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오래 살면 여기저기서 듣게 돼.”
“…….”
“완전히 믿을 만한 내용들은 아니지, 물론. 나 역시 다 믿지는 않고.”
“그럼 암컷 용에 관해서도 아는 게 있어요?”
“암컷 용? 글쎄.”
목적은 암컷에 관한 내용이었나? 유클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시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의 하이에나들은 나타니엘에게 맹목적이다. 특히나 영주인 패티스는 그녀를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며 추종하고 있다.
어쩌면 나타니엘이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에 닥쳐올 위험을 없애려, 암컷 용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로선 암컷이 있는 종족은 용이 유일하니까. 그렇게 판단한 유클리드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암컷은 쉽게 만나지 못해. 수컷들보다 더.”
“알아요.”
“그리고 암컷은 모든 판도를 바꿔.”
“모든 판도를 바꾼다고요?”
“그들은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지.”
피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컷이 신을 떠나면서 갖고 있던 신의 축복을 모두 빼앗겼거든.”
“…….”
“신은 그것들을 빼앗아 인간과 암컷 용들에게 고루 나눠 줬어.”
“아…….”
“하지만 너도 알듯이 인간 역시 수컷 용들과 비슷한 짓을 함으로써 신의 축복을 빼앗겼지.”
“…….”
“한마디로 수컷 용과 인간들의 축복이 모조리 싹, 암컷 용들에게 향했단 소리다.”
그 말을 마쳤을 때. 두 사람은 탑의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녹슨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클리드가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피시가 그를 붙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놔. 난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해.”
“그럼 그 암컷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면 어떻게 되나요?”
“…….”
“그녀가 신을 대신할 수 있단 소린가요?”
“신을 대신할 수는 없지. 그건 나자르라고 해도 불가능하잖아?”
“…….”
“하지만 비슷한 정도의 힘을 낼 순 있겠지. 가령 아주 악한 존재를 처리한다거나 하는 것들?”
암컷이 핵심이었다. 스완의 꿈으로 찾아오는 드레인. 어쩌면 그녀가 이 전쟁의 중요한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말이야, 피시 남작.”
“네?”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서 묻는 건데.”
“…….”
“설마 아는 암컷 용이 있는 거야?”
단순히 암컷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구체적인 게 있어서. 특히 대화의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피시의 지칭이 ‘그녀’ 한 사람으로 모여지고 있었다. 예리한 유클리드가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너희 설마…… 암컷 용까지 끌어들인 거야?”
“암컷 용이라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
“들어가요. 리노가 이곳에 있는지 우선 확인하고……,”
“정했어.”
“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리노를 이곳에서 탈출시켜 줄게.”
유클리드의 눈동자에 광기가 도는 듯했다. 그는 원래부터 성격이 괴랄스럽기로 유명하니 저런 모습이 본모습에 가깝겠지만, 확실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끼치게 만드는 광기다.
피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클리드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제게 붙여 준 미치광이라는 타이틀은 역시 이쪽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런 피시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유클리드는 선하지 않은 표정으로 선한 한 마디를 던졌다.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니까, 목숨을 바칠 각오로 너희를 지켜 줄게.”
“유클리드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대체 무슨 생각을……,”
“너희. 암컷을 잡았잖아.”
“…….”
“그럼 이 전쟁은 너희의 압승이야.”
유클리드는 전쟁광인 자신의 안목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때 연회에서 두 마리 수컷 용을 봤을 때도 확신했지만, 여기에 암컷 용까지 더해졌다니. 이건 그냥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 아닌가.
“뭔가 오해를 하시나 본데……,”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어.”
“…….”
“암컷 용을 언급했다는 것만으로도 너흰 해답을 찾은 듯하니.”
“…….”
“내가 너희를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시켜 주면. 그땐 지금과는 전혀 다를 거야, 우리의 관계가.”
“무슨…….”
“너희와 피를 나눈 혈육처럼 가까워질 테니까.”
유클리드는 죽여야 할지, 아니면 완전히 우리 편으로 만들어 끌어들여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게 됐다. 선택은 자신들의 몫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지 않는 전쟁이 무슨 전쟁인지 네게 보여 줄게, 하이에나.”
“…….”
“잘 보고 배워.”
유클리드는 안광을 번뜩이며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제 눈앞에 피와 살이 곳곳에 낭자한 전쟁터가 보이는 듯하다. 벌써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애초부터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유클리드는 히죽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려 문을 열었다.
*
“공작님.”
“…….”
“로빈 님. 폐하께서……크흑!”
“누가 허락 없이 들어오라고 했지?”
눈이 붉게 충혈된 로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우논을 향해 매서운 독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독에 중독된 우논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검은색 제복을 입고 눈 아래가 시퍼렇게 변할 정도로 지독한 슬픔에 빠져 있던 로빈은 건조한 시선으로 우논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펄떡거리며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게 보기 흉하면서도,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력을 다해 죽음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빈은 손을 뻗어 우논에게 뿌려진 제 독을 거둬 갔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우논은 캑캑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왜 넌 그렇게 쉽게 떠났지. 저놈처럼 살기 위한 발버둥은 쳐 봤나. 아니. 애초에 왜 나자르의 뒤를 쫓아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화를 자초했지? 그 나자르는 내가 직접 살려 보내 준 것인데 왜 너는 쓸데없이 놈의 뒤를 쫓아서…….
이렇게 생각하다간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로빈은 재빨리 상념에서 벗어나 쓰러진 우논을 향해 물었다.
“보고할 게 무엇이냐.”
“폐, 폐하께서,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
“지금 막 권역의 끝을 넘으셨다고 합니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 낸 우논이 힘겹게 일어섰다가 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리플이 죽고 뒤를 이어 로빈의 비서관이 되었지만 역시나 자신은 리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을 듯하다. 우논은 조금 전 제 목숨이 달아날 뻔한 상황을 떠올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폐하를 맞을 준비를 해라.”
“예, 예!”
다급히 대답하곤 줄행랑을 쳤다. 로빈은 겁을 먹고 우논이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리플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죽음은 늘 가까웠고 언제든 찾아오는 일이었지만 로빈은 한 달이 넘도록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였다.
왜일까. 왜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왜 아직도 리플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내 부모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슬프지 않았는데. 기억도 안 나는 내 형제가 죽었을 때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는데.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이 마음이 리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인지, 혹은 미련인지. 사실 로빈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 울분을 다른 곳에 퍼부었다. 다짜고짜 윌터 백작의 영지로 쳐들어가 때마침 비어 있던 영지를 전부 불태우고 독기로 채워 버렸다. 언젠가 이곳을 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습격할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분노로 이곳을 공격해 영지를 빠른 속도로 탈취했다고는 해도, 로빈에게서 슬픔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제 영지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넋을 놓고 홀로 상념에 젖어 지내곤 했다.
“공작.”
그리고 그건 황제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빈은 넋을 놓고 있느라 그녀가 지척에서 저를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로빈 공. 그녀의 억센 발음에 그제야 로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올리세스의 저택 밖으로 나와 황제와 그녀의 무리를 맞이하고 있었고, 권역을 막 지났다던 이엘은 어느새 윌터 백작의 영지 안에 친림해 있었다. 로빈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세를 낮춰 황제를 맞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
“이렇게 몸소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낮고 탁한 로빈의 목소리를 듣던 이엘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눈동자에 어려 있던 탐욕과 광기가 사라졌다. 초점이 흐려진 채 멍하니 시선을 마주한 뱀의 모습은, 지금껏 그녀가 알던 그 로빈이 아니었다. 미약하게나마 분노가 남아 있었으나 그 또한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로빈은 한없이 무력해 보였다.
로빈은 그녀의 눈빛만 보고도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묻지도 않았는데 이곳을 습격한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의 영지가 습격을 당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여 다른 터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영지의 주인은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까요.”
“…….”
“어차피 놈은 반역을 꾸미며 제도를 급습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가 이곳을 습격한 것에 대해 폐하께선……,”
“로빈.”
“…….”
“그런 상태로 이곳을 용케 공격했군.”
그녀의 매서운 지적에 로빈은 실소했다. 맞는 말이다. 이런 주제에 용케 이곳을 점령하다니. 뱀의 전력이 조금이라도 허술했거나 이곳의 영주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이번 습격은 도리어 뱀의 패배와 전멸로 이어졌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공격한 건 뱀의 수장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공작의 영지를 대신한다기엔 영지 절반 이상이 불에 타지 않았나? 이래서는 습격당했다던 공작의 영지보다 못할 듯한데.”
“그게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까?”
“…….”
“가진 게 없는 비루한 종족답지 않습니까?”
약고 치졸한 방법을 택하더라도 목이 꼿꼿한 자가 로빈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엘의 앞에 있는 뱀의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 작고 약해 보였다. 이엘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길게 쉬다가 제 뒤에 있던 자를 앞으로 보냈다.
“카이로스 님. 정화해 주세요.”
“예, 폐하.”
머리 색깔을 나자르의 은색으로 탈색한 스완이 이엘의 앞으로 나와 손을 뻗었다. 카이로스라는 이름을 들은 로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