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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7화 (417/488)

417화

은발의 남자는 제 영지에서 탈출하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혈색이 그때보다 좋아졌다. 독기로 인해 시들시들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생기가 넘쳐흐르는 모습에 로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리플은 죽었는데. 내 수족은 죽어 없어졌는데. 바로 네 손에 죽어 사라졌는데. 넌 나자르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게…….

알고 있다. 나자르가 리플을 직접적으로 죽인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원망을 쏟을 만한 곳이 필요했다.

“정신 차려요, 공작. 그렇게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있다가는 제일 먼저 도태되는 게 그쪽 종족일 거예요.”

가까이 다가온 스완이 로빈의 귀에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뱀의 눈이 가늘어지며 살기가 담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완은 손을 뻗어 로빈의 이마에 얹고 성력을 아주 조금 불어넣었다. 움직일 힘도 없던 로빈은 갑자기 제 안으로 들이닥친 성력에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옆으로 푹 쓰러졌다.

“공작님!”

“로빈 님!”

소리를 지르며 금방이라도 스완을 공격할 태세를 벌이던 뱀들을 이엘이 제지했다.

“잠든 것뿐이니 오해하지 말라.”

“…….”

“네 주인이 염려되거든 지금 당장 저택으로 옮겨 쉴 수 있게 해 주거라. 그는 너무 지쳤어.”

위엄 있는 황제의 명령에 뱀들도 꼬리를 말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리플이 죽고 자신들의 수장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살았다. 단시간에 이곳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로빈이 며칠 밤을 새워 작전을 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무 대책 없이 쳐들어온 건 아니었다.

이엘은 리플의 뒤를 이어 로빈의 비서관이 된 우논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저택의 주인은 올리세스와 그의 아비였는데 순식간에 주인이 바뀌었다.

그땐 어느 영지에서도 볼 수 없는 고풍스런 장식과 건축물이라 모두의 경탄을 자아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하에 갇힌 루벤의 가족과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1차로 이엘이 불을 질렀고, 리플을 잃고 울분을 토할 명목이 필요했던 로빈이 2차로 이곳을 반파시켰다.

그 탓에 저택이 갖고 있던 아름답고 고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그냥 허름한 집의 모양을 겨우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게 꼭 로빈을 닮았다. 이름만 남고 껍데기는 스러져 버린. 조금 전에 로빈이 스스로를 비하하듯 했던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너희의 독기로 인해 살 수가 없구나. 나와 카이로스 님은 정화할 곳을 찾아 그곳에서 머물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고분고분해진 뱀들이 그녀와 스완이 머물 만한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사이 이엘의 눈짓을 받은 스완이 주변을 정화하며 밖의 상황을 살폈다.

황량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스완은 전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어 이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렇게 죽어 버린 영지는 아니었을 터였다. 로빈은 뱀의 영지가 습격당했기에 이곳을 제 영지 대신 삼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스완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차라리 뱀의 영지가 더 살 만했다.

“작정하고 공격한 것 같은데요.”

“…….”

“왜 저희가 아닌, 이곳을 공격했을까요?”

스완의 질문에 이엘도 고개를 흔들었다. 로빈이 무슨 의도로 이곳을 공격했는지는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 그동안 자신과 스완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엘은 스완과 함께 저택을 나와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근위대를 불러 모았다.

“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움직여서 이곳으로 향하도록 해라.”

“예, 폐하.”

하트를 제외한 하이에나들이 뱀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뿌연 연기 속에 몸을 감추고 사라졌다. 이엘이 그들에게 보여 준 것은 피시의 펜던트였다. 정확히는 펜던트 속 꾸깃하게 접혀 있던 지도였고.

“그곳엔 보호석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로빈이 이곳을 친 이유에 그것도 포함될지 몰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스완. 너도 여기가 소모라와 비슷하다는 게 느껴지니?”

“네. 그곳보다 더한 것 같기도 해요.”

갑자기 소모라에 대해 묻는 이엘의 말에 스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확실히 이곳의 독기는 어지간한 정화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소모라를 정화하는 데도 큰 힘이 들었는데 여긴 그보다 더하다. 아무래도 오래 머물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폐하. 없습니다!”

벌써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하이에나 한 마리가 은밀하게 보고했다. 뒤를 이어 속속들이 달려온 하이에나들 역시 고개를 흔들며 동일한 내용을 보고했다.

피시의 말에 의하면 지도에 표시된 곳에 묻혀 있던 보호석의 양이 상당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하나도 없다고? 그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올리세스가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모조리 챙겨서 떠났거나.

“설마 로빈이……?!”

스완은 저가 내뱉고도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다행히 뱀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더 이상 입 밖으로 내뱉어선 안 될 말들이었다.

“일단 로빈이 깨어난 뒤에 확인해 보도록 하자. 근위대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도록. 여긴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까.”

“예, 폐하.”

근위대가 정렬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스완과 하트의 호위를 받으며 로빈이 깨어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엘이 응접실 안으로는 뱀이 들어오지 않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뱀들은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스완. 몸은 괜찮아?”

“전 괜찮아요, 정말로.”

이엘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물론 리플의 독기가 여전히 몸에 남아 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니까.

그래서 이엘이 함께 로빈에게 가자고 할 때 거절했었다. 뱀에게서 도망쳤는데 다시 뱀에게로 향하라고? 게다가 놈의 최측근인 수족을 죽였는데? 자신은 그렇다 치고, 함께 갈 이엘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 지독한 뱀이 어떤 식으로 복수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거절했던 건데.

“로빈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혹시 몰라 이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스완의 말에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리플이 평범한 동족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까지 무너진 상태일 줄은 몰랐다.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올리세스의 영지를 습격하는 데 성공했다는 건 더 놀라웠고.

“지금이라도 여길 나가시겠다고 하면 제가 모시고 나갈게요. 근위대장까지는 어려워도, 폐하 한 분이면 안전하게 영지를 나가는 건 가능해요.”

독기가 가득한 이곳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읽었다. 여차하면 이엘만 데리고 떠나는 게 최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지만, 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자리에서 해결을 봐야 돼.”

“하지만……,”

“쉿. 뱀이 오고 있구나.”

이엘의 말에 스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스완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엘에게 은밀하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자신과 이엘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야 하고, 또…….

스완은 생각을 멈추고 이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울컥거렸다. 마치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했던 그날처럼.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아무리 몇 번 오간 곳이라 해도 드레인이 만든 공간은 이곳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꿈처럼 스며들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번엔 정말 정신과 육체가 모두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못 돌아오면? 그녀의 능력 속에 갇힌 그 소녀들처럼……. 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그냥 마음 편히 계약이 끝나는 대로 호수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곳으로 가서 아버지의 마지막도 지켜보고, 이쪽의 전쟁에도 완전히 손을 떼는 게 내 약한 심신에 더 어울리는 결정이 아닐까.

“스완.”

“네?”

“그리 겁먹지 말렴.”

“…….”

“내가 널 지켜 준다고 했잖아.”

“…….”

“우리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지?”

제 불안한 마음이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는 건 이럴 땐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스완은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며 테이블 아래로 제 손을 내려뜨린 채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래서 데려온 거야. 네가 돌아가야 하니까.”

“폐하.”

“로빈이 네게 남은 독기를 가져가는 대로, 넌 너의 호수로 돌아갈 준비를 하렴.”

“하지만……!”

“드레인과의 연결은 이제 내가 직접 나서야 해. 물론 널 완전히 놔주긴 힘들어. 몇 번 정도는 네 호수에 찾아가서 부탁할 일도 있을 거고.”

이엘이 코를 찡긋하며 스완을 향해 윙크했다. 그녀의 말뜻은 이번 기회에 스완을 이 위험한 상황에서 완전히 놓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헤아린 스완이 꾹 쥐던 주먹을 풀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 가지 않을 거예요.”

“응? 어딜 가지 않겠다는 거야?”

“호수요.”

“무슨……,”

“절 죽이실 줄 알았는데 살려 두셨군요.”

이엘의 말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는 로빈으로 인해 끊겼다. 그녀는 찝찝한 표정으로 스완을 쳐다보다가 로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신을 떠난 뱀이라 해도 본질은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종족이다. 스완을 통해 성력을 받은 로빈은 조금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괜찮아진 모습이었다. 퀭하던 눈도 빛을 되찾았고, 혈색 하나 없이 새하얗던 안색도 많이 돌아왔다.

“사실 죽이신다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공작은 여전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내뱉는군.”

“아니요. 진심입니다.”

“…….”

“꾸역꾸역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저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닌 로빈에게서 튀어나온 게 놀라울 따름이다. 단지 리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이라고 보기엔 그 정도가 너무 과했다.

로빈은 야욕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였다. 그가 뱀의 수장이 되기까지 희생된 혈육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을 텐데, 고작 아끼는 수족 하나에 저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리가.

“리플의 죽음이 공작을 그렇게 만들었나?”

“글쎄요. 저로서도 확신이 안 서는군요.”

“…….”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로빈은 마른세수하듯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리플의 죽음이 삶의 의욕을 없앤 게 아니다. 그냥 제 곁에서 영원히 살 줄 알았던 리플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에 대한 허탈함이 컸을 뿐이다.

“폐하. 제가 신을 떠난 것에 대한 벌을 제대로 받고 있나 봅니다.”

“…….”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걸 보면요.”

“로빈.”

“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는 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살아도 내일은 죽을지 모르는데. 내일을 살아남아도 십 년 뒤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우논이 받은 최고의 선물은 영존하는 생이라는데, 사실 그것도 다 거짓이네요. 매서운 칼날 앞에선 허무하게 죽는 건 인간과 똑같으니.”

“…….”

“대체 이곳에 소망이 있긴 한 겁니까?”

살고 싶은 욕망도 사실은 신의 축복이다. 어차피 죽으면 끝일 목숨인데, 그걸 아득바득 붙잡고 살아가는 의지 또한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게 아니었다.

로빈은 소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스스로의 모습에 실소했다. 이렇게 이질적인 단어도 없다. 뱀과 소망이라니. 신을 떠난 시점에서 소망은 꿈꿀 수도 없었고, 꿈꿔서도 안 되는 단어였다. 그런데도 은연중에 그딴 걸 내 마음에 품고 있었구나. 로빈은 자조하며 웃었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죽은 뒤엔 모든 게 끝나 버린다는 사실이 돌연 허무해졌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야 했지? 이래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잖아.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우논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로빈의 입에서 튀어나온 후회의 말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로빈이 지금 시간을 돌린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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