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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4화 (434/488)
  • 434화

    패티스의 말을 떠올린 스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땅굴의 통로가 이 성전 근처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끝은 세잔티노, 다른 한쪽 끝은 고니의 호수로 연결되겠지. 자신들이 사는 호수는 아무나 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갈 수 있는 방향은 한 방향뿐이었다. 세잔티노로 가는 것.

    하지만 그 많은 인원이 공기가 희박한 땅 아래서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세잔티노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하이에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을 보호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전력이 되는 하이에나 군단은 거의 대부분이 이곳 제도와 이엘이 있는 포르 자작령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결국 스완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력을 땅굴까지 최대한 밀어 넣어 숨이 모자라지 않게 시간을 늦춰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줘야지. 스완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손바닥을 바닥에 짚으며 눈을 감았다.

    가볍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성력이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힘이 넘쳐난다. 게다가 땅 아래 깊은 곳까지 성력이 천천히 번져 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스완은 빈센트가 죽었음을 이제야 실감했다. 아버지의 능력이 제게 정말로 다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다. 최대한 성력을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선 스완은, 평소에 오드가 홀로 사용하는 예배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직도 오드의 성력이 은은하게 남아 있다. 이곳이라면 드레인과의 만남이 쉬울 테니까. 한 번에 성공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이른 시간 내에 드레인에게 향해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스완은 눈을 감고 드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

    “공작님. 출정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르네의 막사로 들어온 엔리케는 제 주인의 착의를 힘껏 도왔다. 현재 독수리들은 조르단 공작과 함께 매의 근거지를 습격하기 위해 제도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온 상황이었다.

    제도군으로 주둔하고 있는 제 1기사단과 제 2기사단, 그리고 패티스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하이에나 군단들은 전부 정예병인데도 어쩐 일인지 계속해서 제도군이 밀리고 있었다. 역시 매가 그곳에 합류한 게 틀림없다.

    “엔리케 경. 제도로 보낸 정탐꾼들은 돌아왔나?”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매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젯밤 습격했던 매의 영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간신히 그들이 근거지로 사용하는 곳을 알아내 숨어들었지만, 이곳 역시 매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얘기는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소리였다.

    “공작님. 매들도 포필렌에 현혹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들은 예전부터 늘 우리의 대척점에 섰으니까.”

    이종족 중 일부가 또 올리세스에게 넘어갔다. 포필렌을 얕잡아 본 건 아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막강한 군단을 만들 줄은 몰랐다. 고작 약초 하나가 끌어올린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이, 인간과 이종족이 무기 없이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엔리케는 르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다. 2차 전쟁 때 저질렀던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엔리케 역시 르네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때 자신의 아들이 뱀과 결탁하여 가장 앞에 서서 수많은 인간 여자들을 죽였던 모습을, 엔리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르네와 같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엔리케가, 르네의 착의를 돕던 중에 그가 벗은 제복 안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원형 통을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꺼낸 엔리케는 미간을 좁힌 채 저가 쥐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한참 들여다보다가 답을 찾지 못해 주인에게 물었다.

    “각하.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무슨…….”

    “평범한 유리는 아닌 듯한데, 무엇에 쓰는 용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이종족에게도 감이라는 게 존재한다. 엔리케는 지금 자신의 감이 이 물건의 용도를 알아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걸 느꼈다.

    그러나 르네는 침묵했다. 그에게 엔리케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많은 조언을 얻는 존재였다.

    엔리케의 가문은 자신이 아주 어릴 때부터 가신이었고, 특히 엔리케는 조부의 참모이기도 했었다. 현존하는 우논들 중 르네가 가장 신뢰하는 우논이 엔리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르네는 엔리케의 질문에 침묵했다. 이게 정말 별것 아닌 물건이었다면 곧장 대답했을 그가,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했다.

    “각하.”

    “오드 님의 성력이 들어가 있는 물건이네.”

    “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것이다.”

    엔리케는 생략된 말들을 모두 이해했다. 왜 이 유리통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렀는지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건 마치 세잔티노를 습격했을 때 동족의 눈알들이 보관되었던 유리관을 연상시켰다.

    “그 준비라는 것은…….”

    “경도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

    “그리고 나는 그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눈을 내어드릴 수 있다.”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 늑대의 기름. 이엘은 더 이상 이것들을 쓸 일이 없을 거라며 단정했지만 르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 잘 짜인 퍼즐 판이 정답을 찾아가기 위해선, 저것들이 언젠가는 필요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내가 죽게 되면.”

    “…….”

    “경이 내 눈알을 꺼내서 폐하께 드리도록 하게.”

    “그럴 순 없습니다. 주인의 신체를, 설령 그것이 주인의 시체라 할지라도 감히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유언장이라도 써야겠군.”

    그렇게 말한 르네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야 엔리케는 그가 농담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쉽게 죽을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

    “예, 각하. 놀랐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 주고.”

    엔리케는 유리통을 르네에게 건네주면서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라는 여자를 만난 뒤로 르네가 바뀌었다. 똑같은 죄를 저지를까 두려워하며 동족의 동반자살을 생각했던 독수리의 수장은 인간 여자의 존재 하나로 가치관을 바꿨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랬던 르네의 입에서 나온 죽음이라는 단어에, 엔리케는 오랜만에 살이 떨렸던 것이다. 우논이라 죽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전제 조건이 평안한 상태일 때를 가정한다. 지금처럼 전쟁과 같은 상황이 닥치면 아무리 우논이라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죽음이었다.

    “경. 뭘 하나. 출정할 준비 안 하고.”

    “예, 가겠습니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서둘러 르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조르단 공작은 르네와 악수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는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 인간 남자였는데도, 인간 남자 특유의 거만하고 게으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엘이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엘은 즉위 직후에 조르단에게 암시장과 매음굴을 관리하게 했다. 워낙 지독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들이라 단번에 없앨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통제하에 두어 서서히 없앨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덕에 암시장으로 유통되던 포필렌의 전파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르네 공. 마음이 급하면 그대 독수리들은 제도로 가도 좋소. 여긴 우리 힘으로도 충분하니까. 매들은 이곳을 떠난 듯싶군.”

    조르단 공작의 말에 르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지는 이곳이 맞지만 정작 매는 보이지 않았다. 독수리의 부재를 틈타 제도로 갔을 거란 확신에 힘이 실렸다.

    “가지 않겠소. 일단 이곳을 확실히 확인하기 전엔.”

    “알겠소. 여기서부턴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저 숲 안에 뭔가가 있는 듯한데 함정인지 아닌지 파악이 어려워서. 보호석이 없는 건 확인했으니 그대들의 눈으로 봐 주었으면 하오.”

    조르단 공작의 말에 르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숲을 가만히 쳐다봤다. 녹음이 펼쳐져야 할 숲은 어둠에 좀먹힌 것처럼 온통 새카맸다. 르네는 숲 곳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르단에게 물었다.

    “혹시 예전에 저곳이 어떻게 쓰였던 곳인지 알고 있소?”

    “본래는 매음굴이 있던 곳이오. 그러다 작년쯤에 소탕해서 없애 버렸소.”

    “…….”

    “왜 그러시오? 그곳에 무엇이 있소?”

    르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곳엔 매가 아닌 인간들이 있었다.

    “민가가 있는 듯하군.”

    르네의 말에 조르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기에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으니 사실상 그 명령도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인간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숨었을 수도 있지만 올리세스의 사병들일 수도 있습니다, 각하.”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엔리케의 말에 르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이전에 매가 주둔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습격하면 사상자만 늘어날 거요. 나와 내 사병들이 확인하고 오겠소. 인간들이라고 했으니 이종족보단 우리가 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조르단의 말에 르네는 고민에 빠졌다. 숲에 모여 있는 인간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엔리케의 말처럼 올리세스의 사병일지도 모르지만 또 혹은 전쟁에 떠밀려 이곳까지 왔거나, 아니면 매음굴에서 도망쳤던 인간들이 귀소본능처럼 이곳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 하나 확단할 수 없었다.

    결국 조르단과 그의 사병들만 숲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대신 독수리들은 밖에서 눈으로 확인하며 엄호하겠다고 말했다. 조르단은 자신의 사병들에게 손에 든 총을 절대 놓지 말라 엄명하고는 다시 중앙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르네가 알려 준 곳까지 도착했는데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벌써 눈치채고 도망친 건가? 하지만 빠져나가진 못했을 텐데. 창공 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눈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조르단이 사병들을 멈춰 세우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허리를 숙여 땅에 귀를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얘기는 이동하고 있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소리인데…….

    “너희가 빠져나갈 틈은 없다! 모두 순순히 나와서 항복하도록 해라!”

    그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숲을 맴돌았다. 그런데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희가 누구의 앞잡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신과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죽음으로 갚아도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초로의 사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만큼, 조르단 공작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숲이 꽉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메아리치며 이곳저곳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만큼은 이종족보다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수색을 준비해라. 되도록 생포하는 쪽으로 진행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사살도 이해하겠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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