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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2화 (432/488)
  • 432화

    “나타니엘.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야.”

    “…….”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야. 이미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어.”

    “너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는 거야?”

    “네가 나라는 짐을 버려 내길 바라.”

    그렇게 대답한 이온은 이엘을 발코니에 두고 먼저 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온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던 이엘은 그 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이온은 눈을 떴다.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나. 조금 전에 발코니 밖으로 바라보았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눈에 담는 순간,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게, 심지어 보이지 않는 공기마저 자신을 반겨 주는 것 같다. 여기야말로 내가 살아야 할 곳 같았다.

    하지만 아니야. 나는 불순물 같은 존재야.

    “이엘…….”

    확실치는 않지만, 이엘의 눈을 마주한 순간. 이온은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희생해 자신을 살려 낸 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눈에서 희생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것이다. 무언가의 희생으로 자신은 살아남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무언가가 ‘나타니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러면 안 돼. 나 때문에 네가 희생돼서는 안 돼.”

    기억도 안 나는 쌍둥이 여동생. 자신과 사이가 좋았는지 혹은 관계가 나빴는지, 이온은 이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막연히 그녀를 지켜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이게 대체 무슨 마음인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보다 저 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리게 해야 한다. 내가 저 아이의 짐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어쩌면 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이엘에게 얘기했던 것과 반대로, 이온은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대체 내가 어떻게 죽게 되었고, 또 어떻게 살아난 건지. 알아내야겠다.

    *

    패티스는 평범한 과일처럼 생긴 ‘그것’을 노려보듯 한참 쳐다보았다. 축복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각기 모양도 다르고 색깔과 향, 맛까지 제각각이었지만 용들이 가져온 ‘그것’은 사과 같은 평범한 과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못 믿는 눈치네.”

    밀로가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은 채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의 왼쪽 눈꼬리 끝엔 전에 없었던 상처가 세로로 길게 나 있었다. 밀로의 말에 의하면 저걸 얻기 위해 벌였던 전투 때문에 생긴 흉터란다.

    반면 밀로와 함께 돌아온 킨의 상태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도 다치지 않은 멀쩡한 상태였다. 저건 뒤에서 관전만 했나? 앤디는 불퉁한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고 킨을 노려봤다.

    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내가 설마 폐하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데 거짓말을 할까?”

    “이게 정말 ‘그거’라고?”

    “맞다니까. 만져 보면 알 거 아냐.”

    밀로는 불신하는 패티스의 앞에 ‘그것’을 들이밀었다. 패티스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밀로의 얼굴을 지나쳐 그의 손에 들린 ‘그것’에 닿았다. 아주 잠깐 주저했지만 패티스는 손을 뻗어 ‘그것’을 건네받았다.

    차갑다. 첫 느낌은 그거였다. 마치 꽁꽁 얼린 것처럼 차갑다는 느낌. 그리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어린 우논 새의 깃털도 이것보다는 무거울 것이다. 크기는 성인 남자의 한 손으로도 겨우 쥘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지만 그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느낌도 없었다. 축복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도 신의 축복을 받은 나무이기 때문에 은은한 성력이 느껴졌고 그로 인해 신비로운 기운까지 전해졌지만, 패티스가 들고 있는 열매에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열매라서 그래.”

    “죽었다고?”

    “신의 영역을 벗어나면서부터 계속 그 상태야. 원래는 그러지 않았어.”

    밀로는 그렇게 설명하며 패티스가 들고 있는 ‘그것’을 주시했다. 왜 패티스가 저걸 보며 의심하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이렇게 보면 정말 평범한 과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그래서 용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잘못 가져온 게 아니냐고. 우리가 알던 ‘그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한편 도착하자마자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과실을 먹기 바빴던 킨은 이제야 양껏 먹고 만족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황궁이라고 해서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에 봤던 하이에나의 성보다 작고 소박해서 심심했다. 몇 시간이면 전부 둘러보고도 남을 크기였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들고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패티스와 밀로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더니 밀로의 옆자리에 앉으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네게 암컷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던 거야.”

    “뭐?”

    “암컷 용 말이야. 그녀는 성력을 사용할 수 있고, 그 능력 안에선 이게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역시 목적은 그거였나? 패티스 역시 이엘이 계획을 짰을 때부터, 킨이 비슷한 욕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신의 열매를 훔쳤지만 신의 영역에서 쫓겨난 수컷 용들. 그리고 그 권역을 벗어난 순간부터 죽어 버린 열매.

    이엘이 이 열매가 드레인의 능력에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패티스는 킨이 집요하게 드레인과의 만남을 요구했던 이유 역시 이 열매 때문이 아닌가 추측했던 것이다.

    “킨, 너도 이 열매를 쓰고 싶은 건가?”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럼 왜 드레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거지?”

    “그냥 궁금한 거야.”

    “…….”

    “우리가 훔친 이 열매가 정말 그 열매가 맞는지.”

    킨은 열매를 훔치기로 작전을 짜고 실행으로 옮겼던 용들 중 하나이다. 모든 수컷 용이 그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나서서 행동한 개체수는 적었다. 그중엔 킨처럼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초창기의 용들이 꽤 있었다.

    바로 옆에서 경험했다.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경이하고 아름다운 과정을 바라보며 신을 경애했다. 처음엔 경애로 시작했던 감정이었는데 어느 순간 욕심으로 변질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열매를 훔쳐 달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도망친 순간부터 이 열매는 죽어 갔다. 전에 보았던 그 아름답고 신비한 기운은 다 사라지고 평범한 과일만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때 ‘저것’을 버렸더라면 나았을까. 버리고 후회하며 신께 잘못했노라 빌었더라면 신의 용서를 받고 다시 그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용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생겼다. 싸움이 생겼고 인간들의 용어로는 전쟁 같은 세력 싸움도 몇 번 있었다. 그사이에 몸에 있던 비늘 하나가 색이 변하더니, 그걸 떼는 순간 깊은 잠에 빠져 버리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건 저주였다.

    게다가 저주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이주. 어느 한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정 시간이 되면 거주하는 곳을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저것’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용들은 ‘저것’을 미련이라고 불렀고, 욕심이라고 칭했으며, 버릴 수 없는 과거라 일컬었다.

    “그럼 너희가 잘못 훔친 것일 수도 있단 소리 아닌가? 그런 불확실한 것을 왜 확신해서 폐하께 말한 거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패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따졌다. 저건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이엘과 그녀의 아이의 생사와 관련된 일인데, 확실치도 않은 일에 도박을 하는 건 패티스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진정해. 가짜는 아냐. 내가 설마 폐하께 거짓말을 했겠어? 그리고 그게 가짜면 동족 놈들이 내가 이걸 훔쳐 가는 걸 가만히 두고 봤겠지. 놈들이랑 싸우느라 내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난 거 안 보여? 거짓말 아니라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무에 달린 걸 직접 딴 게 킨이야. 다른 건 몰라도 쟨 이런 데에서 절대 실수하지 않아.”

    밀로의 강한 어조에 패티스의 시선이 킨에게로 향했다. 저놈은 여전히 혼란만 야기하는군. 순순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타입이다. 그 생각을 읽은 킨이 피실 웃으며 두 손바닥을 패티스에게 보이더니 너스레를 떨 듯 가볍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우리는 살던 곳에서 쫓겨났고 저주를 받아 동족끼리 싸우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력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마저 빼앗겨 버렸고.”

    “…….”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훔친 ‘저것’이 별게 아닌 게 되어 버렸다면.”

    “…….”

    “거기서 오는 허무함과 탈력감이 우리를 미치게 만든 거지.”

    수컷들이 ‘저것’을 훔쳐 저주를 받은 시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림의 떡과 같은 ‘저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을지.

    쓰지도 못하는데 버리는 건 더더욱 못 하는 심정으로 바라만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시간을 맨정신으로 견뎌 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모든 상황이 용들을 극단적인 환경으로 몰아넣었다. 킨은 그때야 알게 된 것이다. 이것 또한 저주의 일부라고.

    “처음부터 신의 곁에서 살던 놈들이 신에게 버림받고 능력까지 빼앗긴 데다가 정처 없이 헤매는 삶을 반복해야 할 때. 게다가 너희 식의 계급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전부 우논뿐인데, 죽지도 않고 영영 살아가야만 하는데.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겠어? 우린 너희처럼 우논으로서의 생을 포기하고 노화하며 죽음을 택하는 것조차 안 되는 종족인데?”

    “…….”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신세에 성력은 빼앗겼지만, 이종족의 능력은 갖고 있고 여전히 용으로서의 위용을 떨칠 수 있는 것만 봐선 그리 큰 징벌은 아니었어. 신의 열매를 훔친 대가가 고작 그 정도라면 그리 큰 벌은 아니었지.”

    하지만 아니었다.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들 중에 가장 신과 가까웠고 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종족이 신에게 버려졌다는 건, 그런 단순한 처벌에서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광증을 앓는 개체가 생겼다. 처음엔 한 마리, 그다음엔 두 마리……. 다행히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용은 한 마리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이 컸기 때문에 종족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신의 손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던 용들 중 몇 마리가 광증을 앓고 날뛰자, 다른 용들은 별수 없이 그들의 비늘을 떼어 잠재웠다.

    그때 깨달았다. 비늘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겨난 비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저 비늘이 생겼을 때부터 예고된 미래였다.

    모든 게 자신들이 만들어 낸 죄의 대가였다.

    “고작 그 열매 하나가 종족 전체를 망친 거야.”

    킨이 말을 마친 후로 긴 정적이 흘렀다. 패티스는 들고 있던 열매를 테이블 위로 올려 두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것’을 한참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킨에게 닿았다.

    “킨. 네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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