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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3화 (433/488)

433화

“물어보는 건 가능하지. 대답을 할지 말지는 내가 정하지만.”

“넌 이 열매를 가지러 네 동족에게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계획에 회의적이지 않았나?”

“말은 바로 해야지. 회의적인 게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던 거야. 애초에 난 너희 계획이 뭔지도 모른다고.”

태생부터 용은 자신이 아닌 개체에겐 관심이 없었다. 동족에게도 관심이 없는데 다른 종족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그저 킨은 심심했을 뿐이다. 이곳에 내려왔던 이유도 단순했다. 이엘의 비밀을 눈치챈 일부 용들의 비늘을 떼려는 밀로의 계획에 흥미가 동했을 뿐. 그래서 밀로와 함께 동족의 비늘을 떼어 이곳에 내려왔던 거였다.

“어쨌든 네가 지금 네 동족에 관해 술술 이야기하는 게 나로서는 꺼림칙하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거든.”

“…….”

“그렇다고 네게 무슨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닐 테고.”

패티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밀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킨은 지금, 밀로도 이엘에게 함구하고 있던 비밀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은 셈이었다.

밀로 자신은 동족에 한해서는 굉장히 폐쇄적인 편에 속했지만 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과거, 숨겨진 비밀을 타 종족에게 말할 자는 절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 내던 킨은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올리며 턱을 괴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서 바라보니 저 열매가 정말 하찮아 보인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미련과 욕심과 과거로 생각했던 ‘저것’을 이제야 비로소 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그는 긴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뗐다.

“나와 밀로가 ‘저것’을 갖고 여기에 내려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동족들을 재웠는지 가늠이 돼?”

“…….”

“저 열매는 정말 이상해. 한번 눈에 띄면 눈을 뗄 수가 없어. 저게 없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거든? 근데 또 이상한 건, 우리가 원래부터 ‘저것’에 미쳤던 건 아니라는 거야.”

신의 영역에 신과 함께 살 때는 이러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그 나무 곁을 지키는 암컷 용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 킨과 수컷 용들도 그들처럼 나무와 열매에 집착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봐. 너와 우리, 그 누구도 ‘저것’에 집착하지 않지.”

킨의 설명에 그제야 밀로도 눈치챈 건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맞네, 지금은…… 미련이 없어. 아니. 완전히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저것’에 관한 욕심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동족이 있던 곳에서보다는 욕구가 많이 줄어든 상태다.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저 열매’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황제가 ‘저것’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난 두 가지를 기대했어. 첫 번째는 너희가 ‘저것’을 신의 영역에 들고 가려 할 때, 나도 함께 가려고 했었지. 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

“두 번째는 ‘저것’이 정말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가져온 게 진짜 열매가 맞는지. 그리고 그걸로 정말 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지금처럼 죽은 상태가 아니라, 그때의 그 완전했던 열매의 모습으로 돌아올지.”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해야 이 지겨운 미련과 욕망과 과거를 훌훌 털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책임을 지고 ‘저것’을 신의 영역으로 가져가. 가져가서 죽은 열매를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해. 난 그걸 지켜봐야겠어.”

그게 수많은 동족들을 잠재우고 돌아온 자신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킨은 그렇게 설명했다.

*

떠날 준비를 마친 스완에게 패티스가 내민 것은 웬 과일 하나였다. 언뜻 사과를 닮았지만 스완은 ‘그것’을 넘겨받는 순간, 이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걸 들고 가.”

“이건……,”

“드레인이라면 바로 알아볼 거야, 그게 뭔지.”

패티스는 스완에게 넘겨준 열매를 바라보며 밤새도록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킨의 말에 의하면 수컷 용들이 ‘저것’에 강하게 집착했는데 그게 저주의 일종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내려오는 순간 그 욕구가 확 떨어졌다고 한다.

아무리 쳐다봐도 자신은 저 죽어 버린 열매를 먹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는 욕구는 들지 않는다. 이 세상의 것도 아니면서 성력도 느껴지지 않는 ‘저것’은 대체 뭘까. 왜 용들은 광증을 앓으면서까지 ‘저것’을 놓지 못했을까. 그 해답을 드레인은 알고 있을까.

“백작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용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

“넌 어떻게 생각해? 네가 들고 있는 ‘그것’ 말이야.”

“어떻긴요. 느낌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냥 차가운데요? 그리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네요.”

“그걸 갖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이걸요? 음, 글쎄요. 딱히 갖고 싶진 않은데요. 게다가 여기선 성력과 같은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걸요.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성력이 느껴졌는데 이건 전혀 아니에요.”

성력을 가진 스완도 ‘저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패티스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저게 가짜라면? 신의 열매고 뭐고, 사실은 그냥 평범한 열매였다면?

광증을 앓고 있다잖아. 그 광증이 저 열매로부터 시작된 건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시작됐던 건지 어떻게 알아. 광증으로 미친 용들이 평범한 열매를 훔친 거라면……. 그렇다면 폐하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땐 우리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 거지?

“백작님. 걱정 마세요. 그렇다고 이게 가짜 열매는 아니니까요.”

두려움이 번진 패티스의 표정을 읽은 스완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효력을 잃어서 이렇게 시든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건 신의 열매가 맞아요.”

“너도 거기서 성력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확신하지?”

“전 이게 있잖아요.”

스완이 열매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눈과 머리를 가리켰다. 그에 패티스가 짧게 탄식했다. 스완은 성력뿐만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됐다. 저주나 페널티가 걸린 문제라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지만 패티스는 스완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했다.

“이제 조금씩 구분이 돼요. 어떤 게 꿈이고, 환상인지. 그리고 어떤 게 진짜 예지인지.”

“오드 님만큼 정확히 보는 것도 가능해?”

“아직까진 조금 어려워요. 하지만 곧 가능할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뭐?”

“그래서 그분의 성력과 능력이 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느껴질 정도로.”

패티스는 제도로 돌아온 스완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이엘에게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제게 맡겨진 임무가 더 막중하게 느껴져서 철든 건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었는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패티스는 답지 않게 고민에 빠졌다. 스완을 위로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고민이 무색하게 스완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범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폐하와 황자님을 꼭 지킬게요. 저를 믿으세요, 백작님.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와 테오도로 님은…… 제가 지킵니다.”

“믿어. 그리고 그 대가로 내가 널 지켜 주겠다.”

“…….”

“예전에 네게 했던 말은 전부 취소야. 동맹이 널 죽이려고 하면, 내가 나서서 너를 지켜 주겠다.”

“……놀라운데요. 그 얘길 백작님이 하시는 게.”

기분이 묘했던 건지 스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하게 웃었다. 그러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뭔가를 꺼내 패티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제 깃입니다.”

“네 깃?”

“그 안에 성력을 응축해서 조금 넣어 두었어요. 혹시 모르니까 갖고 계세요. 그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예지 때문인가? 말을 아끼는 듯한 스완의 반응에 패티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의 깃을 받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새하얀 백조의 깃이었다. 보통의 이종족인 자신도 느껴질 만큼, 그 깃 안에는 어마어마한 성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스완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 떠나기 위해 패티스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했다.

“그럼 다시 뵙는 날이 오길 기도하겠습니다. 기왕이면 제가 이곳으로 나와서 백작님을 뵐 수 있기를 바랄게요.”

“약속했잖아. 네가 그녀의 능력에 갇혀서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나와 내 종족이 널 구하러 간다고.”

“…….”

“하이에나는 허투루 말하지 않아. 그러니 내가 널 신뢰하는 만큼 너도 날 신뢰해라.”

패티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스완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패티스의 모습에서 피시의 잔상을 느낀 탓이다. 생김새도, 말투도, 작은 습관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쌍둥이는 쌍둥이인 건지 어딘지 모르게 피시와 비슷했다.

스완은 고개를 끄덕이곤 황궁을 나왔다. 저 멀리 전쟁이 한창인 곳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밀로가 만든 천둥과 번개가 굉음을 내며 여러 번 땅에 내리쳤다. 스완이 쳐 둔 결계 덕에 제도군이 승기를 잡은 상태였지만, 그가 드레인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계는 사라질 터였다.

“드레인을 만나기 전에 올리세스의 낯짝이나 좀 보고 싶었는데.”

올리세스는 왜 보이질 않는 걸까? 분명 제도를 공격하는 쪽이 주요 군사라고 하지 않았나? 동맹군이 반란군 속에서 올리세스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 중이었지만 놈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작정하고 숨어 있다면 반란군을 모조리 죽이는 것 외에는 놈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안 돼. 피로 물들이면 안 돼.”

소모라를 겨우 정화했다. 뱀이 ‘그’를 불러들일 목적으로 더럽혔던 땅 소모라는 스완이 온 힘을 다해 정화했지만, 올리세스도 똑같은 짓을 벌일 계획인 것 같다는 피시의 말에 스완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그걸 어떻게 정화했는데. 내가 소모라를 정화하겠다고 목숨까지 걸면서 뱀의 영지로 들어간 건데. 거기서 정말 죽을 뻔했는데…….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이 터지고 있는 바로 저곳. 저곳이 1, 2차 전쟁 때처럼 피로 물들게 되면, 그곳이 소모라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올리세스를 찾아내야 했던 거였다. 하지만 스완은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직감하고 별수 없이 돌아섰다. 그를 찾는 건 제도군에게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스완은 아직까지는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제도의 성전 앞에 섰다.

“여기 아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거지.”

피시의 말에 의하면 하이에나의 영지인 세잔티노에서부터 제도를 관통하여 자신들이 사는 고니의 호수까지, 아주 긴 땅굴이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은 여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은밀한 장소였다.

패티스는 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준비하던 중 피시가 말했던 그 땅굴을 떠올렸다. 그곳이라면 제도민을 비롯한 인간들과 어린 이종족들을 피난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사력을 다해 그곳을 찾아 헤맸고 마침내 발견했다.

‘땅굴을 찾는 건 간신히 성공했다.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지만. 아무튼 전부 그곳에 피신시켰지만, 여기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야. 원래는 세잔티노로 보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으니까. 그냥 전쟁이 끝날 때까지 땅 아래에 숨어 있는 게 최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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