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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20화 (420/488)
  • 420화

    *

    “대장. 그냥 우리가 들어가는 건 어떻소?”

    “맞습니다, 대장! 대체 이게 몇 달째냐고요.”

    기다림에 지친 재규어들이 하나둘 이카르를 보채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절대 믿을 수 없는 스라소니를 저 마을로 들여보낸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던 것이다.

    들어갈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리노 윌터를 납치해서 나올 것처럼 자신만만했던 유클리드는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척이 없었다.

    심지어 그러던 와중에 전쟁까지 터졌다. 올리세스가 나타니엘을 공격했고, 그 전쟁에 휘말려 하이에나의 셋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독수리가 와서 피시가 이곳에 잡혀 갔을 거라고 소식을 전해 주긴 했지만, 정작 이카르는 피시의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채였다. 안에서 상황을 보고하던 유클리드는 저가 확인해 보겠다며 돌아간 뒤로 여태 연락이 끊겼고.

    불안한 건 재규어들만이 아니다. 이카르 역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이엘과 합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장!”

    “일단…… 기다리자. 오늘 자정까지만.”

    “그 스라소니가 죽었으면 어떡하고요. 이럴 시간에 우리 영지로 돌아가거나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맞소, 대장. 여기서 시간 죽일 필요 없소. 그냥 들어가서 리노인지 뭔지 하는 놈과 하이에나 남작부터 찾아보고, 없으면 그냥 마을을 불태우자고요.”

    “기다려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뭔 약속이요. 설마 그 스라소니를 아직도 믿고 있소? 놈이 홀로 저길 기어들어 갔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면 그냥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요.”

    대다수의 재규어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성질이 급한 편이니 이만큼 참은 것도 꽤 오래 참은 셈이다.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이곳을 지키면서 올리세스의 사병들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본 이상, 밖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 자정까지만.”

    “…….”

    “자정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면, 곧장 쳐들어가서 리노를 찾자.”

    이카르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려진 하늘을 올려봤다. 아무래도 비가 올 듯싶은데……. 그러면 불을 지르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비 때문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들 순 있을 것이다. 아직 저 마을엔 보호석이 발동 중이라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몸을 작게 줄일 수도 없을 테고. 그러니 차라리 비에 스며들어 마을에 잠입하는 게 낫겠지.

    “준비해라. 마을에 들어가서는 한 시간 내에 리노를 찾고 마을을 떠나야 하니까 지금부터 각자 역할을 나눠서 준비하도록.”

    “그럼 하이에나 남작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필요한 건 리노 윌터야. 하이에나를 구출할 시간이 되지 않으면, 리노만 구출하는 쪽으로 진행해.”

    이카르의 말에 재규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카르는 그들이 각자 흩어져 분업을 정하는 동안 리노가 잡혀 있다던 마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을 안에서 느껴지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기한을 일부러 자정으로 잡은 건 아니지만…… 이종족의 본능이 말해 주는 것 같다. 자정 안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라고.

    그렇게 고요히 기다렸다. 재규어들은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계획한 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렸다. 폭풍 전야였다. 달이 차오른 것을 확인하던 이카르의 곁에 수족 발트가 다가왔다.

    “대장. 우리는 다 준비됐소. 명령하면 곧장 저 마을로 들어갈 수 있소.”

    “알겠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선발대가 먼저 경계를 넘는다. 성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먼저 처리하고 뒷문을 열어야 해, 최대한 조용히 들어가야 하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움직여라.”

    “예.”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카르는 제 얼굴에 떨어진 빗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몸을 적실 만큼 거세진 비에 재규어들은 안광을 번뜩였다.

    선발대로 뽑힌 다섯 마리의 재규어 중 세 마리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머지 두 마리는 재규어의 모습으로 마을로 다가갔다. 길을 잃고 헤매는 부랑자인 척 문지기에게 접근해 경계를 허문 뒤, 성문을 내려 나머지가 들어올 수 있게 할 계획이었다.

    “어? 발트 님. 잠깐만요.”

    “뭐야? 조용히 해. 그러다 들킨다고.”

    “아니, 저것 좀 보시라고요.”

    타고 왔던 재규어의 등에서 내린 발트를 다른 우논 하나가 붙잡아 세웠다. 예민해진 발트가 우논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올렸을 때였다.

    “으악!”

    “아악!”

    온갖 괴성이 난무했다. 아직 성 안으로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안쪽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오히려 대기 중이던 재규어들이 놀랐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유클리드가 움직인 것 같은데.”

    “그 스라소니가요?”

    타이밍이 맞은 모양이었다. 발트는 내심 제 상관인 이카르가 내린 판단에 감탄했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안쪽에서 탈출을 도모하던 이카르의 계획이 어그러졌을 텐데. 발트는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훅 줄였다.

    “됐다. 능력이 통해.”

    “네? 엇?! 진짜네요? 몸이 작아졌네요.”

    “안쪽에서 보호석을 모두 끈 모양이야. 다들 본체로 돌아가서 대기해!”

    “예!”

    그렇다면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지. 발트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다시 몸 크기를 정상으로 돌려놨다. 발트는 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뒤를 돌았다. 역시나 기민하게 알아차린 이카르가 잠복해 있던 재규어들을 모두 이끌고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뭐지? 갑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져서 너희가 보호석을 차단시킨 줄 알았는데.”

    “아뇨. 저흰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갑자기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발트의 설명에 이카르가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몸을 작게 줄인 채 성벽 근처로 천천히 걸어갔다. 갑자기 비가 더 거세진 탓에 빗소리만 귓가를 어지럽혔는데, 자세히 들으니 성 안쪽에서 비명 소리와 뭔가가 터지는 소리들이 연이어 들렸다. 언뜻 총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스라소니가 움직인 걸까요?”

    “확신하긴 힘들어. 내전이 터졌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쪽에서 습격한 걸 수도 있으니까.”

    원래는 재규어들이 마을을 둘러싸듯 번갈아 가며 순찰을 했는데, 오늘은 자정에 있을 공습을 위해 한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반대쪽 상황을 알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외부에선 이엘과 올리세스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혹여나 일이 틀어진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지금 들어가요?”

    “일단 대기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상황을 좀 더 두고 보자.”

    비가 조금 더 거세지면. 그땐 정말로 숨어들 생각이다. 누가 저지른 건지 모르겠지만 혼란을 야기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뭐가 됐든 안에 들어가서 리노 윌터를 잡아 오면…… 어? 이카르의 동공이 확장되며 저 멀리서부터 저희 쪽으로 다가오는 인영들을 주시했다.

    “전군, 공격 준비.”

    이카르의 맹렬한 기세를 느낀 재규어들은 공격 준비를 진작 마친 후였다. 본체로 돌아가 털까지 곤두세운 재규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카르는 여전히 저희 쪽으로 다가오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능력을 사용해 몸을 크게 키우려 했다.

    “거참, 기다리라니까 그걸 못 참고.”

    어둠 속에서 화려한 무늬를 가진 이종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리 모두 몸에 점 같은 무늬가 붙어 있었지만 종족은 달랐다.

    “유클리드?”

    “이젠 호칭까지 버렸습니까, 이카르 백작?”

    “대체 어떻게……,”

    “약속대로 리노 윌터를 갖다 바쳤어, 난.”

    스라소니는 제 등에 기절한 채 태워진 인간 남자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피골이 상접한 것처럼 빼빼 마른 남자는 돌연 느껴진 충격에 앓는 소리를 냈지만 다시 기절해 버린 건지 눈을 뜨지 못했다.

    저게 리노 윌터? 이카르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허리를 숙인 채 인간의 상태를 살폈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잔뜩 마르고 피폐해진 모습이었지만 상태가 듣던 것만큼 엉망은 아닌 듯싶었다.

    “포필렌 복용을 멈춘 지 좀 돼서 금단현상이 온 모양이에요.”

    유클리드의 뒤에 있던 하이에나가 앞으로 다가와 설명했다. 이카르는 리노에게서 시선을 떼고 피시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저 하이에나를 버리고 떠날 생각이었다. 이엘이 꼭 그를 구출해 달라며 부탁했지만 이카르는 리노와 피시 중 경중을 따지자면 리노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 유클리드 백작님의 공이 커요. 저와 리노 윌터 모두를 구출하려고 애쓰셨거든요.”

    “…….”

    “아직 스라소니를 믿지 못하시는 건 알지만, 저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아요.”

    피시가 이카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닥거렸다. 그 모습에 이카르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유클리드의 선택과 담력이 저보다 낫다는 생각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이다.

    확실히 경험이 부족하다.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게 유클리드보다 한참은 뒤떨어진다. 저 스라소니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요. 잠깐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 출발하지. 발트, 네가 리노를 데리고 가라.”

    “예, 대장.”

    “그리고 유클리드 백작.”

    “왜 불렀지?”

    “믿지 못해서 미안하군. 이번 일은 백작의 공이 크다는 걸 폐하께도 잘 전하겠소.”

    “별말씀을. 앞으론 이보다 더 큰 공을 세울 텐데.”

    지금 유클리드의 얼굴은 처음 마을에 들어갈 때보다 더 후련해진 듯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유달리 유클리드와 피시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처럼 보여서 신기할 정도다. 어쨌든 그건 가면서 듣기로 하고.

    “전군. 출발!”

    이카르의 명령과 함께 재규어들과 유클리드, 그리고 피시가 지긋지긋한 인간 마을을 탈출하기 위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제도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스완의 부재가 가져다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보호석으로 잔뜩 무장한 채 나타난 인간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똑같은 무기를 들고 직접 나서는 수밖엔 없었다.

    하이에나의 등에 올라탄 채 직접 전장에 나서 지휘하고 있던 패티스는 고개를 돌려 황궁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겨우 스완 하나 없는데 이렇게까지 밀릴 줄이야……. 그동안 우습게 봤던 그 백조의 방어 결계가 이렇게 큰 존재였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백작님! 제도민을 모두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을 찾았어요!”

    그나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제도에 있던 인간들을 피난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앤디가 생각보다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수고했다, 앤디 경. 성전기사단들의 배치는?”

    “말씀하신 숫자보다 더 많이 배치해 두었습니다. 인간들은 안전합니다.”

    앤디의 대답을 들은 패티스는 안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간들의 피난을 준비했다. 제도에 남아 두려움에 덜덜 떨며 황제와 나자르를 부르짖던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중 전쟁에 쓸 만한 자들은 이미 기사단에 뽑혀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제도민은 절반 이상이 약자였다.

    게다가 올리세스가 제도를 에워쌌다는 소식이 들림과 동시에, 제도에도 이교도들의 폭동이 한차례 불어왔다. 후에 전해 듣기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제도 각각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영주들은 그걸 잠재우느라 이엘과의 합류도 늦어졌다고 했다. 놀라운 건 그 이교도에 인간만 있었던 게 아니란 사실이다.

    패티스는 앤디를 한참 쳐다보다 나직이 물었다.

    “경은 괜찮나?”

    “네? 뭐가요?”

    “경의 부관이…… 아니네. 됐어, 가 봐. 가서 할 일 해.”

    “제 부관이 이교도가 된 거요?”

    “…….”

    “별수 있나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큰걸요, 뭐.”

    앤디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최대한 태연한 척 굴었지만, 솔직히 속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 제 자신이 한심해 죽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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