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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5화 (435/488)
  • 435화

    인간들이라고는 했지만 그게 정말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의 모습을 한 우논인지도 명확치 않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돌아갈 생각으로 조르단이 제 사병들에게 강하게 명령했을 때였다.

    “백작은 여전히 성급하시군.”

    커다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조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제는 백작이 아니라 공작이라고 해야 하나? 작위가 승격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게.”

    “당신은…… 설마 론 백작? 백작이십니까?”

    “나를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몇 달 전 황제로부터 자신의 외척 가문 사람들 중 생존자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덕에 간신히 론 가문을 떠올렸을 뿐이다.

    피에르 론. 이엘의 어머니이자 선황후였던 리카르디스의 숙부쯤 되는 사람이지만 론 가문과는 척을 졌다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다. 이엘의 외조부인 당시 론 후작과는 사상이 맞지 않아 몇 번씩 마찰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 가계도에서 제명되기까지 했었고.

    “살아 계셨던 겁니까? 그런데 어째서 폐하를 찾아뵙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찌 폐하께 나설 수 있겠는가.”

    “저희 모두 같은 처지였습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 폐하의 은덕으로 작위를 복권했을 뿐입니다.”

    전쟁 이후엔 이종족과 인간의 위치가 뒤바뀌었고, 자신들이 귀족으로 복권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와중에 르뷔아의 피를 이은 황녀가 나타났고, 세상은 다시금 인간이 고개를 들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됐네. 이제 더는 그쪽에 마음을 두고 싶지 않네. 정치라면 이제 신물이 나니까.”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다른 원로회 분들도 알고 계십니까?”

    “기억 안 나나? 제국이 다시 세워지기 전에, 내가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네만.”

    “편지라고요?”

    “조르단 백, 아니지. 이제 공작이랬지. 그렇다면 경어를 섞어야겠군요. 공작께서 폐하의 즉위를 반대하신다고 할 때, 누군가 공작께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말씀 편히 하십시오. 당신은 존경받을 만한 어르신입니다.”

    조르단의 말에 피에르는 짧게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내가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네.”

    “…….”

    “1제국 때 돌았던 소문. 귀족들 간에 파벌이 일었던 이유. 사실은 쌍둥이 황손 중 첫째는 황녀였고 둘째가 황자였다는 것. 선황이 뒤늦게 산파를 잡아들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했었다는 것. 그 모든 내용을 내가 그대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네.”

    그 편지의 주인이 단순한 원로회 소속도 아니고, 폐하의 외척 가문이었다니. 조르단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폐하의 어머니, 그러니까 선황후 폐하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이이네. 무엇보다 선황후 폐하께서 내게 황녀 전하를 맡기려고 하셨었지.”

    “맡기려고 하셨다는 건……,”

    “맞네. 내 가문으로 입적시키려고 하셨지.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황위계승권을 동등하게 갖는 쌍둥이. 하지만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첫째는 여자아이였고, 남자아이는 둘째였다. 계승권을 동등하게 갖기는 해도 첫째에게 정통성이 주어지는 게 맞다.

    하지만 첫째가 또 여자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얽히고설킨 탓에 귀족 간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황후는 그 모든 것을 차단하기 위해 쌍둥이가 태어나자마자 산실을 정리했다. 두 아이의 탄생을 지켜봤던 사용인들과 산파를 출궁시켜 달아나게 했고, 자신은 선황에게 거짓을 고했다. 첫째는 아르세니온이며, 둘째가 나타니엘이라고.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기 위해 나타니엘이 태어나고 직후에 숙부인 피에르 론에게 연락을 취했다. 제 딸을 숙부님의 가계에 입적시켜 주십시오. 어수선한 황궁에 아이 둘을 함께 둘 수 없습니다. 부디 숙부님께서 제 아이를 양녀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하지만 선황이 막는 탓에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지. 양녀로 들이려 했던 황녀 전하께서 내 영지로 오시는 날은 없었네. 그렇게 전쟁이 연이어 터졌고, 나는 죽음 속에서 겨우 도망쳤어.”

    젊어서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2차 전쟁 때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황과 론 후작가가 긴밀하게 결탁한 탓에, 론 후작의 눈 밖에 났던 피에르는 점점 더 정치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위치였다. 그 탓에 황궁과 그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즈음 해서 아내를 잃고 매일같이 술에 취해 지내던 피에르는 제 앞에 검을 들고 나타난 거대한 이종족의 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 흉흉한 눈빛엔 살기만 담겨 있었다. 이종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보호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2차 전쟁으로 가솔들이 모두 죽은 후였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것을 처음으로 기껍게 여겼던 순간이었다. 만일 황녀를 양녀로 들였더라면 그 자리에서 그녀도 잃었겠지.

    그러면서 동시에 황궁에 있을 가여운 황녀와 황자가 떠올랐으나 그때의 피에르는 목숨 구하기에 급급하여 제도를 버리고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끄러웠네. 가족과 가신들은 모두 죽었는데 혼자만 도망쳐 살아났다는 부끄러움이 폐하를 볼 수 없게 만들었어.”

    “…….”

    “폐하께서 만일 내 가문에 입적되시고 양녀가 되셨어도, 난 그 전쟁에서 폐하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네. 그분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이나 쳤겠지.”

    황녀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피에르는 뛸 듯이 기뻤으나 그녀의 앞에 나타날 순 없었다. 그저 이엘을 위해 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원로회의 반대파들에게 편지를 적어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즉위식에 참석해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피에르는 잠깐 입궁하여 어린 황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아주 작고 여린 황녀였는데 그날의 나타니엘은 당당하고 기품 넘치는 한 제국의 황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피에르는 용기를 얻어 그녀에게 접근하고자 했으나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 선 이종족들 중 하이에나를 보았던 탓에. 2차 전쟁 때 눈이 뒤집혀 모든 귀족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그 하이에나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피에르의 가문을 습격하고 그의 가솔을 모두 죽였던 종족이기도 했다.

    두려움에 눈도 마주칠 수 없어, 피에르는 또다시 숨어 버렸다.

    “그래서 제도민으로도 살 수 없었고, 그대처럼 당당하게 작위를 복권해 달라 요구할 수도 없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함께 폐하께 가시지요.”

    “그럴 순 없네. 나는 이 아이들을 버릴 수 없어.”

    그제야 피에르의 뒤에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이라고 해 봤자 대개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남자들이었지만, 다들 하나같이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포필렌에 중독된 아이들이네.”

    “포필렌이요?”

    “그대가 이곳 매음굴을 소탕했었지? 그때 탈출에 성공했던 아이들은 제도민이 되었지만, 그 전에 올리세스에게 빼돌려진 아이들도 있었네.”

    “그럼……,”

    “맞아. 포필렌을 실험한 대상이 이 아이들이야.”

    평생을 매음굴에서 지내다 겨우 자유가 되나 싶었는데, 이번엔 약물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저 애들은 태어난 직후에 전쟁을 겪고 사람답지 못한 삶을 지금까지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조르단은 주먹을 말아 쥐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르신.”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네. 아직까지는 전쟁의 피해가 이곳에 닿지 않은 듯하니.”

    “그래도 여기는 너무 위험하십니다. 저희가 다른 곳으로 피난시켜 드리겠습니다.”

    “제도까지 가는 길이 더 힘드네. 아이들은 아직도 포필렌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린 상태야. 이동은 힘들어.”

    “독수리가 있습니다.”

    “독수리?”

    “그들을 타고 가시면 됩니다.”

    조르단의 말에 피에르는 고민하는 듯했다. 아이들이 이종족을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잔티노로 옮겨 주겠다.”

    그때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다가온 르네가 말했다. 아이들은 르네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듯했으나 피에르의 예리한 눈빛은 달랐다. 그는 르네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공작님은 폐하의 궁수대장이신 르네 님이시군요.”

    “그래, 맞다. 더 이상의 통성명은 생략하고 세잔티노로 피난할 준비를 해라.”

    “르네 공. 세잔티노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거기로 피난해서 되겠소?”

    조르단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장 큰 피난처가 존재한다.

    “그곳 지하에 인간들이 숨을 만한 땅굴이 하나 있소. 이 정도 인원은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깊이가 깊어서 전쟁으로부터 안전할 것이오.”

    위치도 이곳에서 가까운 편이다. 게다가 세잔티노를 관리하는 건 동맹인 하이에나이니 큰 문제도 없을 테고. 피시처럼 제도를 거쳐 고니의 호수까지 갈 순 없겠지만, 일단 세잔티노 아래로 깊게 파진 땅굴까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조르단 역시 고심 끝에 동의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피에르는 뒤로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만 데려가 주십시오, 각하.”

    “넌 안 가겠다는 소리냐.”

    “저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작님. 안 가시겠다니요.”

    “나는 더 이상 백작이 아니니 그리 부르지 말게.”

    “지금 호칭이 중요합니까?”

    조르단의 언성이 커지자 인간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쓸데없는 시간을 이곳에서 버릴 수 없던 르네는 창공을 뱅뱅 돌며 감시하고 있는 독수리들을 불러 모았다. 거대한 독수리들이 하나둘 땅에 내려앉을수록 인간들은 저희끼리 붙어 덜덜 떨기만 했다.

    “일단 뒤에 인간들을 먼저 태워 보내도록. 엔리케, 이들을 세잔티노로 이동시키고 하이에나에게 사정을 말해라. 그러면 땅굴로 안내해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하.”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간들이 가지 않겠다며 소리를 빽빽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포필렌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라 저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미쳐 날뛰는 인간들을 지켜보다가 결국 르네가 피에르의 앞에 섰다.

    “네 몸에 폐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안다면, 제국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도 알고 있겠지.”

    “…….”

    “지금도 폐하께선 너희 같은 약한 놈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계신다. 그런데 넌 그분의 가계에 있는 주제에 함께 싸우기는커녕, 이렇게 시간만 지체하고 있을 것인가? 이게 네가 말한 부끄러움의 연장선 아닌가?”

    노인은 르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독수리의 말에 틀림이 하나도 없었던 탓에.

    부디 숙부님께서 제 아이를 양녀로 삼아 주십시오. 리카르디스의 간절한 필체가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감히 선황에게 거짓을 고하고 맞서 싸웠던 용감한 조카. 그런데 과연 나는 계속해서 부끄러운 삶을 살 것인가.

    “어르신. 함께 가시지요. 아이들에겐 휴식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곳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알겠네. 가도록 하지.”

    “그리고 폐하께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외척 가문에 생존자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이 아이들이 안정을 찾은 뒤에 폐하를 뵈러 가겠네.”

    피에르는 겁에 질린 아이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독수리의 등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그 역시 엔리케의 등에 올라탔고, 독수리들은 지체한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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