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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6화 (426/488)
  • 426화

    무리의 강력한 리더를 잃은 하이에나들은 처음엔 그 분노의 화살을 피시에게 돌렸지만 그것도 일시적이었다. 분노도 그럴 만한 가치가 되는 존재에게나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원흉이 따로 있는데 암컷들 틈에서 겨우 살아남은 약해 빠진 수컷 하이에나 따위에게 관심을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종족은 쉽게 와해됐다. 모든 종족이 무리의 수장을 잃고 암컷을 잃었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크게 무너진 하이에나는 종족이라는 의미 자체를 상실했다. 그 속에서 피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독감에 날이 갈수록 더욱더 미쳐만 갔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익숙해져야만 하는 감정이었음에도 좀처럼 익숙해지질 못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동족도, 소문만 듣고 자신을 대놓고 흉물 보듯이 쳐다보는 타 종족도, 심지어 제게 같은 피가 흐르는 것조차 끔찍하게 생각하던 쌍둥이들까지도. 죽느니만 못하던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런 무관심한 세계 속에서 제게 손 내밀던 구원자를 만났다. 나타니엘은 피시에게 그런 존재였다. 모두가 잊어버린 자신을 모두에게 드러내 알려 준 사람.

    피시 자신도 스스로를 지워 가고 있을 즈음에,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만들어 준 사람. 그래서 그녀에게 그토록 집착하고 매달렸던 건데.

    “넌 내 친구잖아. 종족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자고 했던 건 피시 너였잖아.”

    “…….”

    “내 아버지와 너의 친구 시모네가 친구였듯, 우리도 친구가 된 거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네가 죽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해?”

    ‘친구’라는 스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피시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렸고, 변명만 늘어놓던 스완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쟨 왜 갑자기 우는 거야……. 누군가를 위로할 줄 모르는 스완은 당혹에 젖어 그 자리에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고마워, 스완.”

    “뭐가. 사실상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네게 제대로 말한 것도 아니었는걸.”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 일인 건지. 스완은 멋쩍게 제 뒷머리만 긁적여 댔다. 그러곤 손을 뻗어 피시의 등을 서툴게 도닥거렸다. 그만 좀 울어…….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던 스완의 눈가도 어느샌가 붉어져 있었다.

    “그래도 앞으론 함부로 예지에 관해 말하지 마. 너도 저주를 받으면 어떡해.”

    “알겠어. 이젠 그러고 싶어도 못 해.”

    “무슨 말이야?”

    “나 곧 계약이 끝나.”

    “무슨 계약…… 아.”

    “폐하와의 계약 말이야. 뭍에서의 5년이 이제 몇 주 안 남았거든.”

    맙소사. 백조가 계약 덕분에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피시는 멍청한 제 머리를 탓하며 미간을 좁히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 그럼 어떡해? 다시 호수로 돌아가야 되는 거야?”

    “거기 말고 드레인에게 갈 거야.”

    “드레인이라면…… 용? 용에게 간다고?”

    “응. 거긴 이쪽과 시간의 흐름이 겹치지 않으니까 계약도 끝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위험하잖아.”

    피시도 드레인의 능력 속에 갇혀 있는 두 소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수년째 잠든 상태였다. 그러니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스완도 그곳에 갇히면 어떡하나.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난 폐하의 아이를 지켜야 하고, 드레인의 부탁도 들어주어야 해. 호수에 머무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스완은 호수에 묶여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제 종족을 떠올렸다. 특히 제 아버지 빈센트. 성력이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걸 사용할 수 없었다. 미래를 볼 수 있었음에도 친구 하나 살리지 못했다. 스완은 아버지처럼 호수에서 시간을 죽일 순 없었다.

    “사실상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피시.”

    “…….”

    “네 말대로 위험할지도 몰라. 어쩌면…… 아니야. 이런 말은 안 할래. 아무튼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꼭 만날 거야. 우리 둘 다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만났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야.”

    둘 다 예전과 달라졌다. 늘 대책 없이 저 좋을 대로 생각하던 스완은 이제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책임감을 생각하게 됐고, 늘 자신 없이 숨어 지내던 피시는 이제 저가 뱉는 말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스완은 피시를 바라보다가 제 손을 내밀어 피시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말없이 눈을 감더니 성력을 피시의 손에 불어넣었다.

    “너무 미약해서 느끼지도 못하겠지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이 성력이 조금이나마 네게 힘이 되어 주길.”

    “고마워, 스완.”

    그 손을 맞잡으며 피시가 맑게 웃었다. 스완도 속이 후련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피시 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리노 윌터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피시는 스완과 시선을 교환한 뒤, 서둘러 문을 열고 근위대의 안내를 받아 이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근위대가 안내해 준 곳은 쓰러진 리노 윌터의 침실이었다. 의외로 그 안엔 이엘과 오드, 그리고 노아와 하트뿐이었다. 피시와 스완을 데리고 왔던 근위대 역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것으로 보아, 인간인 리노가 이종족들을 보고 놀라지 않게 배려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피시, 스완. 이쪽으로 와.”

    이엘이 손짓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피시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리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라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다만 피시를 알아본 건지 침대에서 뛰어내려 와 피시의 뒤에 제 몸을 숨기며 벌벌 떨었다.

    “역시 그대는 알아보는 모양이군.”

    침묵을 깬 건 노아였다. 몇 달 전 올리세스의 마을에 머무르며 리노의 상태를 살폈던 노아는 그가 자신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돌아간 뒤에 포필렌을 다시 복용한 탓인지 재회한 리노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저렇게 피시의 뒤에 숨는 걸 보면 그나마 최근에 마주친 피시는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피, 피시…… 여, 여기는 어, 어디, 어디야……?”

    “리노. 괜찮아, 여긴 안전한 곳이야.”

    “아, 안 돼. 여기 있으면 안 돼! 위험해!”

    “진정해, 리노. 여긴 안전해.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이곳이 녹색 탑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리노는 당황한 건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곤 허옇게 질린 얼굴로 피시의 손을 이끌어 침실을 나가려 했다. 저렇게 두었다가는 예전처럼 또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노아가 그를 붙잡으려 할 때였다.

    “잠깐만 자리를 비워 주세요, 폐하.”

    스완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가 능력을 사용해 볼게요.”

    “성력?”

    “아니요. 제 종족의 고유한 능력이요. 환각이 제 능력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스완이 환각을 사용하는 고니였음을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다. 사실 그 능력은 성력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이었는데도. 스완이 여러모로 큰 전력이란 걸 다시 한 번 느낀 노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나? 저번처럼 위험하진 않겠지? 폐하께서도 네 능력에 나오지 못하고 갇힐 뻔했잖아.”

    “그거야 그땐 드레인이 끼어들어서 그런 거고. 지금은 괜찮아. 그냥 기억을 파헤쳐서 각성시킬 생각이니까.”

    노아에게 대충 대답해 준 스완은 다시금 허락을 구하듯 이엘을 쳐다봤고, 그녀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리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리노는 피시의 등 뒤에 숨은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 모습 위로 이온과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얼비쳤다. 잦은 학대와 감금으로 상처 입은 게 표면적으로 드러난 겉모습이 다가 아닐 것이다. 아마 속은 더 엉망이겠지.

    “이것 또한 리노 윌터가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예요, 폐하. 그리고 저희에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잖아요.”

    주저하는 이엘의 마음을 눈치챈 스완이 꽤 강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마침내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아. 스완과 리노만 남겨 두고 모두 이곳을 나가자. 피시. 너도 여기 남아 리노의 불안을 덜어 주도록 도와줘.”

    “알겠습니다, 폐하.”

    결국 커다란 객실 안엔 스완과 피시, 리노만 남겨 놓고 모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스완의 환각 능력은 대단하고 경이로웠지만 그만큼 엄청난 위험성이 따른다. 그건 직접 겪어 봤던 이엘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물론 스완의 말처럼 그땐 드레인이 끼어드는 바람에 상황이 좋지 않았던 거지만…….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노아에게 안에서의 상황을 듣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이카르가 걱정스럽게 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폐하, 괜찮겠습니까? 리노 윌터는 꽤 중요한 인물이잖아요. 잘못해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어떡합니까.”

    “괜찮아. 근본적으로 스완의 능력은 공격용보다는 방어용에 가까우니까. 게다가 지금은 성력도 쓸 수 있는 상태라 리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예전의 나처럼 능력에 갇혀서 못 깨어나거나 하진 않겠지. 다만…….”

    “다만요?”

    “……과거를 마주해야 하는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린 이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스완이 리노를 각성시킨다는 건, 리노가 고문과 포필렌으로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들춘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게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엘 역시 스완의 능력 속에서 만났던 어린 이온과 어머니의 모습을 거의 일 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으니까.

    “인간은 강하니까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견뎌야 하고요.”

    이카르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엘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확신에 찬 말투였다. 그는 시선을 내려뜨리곤 이엘의 배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꼬리까지 말아 올리며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불안해하시면 배 속에 계신 황손께서도 걱정하실 겁니다.”

    “……그렇겠구나.”

    이카르는 이엘이 배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처음엔 놀랐었다. 나타니엘이 아이를 가졌다니. 리카르디스의 아이가 자라서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는 게, 이카르로서는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카르는 다른 우논들처럼 오랜 시간을 산 것도 아니었으니 인간의 생의 속도가 자신과 다르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느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우논으로서의 긴 생을 포기하고 인간처럼 늙어 가다 죽는, 끝이 있는 삶을 선택했다. 이엘의 곁에서 그녀의 보호자로 살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직은 우논으로서의 모습이지만, 이 전쟁이 끝나면 평범한 인간들처럼 나이를 먹으며 노화가 진행될 터였다. 그러면 인간의 생과 속도가 비슷해지겠지.

    보통 우논이 영존하는 삶을 포기하고 죽기를 소망하는 이유엔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에 대한 허망함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혹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로 인한 괴로움 때문이거나.

    그런 것을 고려하면 사실 이카르의 선택은 좀 특별한 경우에 속했다. 이카르는 살아온 시간이 우논치고는 매우 짧은 데다가, 그렇다고 이엘을 이성적인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카르에게 이엘은 가족 그 이상의 존재였으니 이것 또한 사랑의 일부라면 일부일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생의 속도는 이종족과 비교할 수가 없기에 매 순간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엘과 생의 속도를 맞추기로 결정한 이카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역시 매분매초가 소중했다. 그러니 나타니엘의 아이를 만나게 될 미래가 얼마나 설레겠는가. 벌써부터 기대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이 리카르디스의 배 속에 막 생겨났을 때도 이카르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는 어려서 힘이 없었기에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체인 나타니엘도, 아이인 황손도 모두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꽤나 대부의 자리를 바라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는 이미 폐하께서 정해 두셨소.”

    뒤에서 지켜보던 노아가 제복 망토를 벗어 이엘의 어깨 위로 덮어 주더니 이카르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이카르는 전혀 몰랐던 건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이엘을 향해 채근하듯 물었다.

    “예?! 사실입니까? 누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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