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일라이저 러셀 후작.”
“말도 안 돼. 왜 제겐 말씀도 없으시고 갑자기……. 저는 이종족이라 제외된 겁니까?”
“그게 아니라 러셀 후작이 먼저 부탁했어. 아이가 생기기 한참 전에.”
“저는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부터 그 생각을 했는데요.”
“그대가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대의 마음을 알아?”
“젠장. 늦었네요.”
꽤나 상심이 큰 건지 이카르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구시렁거렸다. 이엘은 노아와 눈을 마주쳤다가 웃음이 터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어쨌든 이카르 덕에 얼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녹은 셈이었다.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그만 쉬라는 이엘의 명령에도 이카르와 노아, 그리고 하트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스완의 능력이 끝나고 문이 열릴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올 때쯤에서야 굳게 닫혀 있던 객실의 문이 열렸다.
“스완!”
“들어오세요, 폐하. 다들 들어와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스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네 사람을 맞았다. 이엘은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뒤로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와 리노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멍한 상태로 객실 안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였다.
“어떻게 됐어? 리노의 상태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발작도 없었고 조금 전까진 말도 잘했어요.”
피시가 다가와 차분하게 설명하며 이엘의 걱정을 덜었다. 처음엔 스완의 능력이 먹히질 않아 고생깨나 했다던데, 어느 순간부터 환각 속으로 빠져든 리노는 약물과 고문에 묻혀 있던 기억의 길을 걸어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아직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인 것 같아요. 오드 님의 성력으로 안정을 취하고, 끼니도 잘 챙기면 금세 회복될 거예요.”
“고마워, 스완.”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이엘은 그대로 걸어가 리노의 앞에 섰다.
“리노 윌터.”
평소보다 낮고 강한 목소리의 이엘이 리노를 불렀다. 줄곧 멍하게 벽만 바라보고 있던 리노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알아보겠어?”
“…….”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이엘의 질문에 리노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환각인지, 리노는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리노 윌터. 날 잘 봐.”
“…….”
“정말 날 모르겠어?”
어느 순간 리노의 시선이 홀리듯 이엘에게 붙박였다. 누구지? 누군데 날더러 자기를 아냐고 물어보는 거야? 당황과 불안함, 그 사이에서 방황하던 리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 위로 제 손을 뻗었다.
“폐하.”
“괜찮다.”
감히 황제의 얼굴에 손을 대려 하다니. 근위대장인 하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빼 리노를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엘이 그를 말렸다.
그녀는 제게 다가오는 리노의 손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손을 잡기까지 했다. 리노는 제 손을 잡은 이엘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낯이 익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야. 누구지? 대체 누구였지?
“아직도 날 모르겠느냐.”
“누구…… 헉! 서, 설마 황, 황자님……?!”
“반은 맞고 반은 틀렸구나.”
웃음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리노가 그녀에게 잡혔던 손을 홱 뺐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씩 눈을 깜빡거리며 이엘을 쳐다봤다.
닮았다. 정말로 황자님을 닮았어. 어린 시절의 그 황자님이 자라면 꼭 저렇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황자가 아니었다. 황자님이 아니라…….
“설마…… 설마 황녀님이십니까?”
“그래. 내 얼굴에 아르세니온의 얼굴이 남아 있나 보구나. 네가 알아본 걸 보니.”
“화, 황녀님을 뵈, 뵙습니다…….”
“됐다. 격식은 그쯤 해도 되니 바닥에 주저앉지 말렴.”
스완의 환각으로 겨우 과거의 조각난 기억들을 조금씩 그러모았을 뿐이다. 아주 단편적인 것들 사이에서 리노는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한 이엘이 그를 칭찬하며 위로했다.
“리노. 이곳은 안전하단다. 내가 너의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마.”
“……여, 여긴 아스타로가 어, 없습니까?”
“아스타로?”
“사제의 이름입니다.”
노아의 설명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짜란다. 여긴 그가 올 수 없어. 진짜 나자르가 여기에 있으니까.”
리노는 이엘이 바라보는 쪽을 따라 응시했다. 그곳엔 은빛 머리카락과 신비롭게 느껴지는 벽안을 가진 남자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단번에 그가 나자르임을 알아차렸다. 리노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숙여 오드 쪽으로 자세를 낮췄다.
“나, 나자르 님…….”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리노.”
“여, 여기는 어딘가요? 제가 드디어 신의 곁으로 온 건가요?”
‘드디어’라는 단어에서 그동안 리노가 얼마나 괴로운 생을 보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고통스러운 나날에서 벗어나 차라리 죽기만을 기다렸겠지. 아무래도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닌 모양이다. 스완의 말처럼 아직까지는 기력과 체력의 회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천천히 치료를 진행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이엘의 신호를 받은 오드가 그에게 성력을 불어넣어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옆으로 쓰러지는 리노를 받아 낸 피시는 그를 침대 위에 다시 눕혀 주며 이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이런 식으로 포필렌을 끊어 내고 성력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면 금세 회복될 겁니다.”
“응. 피시. 네 영지에 돌아가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하지만 며칠만 이곳에 머물러 줄래? 리노가 너만 알아보는 것 같아서.”
“물론이에요. 처음부터 폐하의 곁에 남을 생각이었는걸요. 제 영지에 있는 나머지 하이에나들도 모두 이곳으로 오는 중이에요. 저희는 폐하와 함께 싸울 겁니다.”
피시의 말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시선이 피시의 옆에 선 스완에게로 닿았다.
“스완, 넌…….”
“저도 떠나야 할 시간이에요.”
“…….”
“그래도 떠나기 전에 폐하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태어난 아이도 만나 줘. 네 힘이 필요해, 스완.”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제가 반드시 폐하와 아기님을 지킬 테니까요.”
이엘은 스완에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스완의 손을 제 배에 갖다 댔다. 아직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스완은 그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를 느꼈다. 말할 수 없는 벅차오름이 스완을 감싸 안았다.
“이름은 테오도로. 남자아이야.”
“황자님이군요.”
“그 애의 친구가 되어 줘, 스완. 그 애가 나처럼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미리 수영을 알려 줘.”
“그럴게요. 제 호수에서 황자님에게 수영을 알려 드릴게요.”
“응.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나.”
스완은 이엘의 말을 들으며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역시 호수를 떠나길 잘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겠단 핑계로 그곳에 계속 있었더라면 한평생 후회했을지 모른다.
스완은 걱정과 염려로 뒤범벅된 피시의 얼굴 위로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에, 시선을 창밖 너머로 향했다.
“스완?”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올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
“제도에 다녀올게요.”
제도라면 현재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그렇잖아도 그곳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대를 꾸릴 예정이었던 터라 이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알폰스. 남은 늑대들로 정찰대를 꾸려라. 스완을 그곳에 데려다주고 너희는 그쪽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와.”
“알겠습니다.”
“스완. 조심히 다녀와. 곧 보자.”
“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떻게 걱정이 안 되냐고 말하려던 이엘은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스완을 보내 줘야 할 시간이 왔다.
*
“앤디 님!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방어만으로는 버티는 게 고작입니다. 그냥 한 번에 밀어 버리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오합지졸로 몰려드는 적군을 상대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앞에서 진군하는 놈들은 죄다 변변찮은 무기를 손에 쥔 인간들이었다. 약 때문인지 광기를 보이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으나 사실상 전쟁이라기보단 숫자로 밀어붙이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보호석으로 능력이 막히긴 했지만 총을 들고도 조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상대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사령관을 맡은 앤디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된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그 명령을 듣는 이종족의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 후작님. 오셨습니까.”
잠깐 자리를 비웠던 라니에로가 복귀했다. 그의 등장에 시끄럽던 진영이 조용해졌다.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앤디를 대신해, 늑대들 중 하나가 라니에로에게 상황을 전했다. 그는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냉랭하게 답했다.
“고민하지 말고 밀어내.”
“하지만……!”
“앤디 경. 지금 뭘 하고 있지?”
“…….”
“종족에 연연하지 말고 공격해.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겨우 피난시킨 제도민들이 다친다. 경이 보호해야 할 자들이 누군지,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라니에로의 호통에 앤디는 입술을 깨물며 수긍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니에로는 2차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일라이저와 코르넬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쟁을 두려워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어느새 장성해 이렇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는 게……. 앤디의 기분을 묘하고 심란하게 만들었다.
“앤디 경. 검을 들게.”
“후작님.”
“이번에 끝내지 않으면 전쟁은 반복될 것이다.”
“…….”
“경도 알고 있지 않나?”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이 제도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곳이었다. 게다가 앤디와 늑대들은 막중한 사명감을 갖고 4년 전부터 이엘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그토록 바라던 근위대의 자리까지 놓으면서.
‘앤디 경. 제도민을 포함해 제국의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예? 폐하! 저희가 어떻게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어요? 불가능합니다.’
‘인간도 이종족과 같아. 다를 게 없어. 오히려 더 약하지.’
‘하지만……,’
‘약속했잖아. 늑대들이 나의 검이 되어 주기로.’
‘…….’
‘나를 천칭으로 생각하고, 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가차 없이 검으로 내려치기로. 나와 약속했잖아, 앤디.’
이엘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밝혔을 때.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늑대들에게 그 역할을 맡아 달라고 했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고 공정한 검이 되어 인간과 이종족의 균형을 맞춰 달라고.
건국 초에 이종족과 인간의 균형을 맞춘 건 1제국의 황녀 나타니엘이었지만, 그 균형의 주체가 지속될 리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바뀔 테고 언제든 이엘에게 대항하며 나서는 자들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동족끼리도 하나가 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립하던 종족들을 한데 묶어 놨으니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그림이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늑대들이 필요했다. 인간과 이종족 모두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야 했다. 강하고 공정한 검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 이엘은 늑대들과 인연을 끊은 척 그들을 뒤로해야 했던 거였다.
“앤디 님. 어떻게 할까요?”
라니에로의 호통 이후에 늑대들은 라니에로와 앤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작위는 라니에로가 더 높지만 앤디는 자신들의 주인이었고 이곳의 사령관이다. 그의 허락이 떨어져야 공격도 가능하다.
앤디는 주먹을 꾹 쥐었다. 적절한 방어와 적절한 공격이 필요한 시점이다. 라니에로의 말처럼 그들이 지켜야 할 인간들은 저들이 아닌, 요새로 피한 제도민과 각 영지의 피난민들이었다.
“전군 공격 준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