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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1화 (431/488)
  • 431화

    이카르가 이엘을 처음 만났을 땐 이미 이엘이 온갖 풍파를 겪은 후였다. 복수와 슬픔으로 물들었던 그때의 이엘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슬픔이란 감정도 모르는 지금의 이온이 너무도 달랐던 터라. 그게 이카르를 씁쓸하게 만든 것이다.

    이카르는 닫힌 문 쪽을 턱짓하며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기억을 못 한대.”

    “뭐?”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더라고. 나타니엘이라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렸어.”

    “…….”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싶더군. 한쪽은 평생을 괴로워하며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식의 목숨까지 대가로 지불했는데, 다른 한쪽은 그 한쪽의 존재마저 지워 버렸다는 게.”

    기가 차고 비통했다. 이카르는 오는 내내 아르세니온에게 나타니엘과 리카르디스에 관해 설명해 주었지만, 아르세니온은 여전히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겠거니 싶으면서도 슬슬 두려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 제 어미와 쌍둥이 동생을 영영 떠올리지 못하게 될까 봐, 이카르는 그게 두려웠다.

    “노아. 폐하께선 괜찮으신 거냐?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계신다며.”

    “어. 피곤하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엔……,”

    “겁도 없이 짐이 없는 곳에서 짐의 이야기를 하는구나.”

    “헉…… 폐하!”

    갑자기 들려오는 이엘의 목소리에 이카르와 노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하트와 함께 나타난 이엘이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카르 백작. 그렇게 짐이 걱정되었으면 직접 찾아오지 그랬나.”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폐하.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됐어. 농담이야.”

    노아는 이카르를 보며 엷게 웃는 이엘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이엘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그러곤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다.

    “세 사람은 여기 있도록 해. 안에는 나 혼자 들어갈 테니.”

    “폐하. 괜찮으십니까?”

    다급하게 붙잡는 노아의 목소리에 이엘은 손잡이를 잡은 채로 멈춰 섰다.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

    “그는 내 하나뿐인 형제야. 내 유일한 혈육이고.”

    “폐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어떤 것? 아르세니온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오드가 말해 줬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어. 난 그런 걸로 실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

    그 말을 마친 이엘은 당황한 세 사람을 뒤로하고 객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이닥친 불청객의 등장에도 아르세니온은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이엘은 문을 닫고 그가 있는 침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몸은 좀 어때.”

    “조금 뻐근하고 무거운 것 외에는 좋습니다.”

    “그래.”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넌 누구냐고 묻는 아르세니온의 눈동자에 이엘은 침묵을 지켰다. 그걸 불허의 의미로 받아들인 이온 역시 입을 다뭄으로써 두 사람의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이엘은 그대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쪽으로 향해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아르세니온은 마치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그녀의 모습을 좇았다. 침묵은 이어졌으나 긴장으로 인해 잔뜩 얼어 있던 분위기는 조금 녹았다.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니?”

    “죄송합니다. 전혀 나질 않습니다.”

    “네 이름도?”

    “아르세니온.”

    “…….”

    “제가 있던 곳에 누군가 그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그게 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곳에 이름들을 적어 뒀지. 내 이름과 이온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었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당시에 오드를 제외하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엘은 혹여 제 이름을 잊어버릴까 바닥에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라는 글자를 적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 네 이름이야. 아르세니온 에르네스트 르뷔아. 그게 네 이름이다.”

    “그렇다면 나타니엘은 어디 있습니까?”

    “…….”

    “오는 길에 이카르 님이 그러셨습니다. 제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요. 나타니엘이란 이름을 가진.”

    이엘은 이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쪽에 있던 서랍장을 열어 뭔가를 찾더니 그걸 들고 이온의 앞에 섰다. 그러곤 그걸 들어 이온의 얼굴을 비췄다.

    “보이나?”

    “…….”

    “거울 속의 네 얼굴과, 네 앞에 선 나의 얼굴을.”

    이온은 이엘이 쥔 거울 너머에 존재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뺨과 코, 눈과 이마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이엘을 향했다.

    똑같다. 정말 소름 끼치게 똑같이 생겼다.

    “그렇다면 당신이…….”

    “어서 와, 나의 오빠.”

    “…….”

    “깊은 잠에서 깨어난 걸 축하해.”

    이엘이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이온이 그 손을 맞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키는 내가 더 크네. 오빠가 성장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해서 그래.”

    “정말로 네가…… 나의 쌍둥이 동생이야?”

    “응.”

    “…….”

    “기억이 안 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날 기억해 주길 바라.”

    “미안해. 정말 기억이 안 나.”

    “괜찮아, 아르세니온. 억지로 기억하지 않아도 돼.”

    이엘의 말에도 이온은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중한 가족을 만났는데도 이온은 벅찬 감동이나 설레는 마음 같은 게 없었다. 그렇다고 혼란스럽거나 당황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온은 자신이 이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이엘을 바라봤다. 자신을 쌍둥이 여동생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가벼운 실내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귀한 신분임을 직감하게 만드는 태가 났다. 아까 이카르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네 어머니는? 리카르디스는? 네 쌍둥이 여동생까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네가 황자였다는 것도 기억 못 하는 거야?’

    내가 황자였다고……. 그렇다면 나타니엘은 황제가 된 걸까?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계속해서 이엘을 바라보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니, 이온?”

    “이온……. 그게 내 애칭이야?”

    “응. 넌 나를 이엘이라고 불렀고.”

    “이엘…….”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이엘은 이온의 손을 잡고 발코니가 있는 곳으로 끌었다. 그녀를 따라 발코니로 나온 이온은 저 멀리 고요한 영지를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기, 이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에 관해 얘기해 줄래? 네가 말해 주면 내가 다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내가 다 얘기해 줄게.”

    이온은 그녀의 대답에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신기한 것을 보듯, 저택 밖의 저 너머를 바라보는 데 넋이 나갔다.

    무슨 기분일까, 이건. 딱히 애틋한 재회를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이엘은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는 제 쌍둥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까 이카르가 이온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침실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던 게 무색하도록, 이온은 제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이 새로운 세상뿐이다.

    나는 이곳에 올라왔을 때 두려웠는데. 내가 홀로 남은 여자라는 사실이, 나를 매일같이 괴롭히고 괴롭혔는데. 언젠가 ‘그’가 널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숨통이 조여 죽을 것만 같았는데…….

    너에겐 이 세계가 그저 신기하고 그저 새롭나 보구나. 왜일까? 넌 나고, 나는 너인데. 왜 이렇게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진 걸까. 네가 전쟁의 기억까지 모두 잊었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히 어떤 세상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넌 이렇게 기쁘게 웃을 수 있는 거니, 이온?

    “이엘. 저 사람은 누구야?”

    이온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발코니 아래였다. 그곳엔 노아가 서 있었다.

    “노아.”

    “노아?”

    “응, 나의 연인이야.”

    “네 연인? 그렇구나. 굉장히 멋있는 사람 같아.”

    그가 널 죽였는데 정말 기억을 못 하는구나.

    “내가 없는 시간 동안, 그가 너를 지켜 줬구나. 그렇지, 나타니엘?”

    “응. 맞아. 우리의 공백을 그가 채워 주었어.”

    “다행이야.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

    “나타니엘. 끝내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이온의 갑작스러운 가정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다. 기억해 내야만 한다. 이온, 너는 날 기억해 내야 해.

    “그럼 나타니엘. 너는 나를 버리는 거야.”

    “……뭐?”

    “널 기억도 못 하는 나 따위는 버리고, 영원히 네 곁을 지킬 사람들에게 가야 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온?”

    “아까 들었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이카르에게서 우연히 들었다. 말실수였던 건지 이온이 그게 대체 무슨 얘기냐고 몇 번을 물어도 이카르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피했다.

    “나는 네게,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야.”

    “아르세니온.”

    “나타니엘. 네 눈동자가 날 향할 때마다 젖어 있어.”

    “…….”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해서, 너는 슬퍼하고 있는 거야.”

    감정을 숨기려 했는데 그것도 이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나 보다. 이엘이 이온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쌍둥이인 그도 이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설령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말고. 그냥 나를 포기해, 이엘.”

    “…….”

    “내가 이곳에서 살고 싶어지지 않게, 내게 정을 주지 말고 그냥 나를 버려.”

    “이온.”

    “혹시나 내가 또다시 죽게 되어도 나에게 미련 갖지 말고, 죄책감 갖지도 마.”

    이온은 땅굴을 나와 이곳의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은 내가 원래 살았어야 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나완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나는 원래 이곳에 살아 있어선 안 되는 존재일 거라고. 이카르가 말했듯 누군가의 계략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그냥 불순물 같은 거라고.

    그러니 우리 둘 중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나타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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