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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4화 (424/488)

424화

“스완은 늘 겁이 많았습니다. 평생을 숨어 살던 백조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걸 차치해도 원래 겁이 많았습니다.”

“…….”

“지금은 많이 성장했지만 전 여전히 그 백조가 겁이 많고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야.”

“그래서 여전히 고집도 세고, 자기주장도 강한 편입니다. 누구보다 살아남고 싶어 하고요.”

노아의 말에 이엘도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아는 제 품에서 떨어뜨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확신을 주듯 눈을 맞춘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완은 무조건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택할 겁니다.”

“…….”

“앤디가 그렇게 훈련시키기도 했으니까요.”

제국이 건국되고 3년간 늑대의 영지에 머물렀던 스완은 앤디와 알폰스로부터 번갈아 가며 훈련을 받았다. 늑대와 백조는 너무 다른 종족이니 사실상 생존 훈련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도 성전기사단장과 제 3기사단장 등 수많은 자들에게 훈련을 받았으니, 단기간 내에 할 수 있는 모든 훈련을 받은 셈이다.

“게다가 드레인이지 않습니까. 그 용에겐 제 능력 속에 있는 테런스의 딸들이 누구보다 소중할 텐데, 그들을 깨워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스완을 어떻게든 지켜 줄 거라고 믿습니다. 정말 스완에게 위험한 일이라면 그 용이 거절할 겁니다.”

“…….”

“백조를 믿어 보십시오. 3년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이제는 믿어도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노아는 그 말을 저가 내뱉고 있는 이 상황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 그 백조는 성장이란 걸 해냈고, 심지어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성력이라는 능력을 손에 쥔 것 외에도 지난 3년간 스완은 동족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제 자리를 찾아내 공고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생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지.

“여독으로 피곤하실 텐데 그만 돌아가시지요. 제가 스완과 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잠깐만.”

“예?”

“잠깐만……. 할 얘기가 있어.”

노아는 제 손을 덥석 붙잡은 이엘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가?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밝은 녹색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왜 황족의 이 눈동자에 모두가 열광했는지 알 것 같다. 뱀의 눈동자 색과 비슷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 난다. 그쪽은 홀리는 것이라면 이쪽은…….

“노아.”

“예? 부르셨습니까?”

“응.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죄송합니다. 폐하의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농담도…….”

이엘은 억지로 웃으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건지 노아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우리의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내 눈동자 색처럼 녹색을 가졌을 거라고.”

“기억합니다. 여자아이라면 제 눈동자 색처럼 새카만 색이라고도 하셨죠.”

“응. 그럼 어떨 것 같아?”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공작을 닮은 아이가 있다면.”

“…….”

“그 아이를……,”

“폐하, 설마…….”

눈치 빠른 노아가 이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말을 하다가 말고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이엘은 그 반응에 저가 더 떨렸다. 이온이 살아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를 만나 계약을 맺었다는 말을 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는데. 이엘은 잘게 떨리고 있는 제 손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응.”

“…….”

“테오가……앗!”

“엘, 정말이야? 정말로 우리에게 아이가…… 테오가 온 거야? 그래?”

이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아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건지 몇 번씩 묻고 또 물었다.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아이가 찾아온 게 맞냐고. 너와 나를 닮은 테오도로가 정말 네 안에 있는 게 맞냐고.

“응. 맞아.”

“…….”

“노아. 우리가 부모가 됐어.”

울컥한 그녀의 목소리에 노아가 품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우습게도 두 사람 모두 같은 표정을 한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왜…… 왜 울어. 공작이 왜 울어…….”

“…….”

“뭐라고 말 좀 해 봐. 울지 말고.”

도리어 이엘이 손등으로 노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녀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고는 두 팔을 뻗어 노아의 목 뒤에 걸고, 이번엔 자신이 그를 안아 주었다.

“노아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아직은 때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사실 그런 걱정을 조금 했는데…….”

“날 아직도 모르는군.”

“…….”

“난 언제든…… 이런 날이 오기를…… 하아, 어떡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뭐라고 설명해도 지금 내 마음을…….”

이엘은 모르겠지만 노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상상을 했었다. 그녀가 황제가 되기 전, 제 영지에 머물던 작은 정원지기였을 때부터. 노아는 제 영지에서 자신과 그녀를 닮은 아이가 뛰어노는 상상을 해 왔다.

“나타니엘.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의 엘.”

“……내가 더 고마워.”

“내게 희망을 줘서.”

“…….”

“폐허가 되고 끝에 다다른 이런 세상에도.”

“…….”

“새로운 생명은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 줘서.”

하지만 노아의 가장 큰 기쁨은 그게 아니었다.

“네가 테오로 인해 더더욱 살아남기를 바라, 엘.”

“…….”

“네 속에 있는 결핍을 우리 아이가 채워 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내, 나타니엘. 나와 함께 해내자.”

이엘은 언제나 자신만 바라보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댔다. 노아는 그대로 얼굴을 비틀어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테오도로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너와 내 아이, 모두를 지킬 테니까. 포기하지 마, 엘.”

“응.”

“사랑해. 정말로…… 어떤 말로도 그 이상을 표현할 수 없어. 그냥 그 단어가 전부다.”

“…….”

“그렇게 널 사랑해. 내가 이 끝없는 삶에 지쳐 끝을 찾기 전에 널 만날 수 있었던 건 신의 축복이다. 그러니까 나타니엘. 내가 받은 신의 축복까지 모조리 너와 아이에게 줄 테니까 포기하지 마. 제발. 이건 내 가엾은 소원이다.”

다디단 고백에 온몸이 녹아들 것 같았다. 이엘은 맞물린 입술을 벌려 그를 맞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의 말이 아니었어도, 자신은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을 셈이었다.

*

새카만 밤을 닮은 땅굴 속에서 미약하게 뻗어 나오던 숨결이 점차 농도가 짙어지며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커다란 동굴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침대 아래까지 늘어뜨려져 있던 새카만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작게 굽이쳤다. 그 이후로도 한참 이어졌던 정적은, 긴 머리의 주인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끝이 났다.

“여기가 어디…… 아, 내 목소리가…….”

몸이 무거운 건 물론이고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낯설기 그지없다. 남자는 두 다리를 겨우 침대 아래로 내린 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여기는 어디고, 자신은 누구이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 걸음 떼는 데도 상당한 기력을 잡아먹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남자는 침대가 있는 곳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축축한 벽면을 짚으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공간 안에 홀로 있다는 생각에 미간이 절로 좁혀지며 몸을 흠칫 떨었다. 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그리고 난 대체 누구지?

‘오빠! 정신 차려! 오빠, 제발!’

그때였다. 귀를 찢을 듯한 어린아이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근원지를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환청, 자신이 잊어버린 언젠가의 기억일 텐데……. 대체 누구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는 거슬릴 만큼 긴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머릿속이 잊힌 기억들로 뒤섞여 엉망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은 채 시간을 보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그는 두 걸음 정도 떨어진 바닥에 그려진 문자를 발견했다.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바닥에 적힌 단어들을 떠듬떠듬 읽었다. 그러고 보니 바닥과 벽면에 그 단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마치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적은 것처럼.

그리고 남자는 그 단어들 사이에 또 다른 단어들을 발견했다.

“아르세니온 에르네스트 르뷔아……?”

직감했다. 그 단어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

“레온 님은?”

“안에 계십니다.”

“설마 계속 이 방에 계셨던 건가? 침실로 가셨던 적은 없나?”

“계속 이곳에 계셨습니다. 틈틈이 눈을 붙이신다고는 하셨는데…….”

“말씀과 달리, 여전히 불면증이 있으셨다?”

“그러신 듯합니다.”

“휴가를 괜히 다녀왔군.”

란트의 한숨 섞인 혼잣말에, 그를 대신해 레온을 지키고 있던 사자 우논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수그렸다. 큰 전쟁을 앞두고 짧게 휴가를 받아 쉬고 돌아왔던 란트는, 자신이 떠나기 전부터 지금껏 레온이 쉬지도 않았다는 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어쩐지 강제로 휴가를 주시더라니……. 란트는 거의 반강제로 제게 휴가를 권했던 레온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있었더라면 레온이 저렇게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꼴을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제 눈치를 보는 우논에게 그만 돌아가라는 눈짓을 보내곤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후작님. 란트입니다.”

“들어와.”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씩 휴식을 취하시긴 했나? 다행히 문 너머에서 들려온 레온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란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어서 와. 잘 쉬고 왔다니 다행이네.”

“제가 떠나는 날부터 지금까지 여기 계셨던 겁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후작님. 쉴 땐 쉬셔야 한다고……,”

“잔소리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 봐.”

“예?”

“빨리.”

레온은 일에 골몰할 때면 늘 커튼으로 창을 가려, 일부러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안 가게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란트는 지금도 창을 가려 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집무실 안엔 햇빛이 쏟아지듯 들이치고 있었고 환기도 잘된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레온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어머니야.”

“아…….”

“숙부님께 물어봐서 받은 초상화지.”

레온이 들여다보고 있던 건 어떤 여자의 초상화였다. 다만 너무 오래된 그림이라 종이가 다 바랬고, 성인 여성이 아닌 아주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 ‘어머니’라는 단어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초상화라고는 했으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소녀를 멀리서 보고 그린 터라 이목구비는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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