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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5화 (415/488)

415화

‘그게 가능할까요?’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무엇보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안에 있는 우린 알 길이 없잖아. 전쟁이 한창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황제와 합류해 그녀를 도와야 하니까.’

유클리드의 말에 피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번복은 없다. 최대한 빨리 리노와 피시를 데리고 탈출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게 오늘 새벽이었다. 유클리드는 새벽에 나눴던 피시와의 대화를 곱씹고는 침대 아래에서 커다란 천으로 덮어 놓은 바구니를 꺼냈다. 천을 들춰서 약병이 잘 담겨 있는지 확인을 마쳤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약병엔 포필렌으로 만든 약물이 들어 있었다. 이걸 감시병들에게 먹여 놈들이 쓰러지면 피시와 함께 리노가 있는 탑 안으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여긴 포필렌에 중독된 인간들이 많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어느 정도 포위망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유클리드는 약병을 노려보며 비웃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모리아에서의 사건이 떠오른 탓이다. 올리세스가 포필렌으로 이종족을 길들일 수 있을지 실험하는 건 관계없었다. 사실 제 종족인 스라소니들 몇 마리를 데리고 실험한 것 역시, 동족에게 크게 미련을 갖지 않는 유클리드로서는 구태여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건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별개지. 감히 인간 주제에 동맹을 맺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뒤에서 그딴 짓을 벌이다니. 그래서 홧김에 모리아로 쳐들어가 포필렌이 재배되던 토지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탓에 전쟁이 발발할 뻔해서 황제로부터 소집 명령이 떨어졌고 제도에 모여 귀족회의가 열리게 됐지만.

어쨌든 나타니엘이 시키는 대로 올리세스와 다시 손을 잡는 척, 모리아 사건을 잊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유클리드는 한순간도 그때의 일을 잊은 적이 없다. 유클리드는 약병을 손에 쥐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 언젠가 놈의 아가리에 포필렌을 욱여넣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니.”

사실 제 취향대로 하자면 피 튀는 현장이 더 구미가 당기지만, 유클리드는 올리세스만은 그렇게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저가 만든 포필렌이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지, 유클리드는 올리세스에게 똑똑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약병이 든 바구니를 끌어안고 고요한 새벽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마을에 소동이 벌어졌다. 언뜻 듣기론 올리세스의 본거지가 되는 윌터 백작령이 뱀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쪽에 남아 있던 자들은 생사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스타로와 일부 병사들이 급하게 마을을 떠났고 덕분에 피시와 함께 리노가 있는 곳으로 잠입하는 게 쉬웠다. 타이밍이 좋았다.

“저들에게 뭘 준 건가요, 유클리드 님?”

“포필렌.”

“네?”

“이렇게 해야 나중에 걸려도 의심을 안 사. 물론 걸리기 전에 탈출하면 제일 좋지만.”

냉정한 유클리드의 말에 피시는 쓰러진 감시병들을 힐끗 돌아봤다. 스라소니의 말이 옳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오늘 같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피시는 인간들에게 시선을 돌리곤 유클리드와 함께 녹색 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은 상당히 오래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 2차 전쟁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더니 그 이후로 조금의 수리도 없었던 모양이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을 때마다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본체로 돌아가 뛰어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유클리드와 피시는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사이좋게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유클리드 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넌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르네?”

“네?”

“예전엔 미치광이 셋째 왕자님으로 불렸잖아.”

“그건…….”

“지금 보니까 이제 막 세상을 나온 새끼에 가깝고.”

“…….”

“말이 많다는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알고 있어요.”

내가 귀찮은가 보다. 피시는 유클리드의 시큰둥한 반응에 열었던 입을 다물어 버렸다. 풀이 죽은 듯한 하이에나의 모습에 유클리드가 피실 웃었다.

그러곤 시선을 위로 향하며 아직 까마득한 꼭대기를 한참 쳐다봤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다 오르지? 지금이라도 본체화를 해서 그냥 오를까? 설마 무너지기야 하겠어?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려 피시를 쳐다봤다.

시끄럽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소극적인 건지, 아무튼 피시는 제 뒤를 조용히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들고 있는 램프로 좌우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마치 토라진 새끼 같아서 유클리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알겠어. 뭐가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요?”

“어. 대신 하나만. 참고로 스라소니에 관해 물어보는 거면 답 안 해. 누누이 말하지만 난 네 동맹이 아냐.”

“스라소니 말고 용에 관해서요.”

“…….”

“용에 대해 아시는 게 있어요?”

용? 이 타이밍에 뜬금없이 용에 관해 묻는 피시를 의아스럽게 쳐다봤다. 그러곤 자신이 용을 언제 언급한 적이 있나 골몰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클리드는 다른 이종족들에 비해 오래 산 편이니 누구라도 그가 용에 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용은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니.

다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제게 용을 묻는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하필이면 몇 달 전에 재규어의 영지에서 노아에게 용에 대해 얘기했기 때문에.

“노아에게서 들었나?”

“네? 뭘요?”

아닌가? 하긴. 노아는 그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다가 저 하이에나처럼 딱히 동맹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니. 노아와 하이에나가 정보를 주고받았을 리는 없고. 그럼에도 유클리드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편 피시는 태연하게 굴며 유클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대외적으로 늑대와 황실은 갈라선 상태로 알려져 있으니 노아에게서 정보를 들은 것처럼 보이면 안 됐다. 아무리 이엘의 편에 선 유클리드라고 해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유클리드에게서 정보를 빼돌려. 용에 관한.’

올리세스의 영지에 있을 때 노아가 피시를 불러내 그렇게 지시했다. 몇 달 전, 재규어의 영지에서 열렸던 마지막 만찬식에서 유클리드는 밀로와 킨을 바라보며 단번에 용이라고 알아챘다고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노아는 과거에 용이 신에게서 무엇을 훔쳤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유클리드가 하는 이야기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제가 유클리드 백작을 만날 리가 있겠어요? 저보다는 공작님이 만날 확률이 더 클 텐데.’

‘만약을 가정하는 거야. 네가 됐든, 내가 됐든. 놈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그에게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빼돌려야 해.’

‘스라소니를 속이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맞아. 속여선 안 돼.’

‘…….’

‘놈의 마음을 사야지.’

그때만 하더라도 노아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정말 놀랍게도 피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유클리드를 만나게 됐고, 이렇게 같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갑자기 용에 관해 묻는 이유는?”

“유클리드 님은 오래 사셨잖아요, 저완 다르게.”

“…….”

“2차 전쟁 때 용이 내려와서 한바탕 휘젓고 갔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전에도 용을 보신 적이 있나 해서요. 전 2차 전쟁 때 무서워서 영지에 숨어 있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거든요.”

2차 전쟁은 이종족이 인간을 학살했던 전쟁을 말하는 건데, 저 하이에나는 그 2차 전쟁 때도 겁에 질려 있었다니. 하이에나들이 뱀과 손잡고 앞장서서 인간들을 도륙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저 어린 하이에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땐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니까. 제 몸 하나 건사하지도 못했겠지.

“내가 듣기론 폐하의 영지 시찰 순서가, 재규어의 영지 이후에 몇 개의 영지를 지나고 그다음이 하이에나의 영지였다고 하던데.”

“…….”

“그대의 영지에 그 용 두 마리가 함께 갔었나?”

유클리드의 의심스런 질문에 피시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밀로와 킨의 존재는 이미 유클리드에게 들켰기 때문에, 차라리 하이에나의 영지에 두 용이 찾아온 게 궁금하다는 이유로 질문하는 게 낫다는 판단하에서였다.

“하고 싶은 질문이 뭐야?”

“용에 관해서 아시는 걸 다 말해 주세요.”

“난 하나만 물어보라고 했는데?”

“그러니까요.”

“…….”

“질문은 하나 맞는데요. 아시는 것 다 알려 달라고.”

뭐 저딴 질문이 다 있어. 유클리드는 낯짝을 뻔뻔하게 들이미는 피시를 황당하단 표정으로 지켜봤다. 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어려운 것을 묻고 있는 하이에나의 얼굴에 유클리드도 할 말을 잃었다. 자신도 뻔뻔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데, 저보다 더한 놈이 나타날 줄이야.

“그대가 생각해도 질문이 참 심술궂다는 생각 안 드나?”

“전혀요. 백작님에게 질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요. 심술궂게 군 적 없어요.”

“됐어. 말을 말아야지.”

말장난은 질린다. 유클리드는 혀를 차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피시와 투닥거리며 올라오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른 상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그래서 돌연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유클리드는 기분이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그러면서 선심 쓰듯 고개를 돌려 피시를 쳐다봤다.

“좋아. 특별히 얘기해 주지.”

“정말요?”

“그래. 어쨌든 난 폐하의 환심을 사야 하는 입장이고, 넌 폐하의 애첩이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너도 내 이야기를 폐하께 잘 전해 달라는 뜻으로 말해 주는 거야.”

“좋아요. 그럴게요.”

흔쾌히 터져 나온 피시의 대답에 유클리드는 피실 웃고는 두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아주 옛날의 기억부터 천천히 헤집기 시작한다.

“용은 몇 번 봤었지. 근데 나라고 해서 용을 자주 본 건 아니야. 아주 옛날에도 용은 우리와 교류가 없었으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걔넨 이종족이지만 이종족이 아닌 종족이잖아? 굳이 따지자면 인간, 용, 이종족. 이렇게 세 종족으로 나눴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사실 종족의 구분을 정한 건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들은 용에 관해 잘 모르니 그들이 이종족으로 분류된 걸 테고.

“용들은 원래 신의 세계에 함께 살았어. 그런데 어느 날, 욕심에 눈이 먼 몇몇 용들이 신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거지. 그게 신의 영역에서만 피어나는 무슨 열매였는데, 확신은 못 하지만 대충 무슨 열매인지는 추측은 가능해.”

“그게 무슨 열매인데요?”

“신의 권능을 담은 열매겠지.”

“…….”

“그러니 그걸 훔쳤다는 이유로 그 용들은 신의 세계에서 쫓겨나게 된 거고.”

여기까진 피시도 노아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이다. 노아는 피시에게 유클리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파악하라고 했다. 그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언젠가 위험을 막기 위해서 유클리드를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노아의 예상대로 유클리드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선택을 해야 한다. 유클리드를 죽여 후환을 없앨지. 아니면 그를 완전히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지.

“그게 수컷들이야. 수컷 용들은 모두 신에게서 떨어졌어.”

“백작님은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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