서.”

    “응.”

    “그러니까 걱정 마십시오. 신께선 우리와 함께하시니까요.”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의 품에 조금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밖은 동이 터서 완전히 밝아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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