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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9화 (429/488)
  • 429화

    “원래대로라면 스완은 저주 때문에 호수로 돌아가야 하고 거기에 영영 발이 묶이겠지. 다시 계약을 맺을 순 없으니까.”

    “그럼 드레인에게 가는 이유는…….”

    “맞아. 거긴 이곳과 다른 세계니까. 계약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가면 유효한 상태로 이어질 수 있지.”

    “확실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야.”

    냉정한 패티스의 말에 기가 막혔다. 앤디가 말한 확실하지 않다는 것엔, 잘못 시도했을 때 따라오는 부작용도 포함이었다. 자칫하면 테런스 포르의 두 딸처럼 드레인의 능력 속에 영영 갇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혹은 계약이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처럼 이엘과 생각을 공유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에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스완이 직접 그곳에 간다고?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폐하께서 허락하실 리가……!”

    “허락하셨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스완 때문에 앤디도 입을 다물었다.

    “그렇잖아도 그것 때문에 말할 게 있어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보자고 한 거야.”

    “폐하께서 우리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건가?”

    “예, 백작님.”

    스완은 패티스와 앤디를 한 번씩 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작게 웃었다.

    “이상하네요. 언젠가부터 이렇게 셋이 대화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스완.”

    “죄송해요. 쓸데없이 감성적이었죠? 그냥…… 그냥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조금 그래서요.”

    “마지막 아니니까 그딴 생각 하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

    “…….”

    “설령 네가 드레인의 능력에 갇혀도 어떻게든 빼 올 테니까. 걱정 마.”

    어떤 근거도 없는 패티스의 당당한 자신감에 스완은 피식 웃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저 하이에나가 확단하니 믿어 볼 만한 거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스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어 소식을 전했다.

    “폐하께서 황손을 가지셨습니다.”

    “뭐?”

    “뭐라고?!”

    “테오도로. 황자님이십니다.”

    “…….”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생겼어요.”

    스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손을 쥐었다가 폈다. 조금 전에 완전히 느꼈다. 제 손 안에 아버지의 성력이 모두 들어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저는 이 힘을 가졌으니까…… 꼭 성공할게요.”

    아버지가 죽었다. 빈센트가 제 할 일을 마치고 죽어 스러져 버렸다. 스완은 울컥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억지로 웃었다.

    “패티스 님. 약속 지키세요. 제가 갇히면 구하러 오셔야 돼요.”

    “약속은 지킨다.”

    “안심이네요. 타이밍도 좋고요.”

    그 말과 함께 스완이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쳤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됐다가 환해지더니 쾅쾅―! 하늘이 개벽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조금 전까지 앤디와 기사단이 공격을 퍼붓던 전장이었다.

    “갑자기 날씨가 왜…….”

    “심술궂은 놈이 돌아왔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스완의 말에 앤디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을 퉁기길래 스완이 성력이라도 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그럼 뭐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앤디는 무언가 생각난 건지 눈을 크게 뜨고는 서둘러 창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창을 활짝 열었다.

    “저건…….”

    “꽤 걸린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패티스도 그게 무엇인지 눈치챈 듯했다. 곧이어 쏟아지는 빗줄기는 폭우에 가까웠다. 이윽고 하늘 위에서 형체를 드러낸 무언가가, 소리를 지르며 피해 다니는 매들을 단숨에 꿀꺽꿀꺽 삼키는 게 여기서도 다 보였다.

    “……밀로.”

    밀로와 킨이 돌아왔다. 스완의 말처럼 좋은 타이밍에 돌아왔다. 신에게서 훔친 그 열매를 들고, 두 용이 돌아왔다.

    *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공작님은 폐하의 곁을 지켜야죠.”

    “…….”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폐하.”

    노아를 대신해 이카르가 자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세니온이 깨어났을지 모른다는 이엘의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이 이카르였는데, 지금의 그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눈에 담은 채 이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제 배를 조심스레 만지며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갖기 위해 ‘그’를 만났고, ‘그’는 약속대로 아르세니온을 돌려줬다. 솔직히 이번에도 헛소리로 자신을 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목소리’는 흔쾌히 아르세니온을 살려 주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지만 이엘은 이온이 있는 곳엔 가 보지 않았다. 갑작스런 만남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그녀를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정말로 이온이 깨어났을까? 정말…… 이온이 살아났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온의 심경은 어떨까? 자고 일어났더니 훌쩍 커 버린 제 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세상이 이렇게 변해 버린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날 잊은 건 아닐까?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넌 기억하고 있을까? 네 희생으로 살아남은 날, 넌 기억하고 있니?

    온갖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 떨어지곤 했다.

    “폐하. 아니면 제가 혼자 보고 오겠습니다. 아직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려우니까요.”

    “아니, 오드. 이온은 깨어났어. 느껴져.”

    “…….”

    “너도 알고 있잖아.”

    이엘의 말에 오드는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긴장한 듯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건 이카르였다. 아르세니온. 그는 리카르디스의 또 다른 아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카르의 마음을 벅차게 만들기 충분했다.

    “폐하. 필요하실 때 저희를 부르십시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엘과 오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노아는 두 사람만 그곳에 남겨 두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밖으로 나왔다. 닫힌 문 앞을 지키는 건 하트와 근위대에게 맡기고, 노아는 조금 전부터 가만히 있질 못하는 이카르를 불러 세웠다.

    “백작은 잠깐 나와 이야기하지.”

    “아르세니온 황자에게는 내가 갈 거야.”

    “그것 때문이 아니니까 일단 날 따라와.”

    노아의 심각한 표정을 읽은 이카르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비어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무슨 얘긴데 이렇게 따로 불러내서 하는 거야?”

    “넌 지금 이 상황이 행복한가?”

    “뭐?”

    “폐하께서 아르세니온 때문에 ‘그놈’과 무슨 계약을 맺었는지 잊었어?”

    노아는 깔끔하게 넘겼던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그간 눌러 참았던 것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

    “왜 ‘놈’이 순순히 아르세니온을 살려 줬겠어? 그것 또한 이용해 먹으려는 계략이란 걸 정말 모르겠나? 금서의 내용처럼 누군가를 쉽게 살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신과 그에 비등한 ‘놈’만 할 수 있다고.”

    오드의 성력으로 겨우 숨만 붙여 놓은 이온을 ‘그’가 살려 냈다. 나자르인 오드도 완전히 살리는 게 불가능했는데, 그걸 ‘그’가 성공시켰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게다가 완전히 살린 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가 원할 땐 언제든 이온은 다시 숨만 붙은 상태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이엘이 한번 이온을 만나 해후를 풀면 제 쌍둥이를 영영 놓지 못할 것을 알고. 어떻게든 그녀의 아이를 손에 넣기 위해, 또 한 번 이온을 이용할지 모른다.

    “나타니엘이 아르세니온을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다.”

    “알아. 리카르디스도 그랬으니까.”

    “아니.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감정보다 더 지독해.”

    “…….”

    “어미가 자식을 생각하는 건, 어쩌면 우리 이종족들에게서도 흔한 감정일지 몰라. 어떤 종족에 한해서는 비슷하겠지.”

    “…….”

    “하지만 나타니엘은 황자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있어. 자신의 과거를 황자에게 투영하고, 자신의 미래를 황자에게 투영하고 있다고.”

    마치 거울과 같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거울 밖의 자신과 거울 안의 자신.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행동하는 또 다른 자아. 나타니엘은 아르세니온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여러 상황이 그 어렸던 쌍둥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르세니온은 뭐가 됐든 새로운 파란을 불러올 거다. 그걸 알고 있다면 기뻐할 여유가 없을 텐데.”

    노아가 이카르를 따로 불러낸 건 그것 때문이었다. 아르세니온이 깨어났을지 모른다는 소식이 이곳에 있는 모두에겐 청천벽력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이카르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황자를 데리러 가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네게 선황후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에 나타니엘뿐만 아니라 아르세니온도 소중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네 입으로 황자가 살아 있든 죽었든, 그를 포기할 거라고 했던 말은 지켰으면 좋겠군.”

    “…….”

    “네 힘으론 황자를 지킬 수 없기에, 빠르게 포기하는 게 시간과 인력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분명 네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랬었다. 오드에게서 이온이 살아 있지도, 죽은 상태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겨우 숨만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당시의 이카르는 이미 이엘 때문에 우논으로서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온을 살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랬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르세니온이 아니라 나타니엘을 선택했다.

    “그 마음에 변함이 없길 바란다.”

    “노아. 그 얘길 내게 하는 이유는, 내가 설마 폐하를 등지고 황자에게 갈까 봐 걱정이 돼서인가?”

    “아니. 넌 폐하와 황자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면 폐하를 택하겠지.”

    “근데 왜.”

    “하지만 폐하의 아이와 황자 중에 택하라면?”

    “…….”

    “넌 아르세니온이 아니라 테오도로를 택할 수 있나?”

    노아의 말에 이카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두 사람의 목숨을 천칭에 올려놓고 각각 무게를 재고 있는 꼴을 되풀이하는 셈이었다.

    ‘폐하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해. 그게 설령 폐하의 피붙이라고 하더라도.’

    ‘네가 뭔데 목숨의 무게를 정해?’

    황자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이카르의 의심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노아는 황자를 죽이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때 이카르 자신은 뭐라고 답했었나. 네가 뭔데 목숨의 무게를 정하냐고, 분명 그렇게 말하며 노아에게 따졌는데.

    하지만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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