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늑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렬을 마쳤다. 그리고 일부는 자세를 낮추고 라니에로의 3기사단을 저희 등에 태웠다. 근 며칠 함께 싸웠다고 제법 합이 맞는 게 퍽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괜히 1, 2차 전쟁 이전의 모습과 겹쳐져서.
그런 앤디의 마음을 눈치챈 라니에로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주저하지 말게.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할 때가 아니야. 폐하께선 이것보다 더 큰 존재에 맞서야 하니까 우리가 시간을 줄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라니에로 역시 ‘그’의 존재를 알게 된 듯했다. 며칠 전에 로빈이 라니에로를 황궁으로 불렀는데 아마도 그때 얘기한 게 틀림없었다.
앤디는 고개를 돌려 체격이 건장한 라니에로를 쳐다봤다. 물론 이종족에 비할 순 없지만, 확실히 인간치고는 풍채와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어렸을 땐 배를 곯느라 코르넬보다 더 작았다고 하던데……, 어쨌든 지금은 누구보다 형형한 눈빛을 갖고 있는 사내라고 생각한다. 그의 다부지고 단단한 모습이 나쁘지 않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나.”
“아닙니다.”
“최대한 멀리 밀어 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계를 넘으려는 게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봐주지 말고 한 번에 처리해라.”
“예.”
앤디는 검을 꺼내 들고 테르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마찬가지로 라니에로의 곁으로 다가온 늑대 한 마리도 그의 앞에 허리를 낮추고 라니에로를 태웠다. 선봉에 선 두 사람의 공격을 필두로 3기사단과 1기사단의 연합군이 일시에 공격에 나섰다.
“올리세스를 잡아라! 올리세스를 찾아내!”
“절대 밀리지 마라! 흔들리면 안 돼!”
“대열을 유지해!”
정신이 없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올리세스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안광에 공허함뿐이었다. 분명 수적으로나 능력치로나 우세한 쪽은 기사단 쪽이었음에도, 의지 하나 없이 마치 시체처럼 늘어진 올리세스의 군단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빗발치는 총알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방어와 공격을 이어 가는 동안, 돌연 햇빛을 가릴 만큼 수많은 새 떼가 전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엔 매가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매들이 기사단을 낚아채 공중 위로 던지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머리 위로 들이닥치는 매의 발톱을 피하며 앤디는 주변을 둘러보고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는?!”
“조르단 공작님과 함께 다른 쪽 지원을 나갔습니다.”
제도에 합류했던 조르단 공작과 르네는, 원래 매가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지원을 나간 상태였다. 그 때만을 노리고 자신들의 영지에 남아 있던 나머지 매들이 득달같이 제도로 몰려든 듯했다. 앤디는 거대한 매들로 인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는 몰살당할지 모른다! 하늘을 조심해라!”
매의 사냥 방식은 끔찍할 정도로 악랄해서, 머리를 덮치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피하려 하면 늦는다. 이미 발톱에 찍혀 사냥당한 후일 테니까.
게다가 하늘에서부터 내리꽂는 속도는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그나마 앤디의 늑대들은 이전부터 매와 몇 번 접전을 벌인 적인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지만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저 멀리 늑대의 등에 올라타 진두지휘하고 있는 라니에로의 뒷모습을 보던 앤디는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장총을 끌어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공기를 찢을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날아간 총알은, 라니에로의 뒤에서 그를 낚아채려던 매의 다리를 뚫고 지나갔다. 꾸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젠장. 대가리를 쏘려고 한 건데 실패했잖아.”
역시 총은 손에 익질 않는다. 보호석이 막히면 총이든 검이든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엘에게 배우긴 했지만 총은 검과 달리 좀처럼 손에 익질 않았다. 앤디는 다시 장총을 뒤로 돌려 메곤 검을 빼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근접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한 번 타앙―!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앤디의 바로 옆에서.
“앤디 경. 총은 이렇게 쓰는 거다.”
앤디는 라니에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 옆에 툭 떨어진 매를 발견했다. 정확하게 목을 꿰뚫고 지나간 총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앤디는 죽은 매와 라니에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전쟁이 끝나면 라니에로에게 총 쏘는 것부터 배워야겠다. 그런 생각에 여념이 없을 무렵이었다.
“꾸에에엑!”
“으아악!!”
“아악!”
갑자기 올리세스의 진영 쪽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앤디와 라니에로를 태운 늑대들의 발이 멈췄고, 두 사람의 시선 역시 그곳을 향했다. 아주 새하얀 빛이 반짝거리더니 순식간에 매와 인간들이 양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마치 결계가 있는 것처럼…… 어? 결계?! 앤디의 눈동자가 커졌다.
“엄호해!”
앤디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늑대들을 정렬하고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결계다. 저 새하얀 빛을 어떻게 잊겠는가. 한번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빛인데.
“애, 앤디 님! 저게 뭡니까?!”
“결계잖아. 성력이 안 느껴져?”
“오, 오드 님이요?!”
“오드 님보다 좀 약하지?”
알쏭달쏭한 앤디의 말에 늑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옆에서 늑대를 타고 함께 달리던 라니에로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엷게 웃었다. 오드보다 약하지만 성력을 쓰는 사람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질 않나.
“빨리 좀 와! 장난해?! 귀빈 마중이 이 모양이어서야 되겠냐고!”
“성질은 여전하군.”
“라니에로 님이야말로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하는 건 여전하시네요.”
스완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뒤로 넘기자, 분홍빛 머리가 햇빛에 반사돼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앤디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하늘을 뒤덮고 있던 매 떼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스완이 펼친 결계가 하늘과 땅에 있던 적군을 모두 밀어 낸 모양이었다.
오드처럼 멀리 밀어 내지는 못했지만, 기사단이 목표하던 거리 정도로 벌리는 것엔 성공했다. 앤디는 빙긋 웃으며 스완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를 칭찬했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더 늘었네.”
“당연한 거 아니야?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앞으로 더 강해질 거니까 기대해도 좋아.”
“돌아온 걸 환영한다, 스완.”
“고작 나 하나 없다고 제도가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으랬더니 그새 점령당한 거야?”
“무슨 소리야. 점령당하긴 무슨! 아주 잘 수호하고 있었거든?”
“됐고, 난 패티스 님이나 뵈어야겠어. 백작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줘.”
“숨 좀 돌리고 가. 패티스 님은 내일 봐도 되잖아.”
“시간이 없어.”
앤디는 스완의 얼굴에서 낯선 기색을 읽었다. 늘 여유 부리며 느긋하던 백조에게 조급함이 보였던 것이다. 혹시나 이엘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 아닌지, 돌연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앤디는 늑대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리곤 저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스완의 앞에 대기했다.
“타. 데려다줄 테니까.”
“알폰스 등 타고 가도 되는데?”
스완을 데려다주러 여기까지 함께 왔던 늑대들이 있었다. 알폰스는 앤디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하곤 저가 황궁까지 스완을 옮기겠다고 말했으나 앤디가 거절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패티스 님께 모셔다 드릴 테니, 잔말 말고 빨리 타.”
뭐야, 갑자기. 스완은 툴툴거리면서도 앤디의 등에 올라탔다. 이렇게 등에 탈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확실히 우논들은 다르다. 알폰스도 그렇고 앤디도 그렇고, 그동안 매번 자신을 태웠던 로날드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로날드는 테르이기도 했고 등에 누굴 태워 본 적이 거의 없던 터라 매번 불안하기만 했는데.
아. 로날드. 어찌나 정신이 없었으면 그 천덕꾸러기를 잊고 살았다.
“그러고 보니 로날드는 잘 지내고 있어?”
“그래. 저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어.”
“다행이네. 나랑 피시 없다고 토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피시 님은 괜찮아? 유클리드가 탈출시켰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응. 리노 윌터도 함께 탈출시켰어.”
“놈은 어때?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일단 패티스 님이랑 있을 때 얘기할게. 할 얘기가 좀 많아.”
급속도로 진중해진 스완의 목소리에 앤디도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날쌘 발에 속도를 붙여 약속한 대로 누구보다 빨리 황궁에 도착해 주었다.
입구에서 내린 스완은 황궁 곳곳을 둘러보며 눈에 담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마지막이란 생각을 자꾸만 지울 수가 없어서. 자신의 생을 쥐고 있는 신께서, 자신의 남은 생을 어떻게 끝내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스완은 미련처럼 저가 머물렀던 황궁 안을 바라보기 바빴다.
“뭐 해? 안 들어와?”
“갈게.”
앞서 걷던 앤디는 이젠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간 스완은 오랜만에 보는 패티스와 마주쳤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왔군, 스완. 어서 와라.”
“귀환 보고와 파견 보고를 한꺼번에 합니다.”
“뭐? 파견? 네가 파견된다고?”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던 앤디가 끼어들며 물었지만 스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어딜 또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성력을 손에 쥐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눈에 스완은 여전히 철없는 백조였다. 포식자에게 사냥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대체 얘를 어디에 보내신다는 겁니까? 이번엔 저도 가겠습니다. 제가 안 된다면 로날드라도 붙여서 보내십시오.”
“진정해, 앤디 님. 로날드나 앤디 님은 못 가는 곳이니까.”
“거기가 어딘데.”
“용.”
“뭐?”
“암컷 용이 있는 곳.”
“…….”
“드레인에게 가려고.”
아주 잠깐 정적이 일었다. 갑자기 웬 용? 드레인에게 왜 가겠다는 거야, 이런 상황에? 앤디는 무슨 일인지 몰라 방황하는 표정으로 스완과 패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궁금증은 이어진 패티스의 설명으로 종료됐다.
“스완과 폐하의 계약이 곧 끝난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