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그땐 성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탈출할 수 있다며 자신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얻은 뱀의 독기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조금 전에 로빈의 영지를 들러야만 했다.
스완은 눈치를 보듯 이엘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과 피시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했다. 별다른 핀잔이 돌아오지 않자 스완도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제야 풀어진 얼굴로 피시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얼마간 스완과 대화를 나눴던 피시의 시선이 백조를 지나쳐 이엘의 뒤에 묵직하게 서 있던 하트와 제 종족들에게로 향했다.
근위대의 일을 수행하느라 제게 알은체를 하진 못하는 상태였으나 하나같이 애틋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피시는 스완과 인사를 마치곤 하트에게 다가갔다.
“나 돌아왔어.”
“……그래. 수고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하트.”
“…….”
“다음부터는 무모한 짓 절대 안 할게.”
패티스였다면 그게 무모한 짓이란 걸 알면서 저질렀냐며 노발대발했을 테지만, 하트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망하기보다는 돌아온 제 동생을 위로해 주는 것을 택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뻗어 피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네가 나설 일 없게, 내가 처리하겠다.”
“응.”
그동안 하트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곁에서 지켜봤던 이엘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주드의 죽음으로 괴로운 비명을 질렀던 앤디가 차라리 더 낫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트는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모두가 피시의 생존을 이야기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확단할 수 없었으니까.
이엘은 두 형제의 모습을 빤히 보다가 제 옆에 선 유클리드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클리드 백작.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짐은 백작이 피시를 구출할 거라고 믿었어.”
“그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근데 재규어는? 이카르는 어디 있지?”
“저, 저희 여기 있습니다!!”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던 커다란 형체들은 이엘과 가까워질수록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빨리 달려오기 위해 능력으로 몸을 키웠던 재규어들이 그녀의 보호석으로 인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카르 백. 오랜만이군.”
“폐하. 명하신 대로 피시 남작의 구출과 리노 윌터의 납치 모두 성공하였음을 보고드립니다.”
“수고했어. 그대들도 모두 수고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다시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이에요!”
“전쟁 끝나면 저희도 제도로 옮겨 가서 살까 봐요. 예전엔 몰랐는데 폐하께서 영지 떠나신 이후로 얼마나 적적했는지 모릅니다.”
“시끄러워, 발트. 그 경망스러운 입 좀 다물어라.”
오랜만에 이엘을 보고 신난 재규어들이 시끄럽게 웃으며 떠드는 모습에, 이카르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괜히 발트를 타박했다. 몇 달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재규어들을 지켜보며 이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벽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재규어가 데려온 인간을 발견했다. 그가 리노 윌터였다.
“기절했나?”
“예, 기력이 없는 듯합니다. 먹을 걸 주긴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네요.”
이 남자가 이온의 친구……. 그렇게 생각하니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갇혀 지낸 데다가 포필렌의 남용으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지만, 그는 확실하게 살아 있다. 이온처럼 억지로 생을 연명시킨 게 아닌, 살아서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의지가 강해요.”
이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피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탈출하기 전 리노를 만나러 갔어요. 고문과 잦은 학대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삶의 의지가 강했어요. 괜찮을 거예요. 리노가 정신을 차리면 생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될지 몰라요.”
“그래. 그러길 기대하자. 어쨌든 속히 자작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 출발할 준비를 하거라.”
“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트는 하이에나의 모습이 되어 이엘을 제 등에 태웠다. 떠날 채비를 하던 이카르가 그 옆에 붙어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폐하께선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왜 자작령이 아니라 외곽에서 오시는 거예요?”
“뱀의 영지에 다녀왔어.”
“네?”
“자세한 얘기는 자작령으로 돌아가서 하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는 이카르의 무리를 데리고 자작령으로 돌아오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엘이 권역을 지났을 때 조금 전에 있었던 접전을 목격하고 나왔던 노아의 무리와 마주쳤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밖에서 소란이 있기에 나왔는데, 혹 추격대가 왔습니까?”
“아니. 내가 추격대로 오해를 받았거든. 재규어들에게.”
빙긋 웃으며 말하는 이엘 때문에 재규어들만 민망해졌다. 이카르는 헛기침을 하며 노아의 시선을 홱 피하고는 먼저 성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라져 버린 이카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내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이엘을 향해 허리를 낮췄다.
“타십시오. 안까지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근위대장도 오늘은 푹 쉬도록 하시오.”
“그래. 마침 할 얘기도 있으니까. 하트 경, 근위대와 무리를 저택으로 데려가 쉬도록 해라.”
“예, 폐하.”
하이에나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이엘은 곧장 검은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렇게 제일 먼저 성문을 넘은 이엘과 노아는 뒤따라오던 무리가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을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원래 포르 자작령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도 다른 영지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띄엄띄엄 있는 집들을 지나쳐 광장 쪽에 들어섰을 때, 이엘은 노아를 멈춰 세우고 그의 등에서 내렸다. 노아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채 그녀의 팔을 잡고 에스코트했다.
“뱀의 영지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혹시 스완의 독을 치료하지 못한 건 아닌지.”
“아냐. 오히려 그쪽 일은 잘됐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가 됐으니까. 스완의 몸도 괜찮아.”
로빈이 리플의 죽음으로 그렇게까지 망가질 줄 몰랐고, 그의 집착이 다른 쪽으로 변질될 줄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변질된 집착이, 이번엔 이엘에게 승기가 되어 줄 것이란 사실이다.
“조만간 뱀이 올리세스와 맞붙을 거야.”
“로빈이요?”
“응. 정확히 말하면 올리세스의 편에 선 이종족들을 처리한다고 했어.”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이종족들. 그리고 포필렌으로 현혹된 이종족들과 줄곧 황실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이종족들까지. 올리세스와 손을 잡고 제국 곳곳의 영지를 습격하는 이종족의 수가 상당했다.
그로 인해 동맹군이 전부 모이지 못했다. 내부에선 이교도와 포필렌 중독이, 외부에선 올리세스와 이종족의 공격이 끊임없이 쏟아진 탓에. 특히 조르단 공작과 같은 영주들은 폭동이 일어난 영지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리고 스완은 곧 여길 떠날 거야.”
“예?”
“스완과 내가 했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아.”
“곧 계약이 끝나.”
이엘의 말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계약이 끝나면 그 백조는 다시 호수로 돌아가야 한다. 뭍에서 살 수 없는 저주를 받았으니까.
“계약을 연장하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
“오드 님께 한 번 더 계약을……,”
“예전에 말한 적 있잖아. 그 계약은 한 백조당 한 번뿐이라고.”
“…….”
“그나마도 여기까지 계약이 이어졌던 건, 당시에 스완이 5년을 기한으로 정했기 때문이야.”
이엘의 말을 들은 노아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니 그때 그랬다. 사냥을 준비하라는 이엘의 말을 따라 고니의 호수에 도착한 노아는 그곳에서 이엘이 백조와 영혼을 결속시키는 계약을 맺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그녀를 믿었기에 뭘 하려는지 묻지 않고 따라왔으나, 그곳에서 백조와 영혼을 묶는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엘이 노아를 달래 겨우 진정시키고 계약을 맺으려고 했을 때, 뜬금없이 스완이 계약 항목에 5년이라는 기한을 붙이는 바람에 노아는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계약도 아니고 영혼이 묶여 서로의 목숨이 연결된 계약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이 끝나길 바라도 모자란 마당에, 5년이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의 표정을 보니, 5년보다 더 연장할 걸 그랬나 보구나.”
“그걸…… 불평하던 제가 할 말은 아니니까요.”
“맞아. 처음엔 스완을 죽일 듯이 노려봤었지.”
“…….”
“스완이 이렇게 큰 전력이 될 줄 아무도 몰랐으니까.”
노아는 고심하는 듯했다. 하지만 고니의 저주가 풀리지 않는 이상, 백조가 뭍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걸 깨달은 탓에 미간을 좁힌 채 한숨만 흩뿌렸다. 이엘이 노아의 손을 잡아 시선을 제게 돌리도록 만들었다.
“스완을 드레인에게 보내면 돼.”
“네? 드레인이라면…… 설마…….”
“거긴 이곳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그곳으로 보내면 계약이 끝났어도 스완은 호수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그곳에서 살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맞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드레인의 능력은 이곳과 다른 차원의 세계이므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테런스 포르의 딸들도 자라지 않은 채 그녀의 능력 속에서 잠들어 있는 거였고. 능력의 주인인 드레인은 이곳과 그녀의 능력의 시간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안에 객체로 들어갈 스완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스완이 그곳에서 지금처럼 나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확신 못 해. 차라리 그를 호수로 돌려보내는 편이 서로에게 나을지 몰라.”
스완은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백조이지만, 이엘은 이 전쟁과 무관한 어린 백조를 끌어들였다는 것에 줄곧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무서운 포식자들 사이에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전쟁까지 경험한 데다가,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선택은 백조가 했지만 이엘은 때때로 그를 불러들인 것을 후회하곤 했다.
“스완은 어떻게 하고 싶답니까?”
“스완이 정한 거야.”
“…….”
“난 드레인의 능력은 생각도 못 했어. 그 애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했더라.”
“…….”
“내게 의견을 묻긴 했지만, 사실상 통보와 다를 바 없었거든.”
이엘은 노아의 손을 놓고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로 다가갔다. 분수대는 고요했고 물만 고여 있었다. 영지민들이 대피하며 발생한 먼지와 쓰레기로 인해 물은 이미 흙탕물이 되어 있었다. 이엘은 근처에 쭈그려 앉아 물끄러미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스완이 필요한데, 스완을 이곳에 붙잡아 두고 싶지도 않아.”
“폐하.”
“애초에 그 애를 걱정하고 있다면 놓아주는 게 맞는 건데도……. 이런 상황에서도 스완의 쓸모를 생각하고 있네.”
그만큼 스완이 너무 중요한 전력이 된 탓이다. 머리를 감쌈 채 긴 한숨을 쉬는 이엘을, 노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뒤 조심스레 제 품에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