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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2화 (422/488)
  • 422화

    *

    리노를 납치한 유클리드와 이카르의 무리는 꼬박 이틀을 달려 이엘이 있는 곳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 안엔 피시도 함께였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엘이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헤르몬 산에서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습격을 받아 납치되고 말았다. 사실상 피시가 의도한 계획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엘의 입장에선 충격이었을 터였다.

    ‘피시! 안 돼, 피시!!’

    돌이 제 몸 위로 와르르 떨어져 흡사 돌무덤처럼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했던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피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조이나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어린 날의 제 모습처럼, 그녀도 그렇게 괴로웠겠지.

    “표정이 꽤나 밝군? 내가 본 남작 중 가장 흥미로운 얼굴이야.”

    뒤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때우던 유클리드가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피시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놀림에도 피시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도리어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폐하를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게 다 내 덕인 건 알고 있지?”

    “알아요. 약속대로 폐하께 백작님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시의 입에서 흔쾌히 나온 대답에 유클리드는 흥미가 떨어졌다. 투덜거리며 뒤로 돌아간 유클리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피시가 한참 웃음을 눌러 참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눈앞에 펼쳐진 작고 소박한 포르 자작령을 응시했다.

    저곳에 폐하가 계셔. 저곳에 나타니엘이…….

    “대장! 누가 다가오고 있는데요?”

    후발대로 뒤따르던 재규어 한 마리가 피시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며 상황을 보고했다. 자작령 쪽에서 누군가 나왔더라면 저희를 알아본 동맹군이었을 텐데,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온다면 그건 저희를 쫓아온 적군의 추격대일 확률이 컸다.

    “전군, 위치로.”

    발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카르가 어수선해진 무리를 정렬하며 빠르게 자리를 배치시켰다. 최대한 빨리 합류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다들 꽤 지친 듯했지만, 추격대에 의해 동맹군의 위치가 누설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 눈을 시퍼렇게 떴다.

    “전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 한 놈도 남겨선 안 돼. 살아남은 놈이 올리세스에게 폐하의 위치를 누설시킬 수 있다.”

    “예!”

    이카르의 명령에 재규어들은 전부 긴장한 듯 털을 삐쭉 세운 채 이빨을 드러냈다. 유클리드 역시 뻐근한 목을 붙잡으며 저 너머의 보이지 않는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스라소니, 재규어, 그리고 하이에나로 이루어진 이 조합이 기묘하게도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꽤 잘 맞는 조합이다. 유클리드는 전쟁광으로 불릴 만큼 전쟁에 특성화된 개체였으나 스라소니의 능력상 장거리에선 효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걸 만회할 만한 경험과 지략이 있기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거리에 제한이 거의 없는 하이에나가 먼저 나서 주면 유클리드의 입장에선 확실히 편했다. 그는 옆에 있던 피시를 잡아 세웠다.

    “남작. 능력을 쓰는 게 가능한가?”

    “네. 지금은 가능합니다. 아직 먼 거리니까요. 보호석의 범위에서 꽤 떨어져 있어서 아마 가능할 거예요.”

    “땅을 가르는 것도?”

    “네. 가능해요.”

    “그럼 땅을 갈라 장벽을 세우도록.”

    유클리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시는 손을 뻗어 땅을 뒤흔들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추격대와 자신들 사이에 선을 긋듯 땅을 가르더니, 와자자작 소리와 함께 찢어진 땅을 위로 올리며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클리드는 그 장벽 위에 올라서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 위에서 능력으로 물을 쏟아 내면 보호석을 가진 인간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이미 강처럼 물이 불어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파도처럼 쏟아질 것이다.

    장거리 공격이 어려운 스라소니들이 자주 사용하는 낙차 방법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재규어들이 추격대의 뒤에서 총으로 공격하면 전멸시키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방법으로 공격할지 눈치챈 재규어들은 몸을 작게 줄인 채 장벽을 지나쳐 추격대가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유클리드는 피시가 세운 높다란 장벽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스라소니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가볍게 벽을 타고 올라섰다.

    조금 전에 떠난 재규어들은 몸이 작아진 탓에 위에선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미약하게 풀숲이 흔들리는 걸로 보아 대략적으로 저쯤에서 움직이는 모양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는 뒤를 힐끔 쳐다봤다. 피시와 리노는 일부 재규어들과 함께 장벽 뒤쪽 안전한 곳에 잘 숨어 있었다.

    “어디 보자. 몇 놈이나 쫓아왔나?”

    어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나를 쫓아왔지? 숫자가 많으면 그나마 재미라도 보겠는데,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면 그냥 단번에 죽여 버릴 심산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직접 참전하는 거니 되도록 인원이 많으면 좋겠는데……. 그 생각에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을 때였다.

    “어라. 저 빛은 또 뭐야?”

    해는 졌고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인위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환한 빛이 저 너머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그 빛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능력을 쓰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어?!

    “뭐, 뭐야?!”

    유클리드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간 물은 폭발적인 출력을 자랑하며 장벽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강물처럼 응집된 물은 그 상태로 추격대를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하지만 집채만 한 파도처럼 솟구쳤던 물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뭐야? 왜 이러지? 보호석 때문이 아닌데?”

    보호석은 이종족의 능력을 구속할 뿐, 이미 펼쳐진 능력까지 거두진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 장벽을 세우고 자신이 장벽 위에서 물을 떨어뜨려 낙차를 이용해 가속했던 것이다. 멈출 수 없도록.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보고도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친 것처럼, 유클리드가 보낸 엄청난 양의 물은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멈춰 버렸다. 하늘을 향해 치솟았을 뿐,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결계에 부딪친 모습과 비슷했다.

    “잠깐. 결계? 설마 결계가……,”

    “뭐 하는 짓이야! 다들 미쳤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저 너머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것인데도 찢어질 듯 가는 목소리가 상황이 급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비명에 미간을 찌푸렸고 상황 파악을 위해 장벽 아래로 풀썩 뛰어내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처리하는 게 낫겠군. 그 생각과 함께 허리춤에서 총을 빼내 바닥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총질은 인간 같아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장거리엔 이게 최선이라 별수 없다.

    “안 돼!”

    “뭐?”

    “안 돼요, 백작님!”

    어느 틈에 장벽을 넘어온 건지, 뒤에서 달려온 피시가 유클리드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냄새요!”

    “무슨 냄새…… 아.”

    그제야 바람에 섞여 들어온 냄새를 맡았다. 인간의 냄새는 맞지만 보통 인간의 것은 아니다. 유클리드는 자세를 바로 하고 추격대 쪽을 응시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저가 보냈던 물을 도로 빨아들였다.

    조금 전 유클리드의 공격으로 인해 환하던 빛이 어스레하게 일렁였고, 그 빛 사이로 익숙한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유클리드가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그녀의 냄새가 짙게 퍼졌다. 분명 목숨이 오갈 정도로 매서운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를 맞이하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평이하고 단조로웠다.

    “전쟁광이란 소리가 괜히 붙는 게 아니군.”

    “폐하.”

    “스완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진짜 다들 미친 거야?! 코는 어디다 두고 이런 헛짓거리를 해!”

    웃는 이엘의 뒤로 길길이 날뛰는 스완이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평소엔 냄새를 그렇게 잘 맡으면서 어떻게 이번엔 한 놈도 못 맡는 건지. 자신이 성력을 사용해 스라소니의 물을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이엘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보호석을 발동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까운 곳에 있던 하트나 자신은 이종족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마터면 맹렬하게 쏟아지는 파도에 무력하게 삼켜질 뻔했다.

    “뭐 저런 우악스러운 종족이 다 있어!”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씩씩거리는 스완의 모습을 유클리드는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그 낯설지만 오묘했던 새하얀 빛. 조금 전에 제 능력을 가볍게 막아 낸 결계.

    모든 정황이 그게 성력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나 가까워진 이엘의 곁엔 오드가 없었다. 이엘과 하트, 근위대인 하이에나들, 그리고 뭔지 모를 분홍 머리의 남자가 전부였다.

    “저건 뭔가요, 폐하?”

    유클리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스완을 검지로 가리켰다. 마치 물건 취급하는 그의 행동에 스완의 얼굴은 더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

    “스완.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 극악무도한 공격에 죽을 뻔했는데.”

    웬만한 이종족의 능력은 다 겪어 봤는데도 조금 전의 위력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무서웠다. 한 달 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스완은 여태 노아와 피시의 능력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오늘로써 그 기준이 바뀌고 말았다. 저 남자가 제일 최악이야!

    “그보다 네가 그토록 기다렸던 피시와 인사해야지. 남작이 널 기다리고 있구나.”

    이엘의 웃음기 섞인 말에 스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피시와 마주했다. 피시의 얼굴이 반쪽이 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저것보단 나았는데. 스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한숨을 삼켰다.

    역시 그날 다 얘기했어야 했다. 예지를 통해 네가 죽는 것을 봤으니 부디 능력을 사용하지 말고 네 영지를 떠나지 말라고. 아버지처럼 페널티를 받더라도 그 얘길 전했어야 했다. 예지를 확신하기 싫다는 핑계로 모른 척 넘겨 버린 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거다.

    “스완.”

    “…….”

    “잘 지냈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스완에게 피시가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스완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뭔가 속상하단 표정으로 자신을 훑어볼 뿐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피시가 먼저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스완. 너도 다쳤다며. 독기에 당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야?”

    “내 걱정 할 때야? 내가 너한테 경고했지. 무슨 일 터지면 그냥 도망치라고. 되도록 능력은 쓰지 말라고. 왜 내 말 무시했어?”

    “…….”

    “넌 내 경고를……!”

    “폐하를 지키려고 그랬어.”

    한껏 수그러진 목소리로 이엘을 위해 그랬다고 대답하다니. 스완은 피시의 변명에 기가 찼고 화가 났다. 저 약은 게 내가 더 이상 화내지도 못하게 저런 핑계를 대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미안해, 스완. 무시한 게 아니야. 네가 떠나기 전에 내게 해 줬던 그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또렷이 기억해.”

    “…….”

    “네 말대로 하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폐하를 지키기 위해, 또 동맹군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리고……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면 됐잖아…….”

    피시를 향해 널 살리기 위해 여기 모인 모두가 어떤 노력을 했는 줄 아냐며 따지려던 스완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입을 꾹 다물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소모라를 정화하겠다며 홀로 그 사지로 걸어갔던 제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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