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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8화 (418/488)

418화

“2차 전쟁을 그런 식으로 끝내지 않았을 겁니다.”

“로빈. 지금 네가 했던 일을 후회하는 거야?”

“후회요?”

“…….”

“그러네요. 제가 후회를 하고 있군요.”

로빈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엘을 쳐다봤다. 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조금 내려뜨렸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 자신이 직접 선물했던 목걸이였다. 에메랄드 보석 옆에 박힌 작은 알갱이는 보호석이다. 종족 번식에 눈이 먼 이종족이 사리 분별을 못 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해를 끼칠까, 그래서 유일한 인간 여자가 다칠까 걱정이 되어 직접 만들어 선물한 목걸이였다.

물론 아주 작은 보호석 알갱이였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쓰이는 보호석들보다 작동되는 범위가 굉장히 좁았다. 그 대신 순간적으로 발동되는 효능은 꽤 컸다. 예를 들어 지금 저렇게 발동하고 있는 상태에선 독수리나 매의 눈으로도 그녀의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없다. 만약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도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로빈은 허탈함에 자꾸만 웃음이 피실피실 새어 나왔다. 이런 와중에 무슨 아이란 말인가. 아이는 이엘이 원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고,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와 맺은 그녀의 계약을 깨뜨릴 수 없다. 선대 황제로부터 이어진 ‘그’와의 계약을 깨뜨리려면 반드시 희생이 필요한데, 이래서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이엘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제 목걸이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로빈을 향해 엄히 꾸짖었다.

“하지만 네 후회는 여전히 하찮고 역겨워.”

“…….”

“그 안엔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인간 여자들을 향한 죄책감은 없고, 종족 번식을 막아 버렸다는 네 하찮은 욕심뿐이니까.”

“그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전 살육에 대한 죄책감은 없습니다. 이종족이니까요.”

“…….”

“종족 번식이 살육보다 제겐 더 중요합니다. 그게 이종족이에요, 폐하.”

말을 거기까지 마친 로빈은 줄곧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조금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부러 저런 색을 내는 건가? 나자르임을 숨기려고? 하지만 알 게 뭔가. 나자르도 인간 여자도, 이젠 다 지쳤다.

로빈은 어디선가 와인과 잔을 가져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엘의 앞에 와인을 따라 건넸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결국 홀짝이며 목을 축이는 건 로빈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시간을 돌리고 싶긴 하네요. 끝이 이렇게 허무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구차해도 이렇게 구차할 수 없다. 억지로 살아남는 기분이었다. 로빈은 이전엔 느껴 보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들이 제 안으로 마구 휘몰아치는 게 거북스러웠다.

“카이로스를 제게 데려온 건 독기 때문입니까?”

이제 본론을 꺼내고 정리를 하는 게 낫겠지. 로빈은 무감한 표정으로 스완을 쳐다봤다. 아무리 나자르라고 해도 리플의 독기를 완전히 정화하는 건 어려운 건가? 아무리 신의 대리자라고는 해도 한계는 존재하나 보군. 그렇게 생각한 로빈은 이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저 나자르 님에게서 리플의 독기를 가져가 정화해 주면.”

“…….”

“폐하는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내게 바라는 게 뭔데.”

“바라면 폐하께서 주실 겁니까?”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과 네가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를 텐데. 로빈은 그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이엘을 눈에 담았다. 한때는 저 인간 여자를 무척 사랑하여 무엇이든 해내려고 할 때도 있었다.

사실 사랑이란 단어를 담는 게 아직도 낯설고 어렵지만, 아무튼 그때의 로빈은 그랬다. 저 여자만 손에 넣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대가 짐의 동맹도 아닌데 원한다고 줄 리가 있겠나?”

“그렇죠. 건국식에서의 제 맹세는 역시 폐하껜 한 터럭도 닿지 못했군요.”

“내 아이로 내 계약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지?”

“…….”

“그래서 보호석을 잔뜩 모았고, 나자르인 카이로스를 더러운 독기가 가득한 소모라로 데려가 희생시킬 계략이었을 테고.”

“…….”

“가장 순수한 제물로서.”

이엘이 제 계획을 반쯤은 읽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일단 그녀의 곁엔 노아가 있다. 아무리 노아가 황제의 눈 밖에 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 저가 알고 있는 건 다 토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역시 이곳에선 나만 이방인인가.

“그럼 하나만 물어보지. 로를 납치한 건 공작이었나?”

“로라면……. 그게 누구입니까?”

“타이곤.”

“…….”

“레온의 심복인 우논.”

루벤의 가족과 인질들을 탈출시켰던 노아는 돌아오는 길에 레온의 심복인 로를 만났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갈기가 뽑혔던 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엘은 어쩌면 그 아이의 갈기가 세 가지 제물로서 사용된 건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의심이 되는 건 로빈이었다.

“세 가지 제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로빈, 넌 알고 있잖아.”

“물론입니다. 고서를 읽은 건 저니까요. 지금 보니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 책을 읽으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니 말해. 넌 내게서 태어날 첫아이를 데려가 나를 대신해 ‘그’의 거래를 떠넘기려 했고, 그러기 위해선 세 가지 제물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였잖아.”

“그건 맞지만, 로라는 타이곤을 납치한 건 제가 아닙니다.”

“…….”

“잘못 짚으셨습니다. 전 아직 그 단계까진 계획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로빈은 진심으로 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럼 정말 단순한 납치였나? 타이곤의 갈기는 예전부터 약효로 유명했으니, 그걸 노린 인간들이 때마침 만난 로를 납치해 데려갔던 것일까?

“하지만 추측해 볼 만한 인물은 또 있지 않습니까?”

“누구?”

“올리세스.”

“…….”

“놈도 저처럼 금서의 내용을 알고 있을 확률이 크니까요.”

오히려 로빈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을지 모른다. 올리세스는 리노 윌터에게서 직접 들었을 테니까. 정말 올리세스가 로의 갈기를 노렸다면……. 타이곤의 갈기,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그것들을 모으고 있는 게 올리세스라면.

“그놈도 ‘그’를 만날 생각인 건 아닐까요? 아예 이곳으로 불러들일 계획일 수도 있고.”

로빈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이엘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만일 선황이 ‘그’를 만났고, 그 방법을 리노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래서 제 형인 올리세스에게 방법을 알려 줬다면……. 그럼 이곳에 수많은 보호석들이 쌓여 있던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로빈이 소모라에 보호석을 축적해 둔 것처럼.

그리고 로 역시 놈의 짓이겠지. 갈기가 필요해서 그 아일 납치했던 게 틀림없어. 그렇게 이어진 생각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로의 이름 위로 겹쳐 떠오르는 레온의 존재 때문에……. 어린 시절 연구소에 갇혀 갈기를 빼앗기는 탓에 지금은 포필렌이 없이는 잠도 잘 수 없는 상태가 된 레온의 존재가, 자꾸만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보호석들은 다 어떻게 했지?”

“어떤 보호석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제 영지인 소모라에 있던 것들? 그것들이라면 이미 카이로스 님이 탈출하시면서 모조리 가져가시지 않았습니까?”

로빈의 눈빛이 제게 닿자, 스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저 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완은 로빈이 혹여나 이엘을 꼬드기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닙니까? 카이로스 님. 당신이 다 가져가시지 않았습니까?”

“로빈.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야.”

그건 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혹시라도 스완이 로빈의 계략에 넘어갈까, 사전에 두 사람의 대화를 차단하며 다시 흐름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내가 말하는 건 이곳에 있던 보호석들. 올리세스가 모아서 숨겨 놓았던 것들을 묻고 있다.”

“맞습니다. 제가 갖고 있습니다. 사실 전 이곳에 리노 윌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놈은 없고 땅바닥에서 수많은 보호석만 잔뜩 발견했습니다.”

“그럼 공작이 이곳을 공격한 이유도…….”

“이곳을 소모라 대신으로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소모라만큼이나 더러워진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오드의 성력은 세졌고 그의 성력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이곳도 오드 님의 성력이 닿았더군요. 아무리 저희 독기로 바꿔 보려 해도 역부족일 정도로.”

“여긴 정확히 말하면 올리세스의 영지가 아닌 그의 아비인 윌터 백작의 영지니까. 주기적으로 오드 님이 와서 정화를 하는 곳이기도 해.”

“그렇다면 저는 또 헛다리를 짚은 거네요.”

소모라는 스완으로 인해 완전히 정화되었고,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해졌다. 그런 곳에서는 ‘그’를 불러낼 수 없다. 그래서 로빈은 소모라를 대신할 만한 곳을 골랐고, 그의 판단에선 올리세스의 영지가 적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올리세스의 영지는 다른 인간들의 영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보호석들을 발견했다. 마치 자신이 소모라에 은밀하게 쌓았던 것처럼. 그 얘기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소모라의 역할을 대신할 만한 장소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그 보호석은 꽤 큰 수확이었습니다. 어쨌든 올리세스가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포기해. 내가 막을 거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이엘과 로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완이 앞으로 나서며 경고했다.

“나를 희생시켜서 ‘그’를 만나겠다고? 폐하의 아이를 희생시켜서? 감히 너희가 그딴 짓을 하도록 나와 오드 님이 두고 볼 것 같아?”

“카이로스 님. 진정하세요.”

“폐하!”

“저 나자르 님은 확실히 오드 님보다 어리시군요.”

로빈은 다시 잔을 가득 채운 와인을 마시며 입꼬리를 올려 스완을 비웃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오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저 어린 나자르는 얼굴에 모든 감정이 도드라졌다. 저래서는 별 도움도 안 될 텐데.

“그 전에 내가 널 죽일 거야, 로빈.”

“저런. 나자르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내가 널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카이로스 님.”

“…….”

“그만하세요. 쓸데없는 곳에 힘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엘은 스완이 말실수를 하기 직전에 그를 제지했다. 스완도 더는 말을 섞으면 안 될 거라 판단한 건지 입을 다문 채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카이로스 님은 지금 제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리플이 뿌린 독이 몸에 남은 듯한데.”

“그래, 맞아. 그것 때문에 찾아왔어.”

“제가 리플의 독기를 가져가는 대신, 폐하는 제게 소망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공작이 말하는 소망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지?”

“아이요.”

“…….”

“아주 예전에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죠. 아이를 갖고 싶으시다고. 언젠가는 아이를 갖게 되길 소원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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