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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30화 (430/488)
  • 430화

    “왜 이번엔 내게 목숨의 무게를 정하냐고 따지지 않지?”

    “…….”

    “나는 지금 네게 테오도로와 아르세니온을 비교하고 있다. 이카르, 네 대답은 무엇이지?”

    잔인하군……. 이카르는 그때 노아가 왜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이온을 죽이겠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노아에게 아르세니온은 그냥 나타니엘의 피붙이였을 뿐이다.

    마치 자신에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테오도로가 나타니엘의 피붙이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리카르디스 때도 그랬다. 임신한 그녀가 아이들 때문에 황궁을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이카르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깟 핏줄 때문에 여기에 영영 묶여 살 거냐고. 대체 아이가 뭐기에 기회를 버리냐고. 그때의 이카르에게 쌍둥이는 리카르디스의 피붙이에 불과했기에.

    “……그래서 노아. 네가 내게 원하는 게 대체 뭐야. 아르세니온을 죽이기라도 하라는 거야?”

    “아니지. 그건 신탁에도 어긋나고 ‘그’와의 계약에도 어긋나. 그래서는 다 틀어지니까 안 돼.”

    “그럼 뭔데.”

    “아르세니온에게 마음을 주지 마라.”

    “…….”

    “네가 나타니엘을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이카르는 이엘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아이인 이엘을,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하고 보호하기를 원했다.

    “그 감정을 아르세니온에게 똑같이 주지 말라는 소리다.”

    “그 얘긴 네가 황자를……,”

    “아니. 아르세니온은 내가 지킨다.”

    “…….”

    “나타니엘이 내게 부탁했어. 자신의 피붙이를 지켜 달라고. 그건 테오도로만이 아니야. 아르세니온도 포함이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나타니엘은 뒤로 숨기보다 앞에서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지켜 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짧은 생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 중에 하나라며.

    노아는 제 안온한 품에 그녀가 숨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제 품에서 숨만 쉬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엘은 늘 고개를 저었다. 이온으로부터 빚진 목숨을 헛되이 버리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노아를 붙잡고 칭얼거리지 않았다. 조금은 징징거리고 우는소리를 내도 되는데, 그러질 않았다. 앓는 소리를 조금만 냈어도 노아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했을 텐데, 이엘은 그러질 않았다.

    그랬던 나타니엘이 노아를 붙잡고 부탁했다. 지켜 달라고, 꼭 지켜 달라고. ……그렇게 말하면 반드시 지켜 낼 수밖에 없잖아. 네 부탁이 무엇이든 난 지킬 수밖에 없잖아. 그 생각에 노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니까 이카르 넌 나타니엘과 테오도로에만 집중해라. 나타니엘을 더 이상 리카르디스의 아이로만 보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리카르디스의 그늘에서 진작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카르는 조금 전의 제 모습을 반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이 이온에게 제 모습을 투영하며 바라보는 상황에서, 자신까지 두 사람을 ‘리카르디스의 아이’라는 하나의 존재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 그럼 황자를 데리고 오는 건 네게 맡기겠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합의점을 찾은 두 사람은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이엘과 오드가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이번 일은 이카르 백작이 오드와 다녀오도록 하게.”

    “예, 폐하. 다녀오겠습니다.”

    이엘은 다소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노아는 이카르를 힐끔 보고는 이엘을 부축해 침실 쪽으로 향했다.

    “이카르 백. 준비가 됐다면 갈까요?”

    “예.”

    마른침을 삼키는 이카르를 보며 오드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그는 이카르의 팔을 잡고는 성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땅굴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폐하가 십 년을 숨어 살았던 곳입니다.”

    음습한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오드의 뒤를 따랐다.

    “정말 여기에 황자가 있습니까?”

    “네.”

    “대체 어디에……!”

    “저기 보이네요.”

    한참을 걷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이카르는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오드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침대처럼 보이는 곳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천장을 바라보듯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이카르는 홀린 듯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게, 아르세니온……입니까?”

    “폐하와 닮았죠.”

    “…….”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걸까요?”

    오드의 물음은 제게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아르세니온이 눈을 떴기 때문에.

    “누구시죠?”

    새하얀 피부. 이엘보다 조금 아래로 떨어진 눈꼬리. 발끝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긴 머리카락.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

    “혹시 당신이 나타니엘이십니까?”

    “…….”

    “아니면 당신이 나타니엘이세요?”

    아르세니온은 손가락으로 이카르와 오드를 번갈아 가리키며 나타니엘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카르는 미간을 좁힌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르세니온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자신과 오드는 나타니엘이 아닌데 대체 왜…….

    “저는 언제부터 여기 잠들어 있던 건가요? 혹시 제가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요?”

    “…….”

    “당신들은 저를 도와주시러 오신 분들인가요?”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아르세니온에게서 떨어졌다. 극적인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이래서는 리노 윌터와 다를 게 없잖아.

    “제 이름은 아르세니온이 맞나요? 저기 바닥에 적혀 있었는데.”

    아르세니온이 가리키는 바닥엔 어린아이의 글씨부터 성인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또 일정한 필체로 글자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이카르는 단번에 그게 이엘의 필체임을 알아봤다. 그녀는 스스로와 이온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바닥에 이름을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

    그제야 이카르는 이 작은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곳은 이엘이 검을 잡고 훈련하던 곳. 또 저곳은 이엘이 책을 읽던 곳. 또 저긴 이엘이 기도하던 곳……. 곳곳이 그녀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나타니엘의 어린 시절이 이곳에 빼곡했다.

    이곳은 그 어린아이의 치열한 전쟁터였던 것이다.

    “당신들이 나타니엘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나타니엘이라는 분을 꼭 만나고 싶어요.”

    아르세니온의 목소리에 이카르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 안에 아르세니온이 완전히 들어왔다. 이카르는 알 것 같았다. 왜 나타니엘이 아르세니온을 제 분신처럼 생각했는지.

    살아 있는 아르세니온은, 살아 있는 나타니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노아와 대화하지 않았더라면, 이카르 자신도 아르세니온에게 홀려 그를 이엘처럼 여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카르디스의 아이들은 정말 서로의 모습에서 서로가 느껴질 만큼 꼭 닮은 쌍둥이였다.

    *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다. 처음 의심했던 건 하트였고, 그로 인해 이카르와 노아도 황자의 생존을 예감했다. 그리고 이엘에게서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까지 받아 냈다.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제 손으로 죽였던 선황의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노아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제도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알폰스가 노아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조금 전, 오드와 함께 떠났던 이카르가 인간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자작령으로 돌아왔다. 그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았다. 쌍둥이라고 해도 성별이 다른 쌍둥이는 완전히 닮기가 어려운데,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은 거울을 갖다 놓은 것처럼 똑 닮아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등장에 모인 모든 이종족이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세니온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건지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을 뿐이다.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카르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온을 보고 이엘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자세히 보니 얼굴만 닮았을 뿐, 그녀보다 키가 작았고 몸도 깡마른 상태였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이온의 모습에서 몇 년 전의 그녀를 느꼈다. 십 년을 꼬박 땅 아래서 살다가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의 마르고 작았던 그 소녀를.

    노아는 피곤함을 억누르며 알폰스를 향해 말했다.

    “괜찮다. 그보다 폐하가 더 걱정이야.”

    “아직 침실에 계십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노아의 시선이 저택 2층 어딘가로 향했다. 떠났던 오드와 이카르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이엘은 침실 문을 잡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황자…… 아니, 아르세니온은 어떻지?”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서 쉬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카르 님이 문밖을 지키며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리에 소음이 생길까 미리 차단하는 듯합니다.”

    “알겠다. 알폰스 경, 돌아가서 큰 소란이 생기지 않게 늑대들을 잘 다독여라.”

    “예, 각하.”

    알폰스를 먼저 돌려보낸 노아는 저택 입구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실에 가서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일지, 아니면 이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자신은 아르세니온을 찾아가는 게 좋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억하고 있을까? 16년 전, 2차 전쟁 때 저를 죽였던 사람이 나라는 걸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 이엘에게 말했듯 노아는 황자를 죽였던 그날을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타니엘을 닮은 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와 나타니엘은 다른 존재인데. 어째서…….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내가 왜 여기에…….”

    아르세니온을 생각해서였는지, 노아는 저도 모르게 황자의 침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를 발견한 이카르가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문 앞에 다다른 노아를 막아섰다.

    “공작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폐하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황자의 상태는? 식사는 잘 했나?”

    “몇 스푼 들었다가 전부 게워 냈습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먹은 게 없으니 소화도 어려운 듯합니다.”

    “축복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라면 괜찮을 텐데.”

    “그래서 그것을 조금 먹였습니다. 그 이후엔 오드 님께서 성력으로 기력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셨고요.”

    “…….”

    “여긴 제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공작님께선 그만 돌아가십시오.”

    노아는 이카르의 진지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이카르도 자신처럼 아르세니온에게 홀렸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예상외로 그는 평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노아의 생각을 눈치챈 건지 이카르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돌린 채 퉁명스레 물었다.

    “뭡니까.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제가 폐하를 등지고 아르세니온에게 갈까 봐?”

    “그런 게 아니다.”

    “아니긴, 눈빛이 맞는데. 약속했잖습니까? 아르세니온은 공작님께 맡기기로.”

    “…….”

    “닮긴 했지. 나도 처음 보고 놀랐다니까. 나타니엘이…… 나는 만나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나타니엘이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았거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이카르는 편하게 말하며 안쪽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냈다. 그는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시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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