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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9화 (419/488)
  • 419화

    아주 오래전. 뱀이 왕으로 존재하고 이엘이 뱀의 영지에 붙잡혔을 때. 이엘의 자살 사건 이후로 한동안 로빈은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삶의 의욕을 잃은 척하던 이엘은 로빈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한 명 정도는 갖고 싶다고.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부모로서 그 아이에게 주고 싶다고.

    그 말을 로빈은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전 폐하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폐하께서 제 위에 군림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리석게도 욕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

    “폐하의 아버지였던 선황으로부터 이어져 온 ‘그’와의 계약. 그걸 깨뜨리기 위해 폐하의 아이를 이용하려 했으니까요. 폐하께서 알고 계시듯.”

    “…….”

    “제 관심사는 오직 아이뿐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삶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애초에 생명이 있는 존재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체물이었을 뿐이죠.”

    불과 몇 달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어떻게든 노아와 그녀를 흘레붙게 만들어서 아이가 생길 수 있도록. 노아가 안 된다면 저가 보낸 어린 뱀 포레스트가 그녀의 환심을 사서 아이를 갖게 되길.

    그녀의 옆을 지킬 수컷의 자리가 누가 됐든 그런 건 상관없다. 오직 아이. 오직 첫아이. 그걸 바쳐서 이엘의 껍데기라도 가질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니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껍데기만이라도 존재하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더군요.”

    “로빈. 그 말은 마치 그대가 욕심을 버리겠단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다.”

    “…….”

    “이종족 본연의 본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로빈은 와인을 다 마신 후 잔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엎었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와인 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려와 테이블을 적셨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이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와 제 종족이 망가뜨린 이 세계를 이어가 주십시오.”

    “…….”

    “이건 폐하께서 말씀하신, 종족 번식을 막았다는 하찮은 욕심에서 비롯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

    “제 소망이자, 이종족의 소망입니다.”

    “…….”

    “그리고 또한. 껍데기만 남아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한순간을 살아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삶. 이건 인간으로서의 소망입니다.”

    로빈은 이엘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그래서 로빈은 신을 버린 것에 환호했다. 보이지 않는 건 신이나 ‘그’나 똑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존재는 ‘그’였다. 그러니 신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다. 언젠가부터 꼬이기 시작한 실타래. 마구 뒤엉킨 탓에 풀고 또 풀어도 더 엉망이 되어 갈 뿐인 그 실타래의 끝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았어야 했다. 실타래를 만들고 꼬아 버린 주체이자 그 시작점을 잡고 있던 이는 ‘그’가 아니라 신이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먼 길을 와 버렸지만, 로빈은 마지막 사활을 이곳에 걸어 볼 심산이었다.

    “제가 느끼기엔 신께선 인간들을 아직 버리지 않으신 듯합니다.”

    “…….”

    “그 핵심은 폐하께 있는 듯하고요.”

    신이 정말로 인간들을 버렸고, 이종족을 버렸더라면 2차 전쟁에서 모두 죽었어야 했다. 신의 벌을 받아 우리는 모두 죽었어야 해. 하지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남았고 심지어 멸족한 줄 알았던 나자르와 유일한 인간 여자까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신은 아직 이곳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그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깨달았다는 게 중요할 뿐.

    “저희의 소망이 되어 주십시오.”

    “내 아이를 노리는 뱀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구나.”

    “노리지 않겠습니다.”

    “…….”

    “아이를 지키겠습니다.”

    로빈은 이엘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 것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눈동자. 그 눈동자에 어린 청명한 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졌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의미 있는 삶의 욕구. 한때는 인간을 닮고 싶었던 뱀으로서, 로빈은 그녀의 눈동자에 기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신의 축복을 받으시는 분이시여.”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지만. 그래도 돌아가겠다. 이길 수 있는 곳에 나의 종족을 두어야지. 뱀은 이제 제 개인적인 욕망은 내려놓고, 이종족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그녀에게만 매달리진 않을 것이다. 아이를 ‘그’에게 넘겨 껍데기뿐인 그녀를 가지진 않을 것이다.

    “부디 신께서 이곳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그리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망가진 이 세계가 다시 회복되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이 보여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로빈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향한 로빈의 모습을 이엘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으나, 자신이 보았던 로빈의 모습 중 가장 용기 있었다. 그녀는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스완과 눈이 마주쳤다.

    ― 전 믿지 않아요. 믿지 않지만…….

    스완은 제 생각을 전하다가 멈추곤 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악랄하고 지독하다고 생각했던 뱀이 지금은 별것 아닌 존재처럼 여겨졌다. 고작 백조인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을 것처럼, 포식자 같지 않은 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뱀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소망이 되어 달라니. 소망을 보여 달라니……. 그녀의 편에 서서 신을 바라보았던 자신조차 그런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어쩌면 소망을 꿈꾸지 못하고 살았던 건 자신들이 아닐까 싶다.

    이 전쟁이 그녀의 승리로 끝나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선 패전을 염두에 뒀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가 ‘그’에게 패배해서 신이 만든 이 세계가 끝나 버린다는 그런 생각.

    ― 하지만 소망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렵게 전해져 온 스완의 의견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뻗어 로빈에게 내밀었다. 줄곧 고개만 숙이고 있던 로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엘을 쳐다봤다. 그녀는 확신에 찬 눈동자로 로빈을 바라보다가 거듭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을 주거라.”

    “예?”

    “어서.”

    부드러운 압박에 로빈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이엘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로빈의 손을 제 배에 가져다댔다.

    “폐하.”

    “아직은 모르겠지?”

    “…….”

    “아주 작거든. 인간은 이종족과 달라서 매우 작아.”

    로빈의 표정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엘의 허락하에 손을 조금씩 움직여 그녀의 배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지만…….

    “아이가…….”

    “있어.”

    “…….”

    “나의 소망이, 이곳에 있어.”

    이엘이 웃었다. 그녀의 말에 오히려 뒤에 있던 스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 아이라고?! 백조는 경악하듯 숨을 멈췄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하트를 쳐다봤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하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이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이. 정말로 폐하의 아이가……. 내 성력으로 확인이 가능할까? 번뜩 든 생각에 재빨리 집중력을 발휘하여 그녀에게 성력을 사용해 봤지만, 아직은 오드처럼 자유롭게 성력을 쓸 수 없는 상태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정말로 아이가 있는 듯해서.

    “로빈. 너는 내게 너와 모두의 소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건 틀렸어.”

    “…….”

    “이 아이는 나의 소망이야. 내 아이고, 내 꿈이야. 그리고 신께서 축복하신 아이지.”

    “폐하.”

    “그저 너희의 소망은 거기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다.”

    “…….”

    “하지만. 그래도 좋다면. 그런 식의 소망이어도 괜찮다면, 카이로스 님을 치료해.”

    로빈의 표정은 미묘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그는 단숨에 스완을 향해 제 손을 펼쳐서 뻗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완의 몸에 남아 있던 독기가 빨려가듯 로빈의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스완은 뻐근했던 어깨를 돌리다가 길게 심호흡했다. 정말로 몸 안에 남아 있던 리플의 독기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거래는 성립되었구나.”

    “아뇨. 아직입니다.”

    로빈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러곤 이엘의 손등 위에 제 이마를 얹었다.

    “폐하의 소망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가 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추악하고 더러운 일은, 제가 가장 잘하니까요.”

    그녀의 손을 더럽힐 일은 내가 모조리 해치워야겠지. 내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무사히 태어나 안전히 자랄 때까지. 그리고 다시금 새로워진 이 세계를 계속해서 이어 갈 때까지. 로빈은 이엘의 손등에서 이마를 떼고 미려한 미소로 제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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