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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5화 (425/488)
  • 425화

    “숙부님께 물어봤지만 어머니에 관해선 말씀을 아끼시더군.”

    “그러셨군요.”

    “뜬금없이 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만 잔뜩 들었어.”

    “아버지라면…… 발레리안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발레리안……. 그 이름을 가졌던 남자.”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자와 호랑이는 앙숙 관계였다. 같은 포식자라는 계층을 가진 것 이외에도 능력이나 외향이 겹치는 탓에 접점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나 대대로 무리의 수장이었던 린다의 가문과 발레리안의 가문 사이는 말할 것도 없이 지독했다.

    1르뷔 제국 시절엔 어린 이종족의 우논들 중 작위를 승계할 만한 후계자들은 인간들처럼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었는데, 린다와 발레리안 역시 그 아카데미를 다녔다고 한다.

    장녀였던 린다는 타고난 기질 덕분에 일찌감치 소후작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지만, 발레리안은 가문에서도 천덕꾸러기였단다.

    “아카데미 시절엔 두 분이 경쟁 상대였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아카데미를 같이 다니셨군요.”

    “종족끼리도, 가문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아카데미에서도 소문난 앙숙이었다고 했어.”

    어쩌다 두 사람이 연구소에 끌려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숙부의 입으로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숙부의 종족은 어머니 쪽인 사자였음에도 호랑이인 아버지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혹시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숙부님께 저에 대해 말씀하신 게 있습니까?’

    ‘린다 님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후작님.’

    ‘…….’

    ‘하지만 발레리안 님에 관해서는 아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숙부께서 다른 종족인 아버지에 관해서 아는 게 있단 말입니까?’

    ‘발레리안 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레온은 이 초상화를 받았던 그날, 숙부에게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딱 한 번. 린다 님의 안부를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지?’

    ‘후작님께서 태어나신 직후일 겁니다.’

    레온이 태어난 직후라면, 레온은 아직 연구소에 있고 두 사람 모두 연구소를 탈출한 후의 일이란 소리다.

    ‘은밀하게 저희 영지에 찾아오셔서 제게 린다 님의 안부를 물어보셨는데, 때마침 린다 님께서 경비를 서기 위해 저택을 나오셨다가 저희를 발견하셨습니다.’

    ‘때마침?’

    ‘예. 저는 자리를 피해 드렸기 때문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두 가문은 앙숙이었고, 조금 전에 숙부께서도 두 분의 사이가 나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아카데미에서의 일이니까요.’

    ‘…….’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알 수가 없으니 추측할 뿐입니다.’

    ‘…….’

    ‘어쩌면 두 분의 사이가 알려진 것만큼 나쁘셨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을요.’

    아카데미 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고 말한 게 자신이면서, 숙부는 끝에 쓸데없는 말을 붙였다. 그 탓에 레온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레온은 평생 부모를 저주하며 살아왔다. 자신 같은 괴물을 낳은 것에 대한 원망과 연구소에 버리고 떠나 버린 것에 대한 원망. 그리고 결국엔 단 한 번도 제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죽어 버린 것에 대한 원망.

    ‘발레리안이 널 버렸을 리가 없잖니, 아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다 절 버렸어요. 저를 연구실에 버린 거예요!’

    ‘레니. 무어와 나는 발리의 오랜 친구란다. 그는 우리에게 널 맡겼어. 널 연구실에서 빼내 우리에게 맡긴 거야.’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발레리안을 다시 만나러 가자꾸나. 가서 아버님이라고 당당하게 부르렴. 넌 분명한 그들의 아들이야.’

    언젠가 노아의 어머니인 루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발레리안의 오랜 친구였던 노아의 부모는 그가 자신들에게 맡기고 떠난 레온을 친아들처럼 아끼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 부모가 저를 버렸다며 엉엉 울던 레온에게 늘 발레리안의 다정함을 설명했지만, 어린 레온의 귀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버지가 날 연구소에서 탈출시킨 거라면. 사실은 어머니 역시 날 기억하며 살았던 거라면. 어쩌면 두 사람이 레온을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던 거라면…….

    “사실 이번에 쉬러 가면서 저도 알아본 게 있습니다, 각하.”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을 깨운 건 란트의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는 고심 끝에 레온에게 이야기하기로 결정을 내린 듯한 표정이었다.

    “경이 뭘 알아봤다는 거지?”

    “린다 님에 관해서요.”

    “…….”

    “후작님께서 제게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본가로 돌아가 어른들께 린다 님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린다 님께서 실종되신 적이 한 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뭐?”

    “그분들은 당시에 린다 님의 행방을 몰랐던 분들이라, 린다 님께서 연구소에 끌려가 아이를 낳고 돌아온 것도 모르셨습니다.”

    “…….”

    “다만 사자들 중 린다 님을 모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그분이 실종되셨다고만 생각한 듯합니다.”

    “그 얘기는…….”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그 이후에도 연구소에 가신 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하여…….”

    비극을 입으로 전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란트는 제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끝말은 흐린 채 입을 닫고 말았다. 레온의 얼굴은 참담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의 말은 어머니께서…… 나를 낳고 도망친 이후에 연구소로 또 끌려가셨단 건가?”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끌려가신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가셨던 것일 수도 있고요.”

    “…….”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란트의 말처럼 확실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건 변함이 없었다. 레온은 창백해진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마치 막혀 있던 둑을 누군가 억지로 뚫는 바람에 물 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만큼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

    “선대 후작님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딸이니 닮으셨을 겁니다.”

    “그런 어머니가 한 번 붙잡혔던 일에 똑같이 당하셨을까?”

    “…….”

    “난 아니라고 생각해. 직접 들어가면 들어갔지, 잡힐 사람은 아니야.”

    강단 있는 레온의 말에 란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다. 린다라고 하면 사자 종족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한 암컷이었다.

    원래 사자들은 암사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지만 이쪽도 작위의 승계는 수컷에게만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건 암사자의 몫이었다.

    그게 프라이드라고 불리는 사자들의 사회망을 뜻하는데, 린다는 당시의 모든 암사자들이 선망하는 프라이드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래서 선대 후작도 특별히 린다에게 승계권을 주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주 영리했고 매우 민첩했다. 레온이 말했듯 한 번 실수한 것은 절대 반복하지 않았으며 명예로운 죽음을 누구보다 갈구했던 암컷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암컷이었기에.

    “그럼 린다 님께선 왜 다시 연구소에 들어가셨을까요?”

    “그걸 알아봐야겠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긴 하지만.”

    레온은 며칠 전 포필렌 금단 현상으로 인해 보았던 린다의 환상을 떠올렸다.

    ‘대신 나는 널 위해 살게, 아가. 내가…… 어떻게든 널 이곳에서 빼내러 올 테니까, 꼭 버텨. 조금만 버티렴, 레온. 금방 데리러 올게.’

    어쩌면 어머니는 정말 자신을 데리러 오기 위해 직접 연구소로 돌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도 힘을 합쳤고, 결국 레온을 탈출시키는 데에 성공했던 것일지도.

    “이건 내가 숙부를 협박해서라도 알아내야겠어.”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각하를 힘껏 돕겠습니다.”

    “괜찮겠나? 그러다 경이 내 숙부의 미움을 사면? 그대의 가문과 내 숙부는 꽤나 친밀한 사이이지 않나.”

    “저는 제 가문보다 각하가 우선입니다.”

    “…….”

    “그러니 포필렌 복용을 줄이시고, 불면증이 오시면 저와 나드를 찾으십시오.”

    저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란트를 빤히 보고 있으니 언젠가의 이엘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각하. 저희는 당신을 친애하고 경애하기에 충성할 겁니다.”

    “…….”

    “각하는 외톨이가 아니십니다. 저와 나드가 각하의 가족이 되겠습니다.”

    이엘이 황제가 되기 전. 레온이 사자와 호랑이의 왕으로 존재하던 그때에 그의 영지에 머물렀던 이엘은 레온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폐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젠 폐하께서도 받아들이셔야 해요.’

    그땐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건 나였나. 란트의 우직하지만 솔직한 말에 무거웠던 레온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각하의 숙부께서도 저와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

    “한 번 더 찾아가셔서 물어보십시오. 저희가 협박하지 않아도, 그분이라면 각하께 진실을 말씀하실 듯합니다.”

    레온이 나드를 제 자식처럼 생각하듯, 레온의 곁에도 그를 자식처럼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린다와 발레리안 역시 포함된다는 것을 레온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

    “정말…… 미래를 볼 수 있어?”

    “그렇게 얘기하니까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그냥 꿈꾸듯 스쳐 지나가는 정도야. 아직도 꿈인지 예지인지 구별이 잘 안 되고. 대충 이런 느낌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에 불과해.”

    “그럼 그때 나한테 능력 쓰지 말고 무조건 도망치라고 했던 건?”

    “…….”

    “그것도 예지였어? 내가 올리세스의 습격을 받고 쓰러질 걸 미리 알았던 거야?”

    포르 자작령으로 돌아왔던 스완은 피시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로빈의 영지에서 겪었던 일과 해냈던 성과들을 자랑하듯 떠들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지를 갖게 된 것 또한 얘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피시는 언젠가 스완이 그에게 경고했던 것을 잊지 않고 떠올린 모양이었다.

    “내 영지를 떠날 때 네가 그랬잖아. 되도록 능력을 쓰지 말고 자중하라고. 난 그때도 네가 뜬금없이 그 말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어.”

    “…….”

    “정말이야? 그게 예지였어?”

    피시의 물음에도 스완은 한참이나 침묵을 고수하다가 결국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앓는 소리를 짧게 내곤 쭈그려 앉았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그것 때문에 화나지 않았어, 스완.”

    “하지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정말 그게 예지였다면, 넌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내게 경고해 준 거잖아.”

    스완이 아버지인 빈센트를 찾아가 자신이 성력을 쓸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 피시도 함께 있었다. 심지어 자신보다 피시가 먼저 그 호수에 도착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친구였던 시모네의 죽음을 미리 보고 그를 살리기 위해 미래를 얘기했다가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피시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까진 확신한 게 아니라서 금기를 어긴 건 아니야.”

    “어쨌든.”

    “…….”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빈센트가 시몬을 살리려다가 다리가 그렇게 됐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보지.”

    스완의 대답에 피시는 더 이상 화낼 수 없었다. 자신은 모두의 관심 밖의 존재였다. 특히 조이나가 죽은 뒤로는 모두의 분노가 제게 쏟아졌다. 차라리 예전처럼 따돌리고 괴롭히는 게 더 나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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