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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1화 (421/488)

421화

제국이 건국되고 제 1기사단의 단장은 노아가 됐지만 그는 이엘을 위해 그림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는 부단장인 앤디가 도맡았다. 기사단뿐 아니라 영지에 있는 다른 늑대들의 통솔권 또한 앤디의 몫이었다. 자신이 노아처럼 리더십이 있거나 안드로처럼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제게 주어진 일을 허투루 처리하진 않는다는 자부심은 갖고 살았다.

하지만 모두 허사가 됐다. 공들여 쌓아 놓은 탑은, 쥐도 새도 모르게 섞여 들어온 이물질 하나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앤디는 제 부하 중 하나가 포필렌에 취해 이교도가 되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중요한 일을 맡던 놈은 아니었잖아. 그나마 기밀이 누설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경도 그만 잊어버려. 겨우 한 마리뿐이었으니까 그 정도면 폐하께서도 넘어가 주실 거야.”

“노아 님은 넘어가시지 않겠지만요.”

“…….”

“안일했어요. 포필렌을 누구보다 주시하고 있었으면서, 심지어 이종족 내로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책임자가 안드로 님이었는데. 어떻게 동족이 포필렌에 중독됐는지 모를 수 있었던 건지. 다른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라 내 일이나 잘했어야 했는데.”

무의식 속에 우논은 중독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앤디는 가까운 지인인 레온이 오랜 시간을 포필렌을 복용했는데도 멀쩡한 것을 지켜봤다. 그래서 무엇이든 예외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패티스는 착잡한 얼굴로 자책하고 있는 앤디를 힐끗 봤다.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될 터였다. 앤디에겐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 뼈아픈 경험으로 앤디가 더 성장해서 노아만큼의 몫은 하길 바란다. 그래서 패티스는 더 말을 얹지 않고 그를 전장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가서 페루츠 후작과 교대해 주게. 그에게 황궁으로 복귀하라는 전언도 함께 전하고.”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앤디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현장을 향해 달렸다. 이럴 땐 다른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하게 정신없이 굴리는 편이 낫다. 패티스는 적게나마 갖고 있던 동정심을 거두곤 자신 역시 황궁을 향해 걸었다.

황궁은 고요했다. 인간들은 모두 대피했고 기사단은 전장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패티스는 걸음을 멈추고 황궁 밖에 멀찍이 서서 커다란 건축물을 눈에 담았다. 과거에 있던 황궁에 비하면 한참 작고 소박한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위용은 잃지 않는 모습이라, 그것마저 나타니엘을 연상케 했다.

“백작. 무슨 일 있소? 날 이곳에 불렀다고 앤디 경에게 들었는데.”

“아, 오셨습니까?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밖은 전쟁이 한창이오. 급한 일이 아니면 그곳부터 처리하고……,”

“중요한 얘기를 할 생각입니다.”

“…….”

“후작님도 알고 계셔야 할 듯해서요.”

패티스의 뜬금없는 말에 라니에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패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마련된 응접실로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적막한 복도엔 두 사람이 걷는 구둣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마저도 들리지 않았다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탓에 황궁이 죽어 가는 듯했을 것이다. 패티스는 그것만은 원치 않았다. 그녀를 닮은 황궁이 죽어 가는 건 원치 않는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반면 뒤따라 걷는 라니에로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장소를 이동하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뭔지 겁이 난 것이다. 그의 고개가 복도 옆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향했다. 저 너머에선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실 아직 전초전에 불과한 정도긴 하지만,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는 라니에로로선 저곳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런 전쟁까지 뒤로한 채 해야 할 중요한 말이란 게 대체 뭘까.

“일단 앉으십시오, 후작님.”

“최대한 빨리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소.”

“그럴 생각입니다. 후작님의 시간을 잡아먹는 건 제 쪽에서도 손해니까요.”

라니에로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패티스는 응접실 안쪽에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그는 그것을 라니에로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요?”

“열어서 확인해 주십시오.”

황제의 인장까지 찍혀 있는 봉투를 저가 열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급한 마음에 열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있던 종이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라니에로는 눈을 크게 뜨더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용을 읽었다. 한참 만에 종이를 내려놓은 라니에로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보시는 대로입니다.”

“…….”

“제가 전사할 경우, 후작님께서 황궁의 총책임자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패티스 백!”

“폐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입니다.”

스완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제도를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쓸 만한 인력은 전부 전장에서 싸워야만 했다. 늘 뒤에서 지시를 내리던 패티스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하이에나의 전력이 부족한 지금 상황에선 패티스가 앞장서서 능력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올리세스가 갖고 있는 보호석들을 제거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앞에서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패티스가 라니에로에게 내민 편지는 이엘이 직접 쓴 칙서였다. 원래 그녀가 영지 시찰을 하기 위해 황궁을 떠날 때, 황궁과 제도의 통솔권을 패티스에게 넘긴다는 칙서를 주고 떠났었다. 그리고 이 칙서는 패티스의 요청으로 이번에 받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황궁을 지켜야 했고, 패티스는 그게 라니에로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엘은 패티스의 판단과 선택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의문을 달지 않고 칙서를 적어 보냈다. 반대로 앤디는 의문을 가졌다.

‘왜 하필 페루츠 후작입니까?’

‘여긴 제도이면서 황궁이니까.’

‘예?’

‘처음부터 인간들의 공간이었어. 우리의 자리가 아니라.’

‘…….’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내가 폐하의 대리를 맡고 있지만, 원래라면 여긴 인간의 자리였어야 한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 자리는 이종족이 아닌 인간의 것이다. 처음부터 황궁은 제게 이질적인 곳이었다. 그나마 곳곳에 묻은 그녀의 향기로 지금까지 버티긴 했지만 역시나 이곳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선택한 게 라니에로였다. 패티스는 여전히 인간을 신뢰하진 않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본 라니에로 페루츠라는 사람만큼은 믿어 봐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것까지도 이엘에게 허락을 받았다.

다만 이엘은 이 칙서가 실현되지 않을 것을 명령했다. 자신이 황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황좌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도 함께였다. 하지만 글쎄……. 패티스는 이 전쟁의 승리가 그녀로 끝날 것이란 확신은 갖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자신도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내가 이곳을 지킬 수 있을까?

“죽긴 누가 죽나. 백작이 죽을 일 없게 내가 지킬 것이니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여기서 지시나 잘 내리시오.”

“진지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고 있소.”

“…….”

“그리고 누구보다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오. 백작은 죽는 일 따윈 없을 테니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시오.”

그 말을 남긴 라니에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이 끝난 듯하니 난 돌아가겠소.”

“잠시만요. 아직 드릴 말씀이 더 남았습니다.”

“그게 뭔가?”

조금 전과 같은 말이면 듣지 않겠다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로 의자에 앉았다. 패티스는 짧게 호흡하곤 그동안 라니에로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빠르고 간결하게 설명했다.

몇 달 전 패티스의 영지에서 이엘에게 들었던 그 모든 진실을 라니에로에게도 전해 주었다. 이엘이 라니에로와 코르넬에겐 자신이 직접 전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동안 패티스도 진실을 알리지 못했지만 이젠 라니에로도 알아야 한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뭐라고 한……,”

“황자는 살아 있고, 폐하께선 죽음을 목전에 두셨으며 언젠가 태어날 그분의 아이는 형체도 없이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에게 바쳐질 거란 소립니다.”

“…….”

“시간이 부족해 자세하게 설명드리진 못했으나, 후작께선 제 말을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방법은 있는 건가? 폐하와 황손을…… 그리고 그 황자를 구할 수 있는 방법.”

“일단은 용이 돌아오길 기대해야겠지요.”

“…….”

“돌아올 때 부디 선물을 가지고 오면 좋겠네요.”

패티스의 대답에 라니에로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휘몰아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건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패티스를 쳐다봤지만 그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후작께선 그럴 일 없을 거라 말씀하셨지만,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정말 제가 전사하게 되면 후작님께서 이곳을 책임지셔야 하기에 지금이라도 급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후작께선 모르시는 게 있어선 안 되니까요.”

“패티스 백.”

“하지만 너무 그렇게 걱정은 마십시오.”

“…….”

“제가 보기보단 야망이 있는 편이라.”

자리에서 일어선 패티스가 빙긋 웃으며 창문을 열고 밖을 응시했다. 저 멀리 검은 연기와 붉은 불꽃, 그리고 희뿌연 먼지구름이 한데 엉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멀리서 보니 참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일수록 욕심이 나는 법이지요.”

“…….”

“쉽게 내어드릴 생각 없습니다.”

설령 황궁이 온 힘을 다해 넌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밀어낸다고 해도, 패티스는 제 손에 쥐여진 이 권력을 있는 힘껏 쓰다 쫓겨날 생각이었다.

“하트가 근위대장이 된 건 그가 하이에나들 중 전술과 능력의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그 자리는 응당 제 것이었을 겁니다.”

머리를 쓰기 위해 늘 뒤에 물러나 있었지만 실전에선 하트에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건 조이나와 자신이었다. 도중에 직접 맞부딪치는 것보단 뒤에서 지략을 세우는 게 저와 더 어울릴 거란 판단으로 노선을 튼 거니까.

그러니 쉽게 죽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패티스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라니에로는 실소하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황제의 칙서를 다시 봉투에 넣어 내려놓았다.

“그럼 이 칙서는 다시 저 안쪽에 넣어 두는 편이 좋겠군.”

“후작께서 원하신다면요.”

“전쟁이 다 끝나고 그 뒤에 찾으러 오겠소. 그땐 백작과 직접 붙어 그 칙서를 쟁취할 테니.”

“좋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라니에로는 들어올 때완 달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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