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그녀의 오빠인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꽤 됐지만, 하트를 비롯한 동맹족들은 여전히 황자에 관해 알지 못했다. 이엘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황자에게 신경 쓸 만큼 상황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전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나타니엘의 유일한 혈육이고,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바꾸면서까지 사랑한 형제였다. 이엘이 아르세니온을 지키라고 명한다면, 하트는 원치 않아도 그 명령을 따라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황자에 관해 모르는 게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황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
“그는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입니까. 그를 깨우실 겁니까? 아니. 애초에 그건 계약이라고 하셨으니 언젠가는 황자도 깨어날 것이고……,”
“하트 경. 진정해.”
“…….”
“경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정말 처음 보는 듯해.”
“폐하.”
“눈치챘잖아.”
“…….”
“아이가 생겼어.”
달거리가 끊겼다. 긴 시간 ‘그’와의 계약으로 달거리 없이 살았다가 다시 시작되었던 달거리가 끊겼다. 그건 하나를 의미한다.
“폐하. 감축드립니다.”
“첫 번째 축하를 그대에게 받으니 기쁘구나.”
“설마 공작님은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응. 나도 확신하게 된 게 며칠 전이거든.”
피시의 일로 오드와 만났을 때, 오드에게서 확인을 받았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응. 고마워, 오드.’
‘그렇게 기다리셨던 아기님인데, 그리 기쁘시지 않은 듯하군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피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기뻐해도 될지.’
‘폐하. 그래도 공작에겐 말씀하세요. 그가 얼마나 아기를 기다렸는지 아시잖아요.’
‘…….’
‘폐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며, 곧장 저를 찾아와 소식을 전했던 게 노아 공작인걸요.’
오드의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만 봐도, 노아가 제 자식을 얼마나 사랑할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역시나 말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면 노아는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보호하려 들 테니까. 조금 전처럼 이엘의 곁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와도 그는 고집을 부리며 곁에 남았을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지으셨습니까?”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기쁨 때문인지. 하트는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는 하트의 모습이 정말로 제 오빠 같아서……. 이엘은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떼어 내곤 작게 속삭였다.
“응. 테오도로 레비 무어 르뷔아.”
“남자아이를 예상하십니까? 혹 오드 님께서 남자아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 오드는 내게 말하지 않았어.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남자아이 같아.”
“그렇군요.”
“테오가 태어나면 경이 검술 스승이 되어 줘.”
“물론입니다. 그때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기님의 좋은 숙부도 될 것입니다.”
“후후. 맞아. 내가 그렇게 부탁했었지.”
숙부라는 단어를 뱉는 하트가 퍽 낯설면서도 정겨웠다. 그는 정말 테오도로의 좋은 숙부가 될 것만 같다.
테오도로가 태어나면 하이에나 세쌍둥이들이 모두 숙부가 되겠다며 나설지도 모르겠다. 그럼 패티스는 어떤 숙부가 될까. 테오도로에겐 엄하고 베아트리스에겐 한없이 약하겠지. 피시는 관계없이 두 아이에게 다 무를 테고. 하트는 정말 스승 같은 숙부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까 곧 오빠가 눈을 뜰 거야.”
“…….”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아마 오빠가 먼저 눈을 뜨고 내 배 속의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겠지.”
“…….”
“그러니 오빠가 이곳에 왔을 때. 경만큼은 내치지 말아 줘.”
이엘의 명령이라면 응당 그렇게 할 것이지만, 솔직히 하트라고 해서 아르세니온이 달가울 리 없었다. 황자는 그녀의 발목을 잡는 존재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죽었더라면 그 이상한 거래에도 휘말리지 않고 폐하의 아이 역시 지켜 낼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는 그런 생각에, 아르세니온을 제대로 죽이지 못했던 노아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야겠지. 그녀의 명령이니까. 그녀의 부탁이니까.
내 가족이 되어 준 나타니엘의, 진짜 가족이니까. 하트는 결국 이엘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쉴래.”
“쉬십시오. 일어나시면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경도 조금 쉬면서 해. 아직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예.”
이엘이 깊은 수마에 빠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하트는 침실을 나올 수 있었다. 늘 불면증에 살았던 이엘이 최근 들어 자주 잠드는 것을 보며 안도했었는데, 아무래도 아이를 가진 탓에 몸에 변화가 생겼던 모양이다. 하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테오도로.”
가만히 아이의 이름을 내뱉은 하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를 닮았다면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일 거라는 생각에. 이런 애착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동족도 아니고 심지어 인간인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의 아이를 향한 지독한 애착감에 하트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동시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그’에게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피어났다.
*
유클리드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문 앞에 진을 친 인간들을 쳐다봤다. 아주 작정한 모양인지, 개중 몇은 손에 보호석을 쥐고 무장한 채였다.
“그렇게 보호석까지 들고, 쉬고 있는 귀빈에게 새벽부터 다짜고짜 찾아오는 건 무슨 무례지?”
“저희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주제에 나더러 너희 전쟁에 참전해 달라?”
“올리세스 남작님의 전언이십니다.”
저놈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스타로였던가. 가짜 사제 놈. 유클리드는 눈동자를 굴리며 아스타로를 필두로 한 인간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그들은 명령에 의해 유클리드가 머물고 있는 객실까지 오긴 했지만 여전히 이 스라소니가 두려웠던 건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은근하게 시선을 피해 버리곤 했다.
그게 우스웠던 유클리드는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앞에 서 있던 아스타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놈은 곧 태연한 듯 웃으며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저희는 동맹이 아닙니까?”
“글쎄. 너희의 영주가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동맹이니 백작님을 손님으로 받아들여 마을에 들어오실 수 있게 한 겁니다.”
“그럼 너희는 동맹인 나를 믿지 못해, 그렇게 보호석으로 무장하고 쳐들어왔나?”
“…….”
“그것도 나는 이 마을에 홀로 들어왔는데? 게다가 사실상 너희가 내게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유클리드의 지적에 아스타로도 할 말이 없었던 건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클리드도 언제까지 올리세스의 참전 제안을 거절할 순 없다. 이번엔 논리적인 말로 밀어냈지만 올리세스는 스라소니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유클리드는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 쪽을 힐끔 쳐다봤다. 전쟁은 시작됐다. 그녀의 곁에 있는 자들과 올리세스의 편에 선 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하고 있을 여러 종족들까지. 과연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아, 근데 전쟁 제안을 거절하는 건 또 처음이네. 그 피 터지는 곳을 거절하는 날이 오다니. 유클리드로서는 엄청난 결심을 한 셈이었다.
“혹 저희가 백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요?”
그제야 아스타로가 숙이고 들어왔다. 저 주제도 모르는 놈은 올리세스가 없는 이 마을에서 권력자 노릇을 하더니, 저가 정말 나자르라도 된 줄 알았나. 건방지게 하찮은 인간 따위가 제멋대로 굴고 있다. 유클리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소파에 앉았다.
“이봐, 아스타로 님. 우리가 아무리 동맹관계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대하면 곤란해.”
“…….”
“올리세스 남작이 정말로 내가 전쟁에 동맹군으로 참전하길 바란다면 직접 부탁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편지로라도 소식을 전했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 그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나쁜 건 아닐 테고 말이야.”
“…….”
“설마 날 그 정도 취급도 안 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그러면서 뻔뻔하게 부탁을 했을 린 없고.”
“알겠습니다. 제 판단이 경솔했습니다. 올리세스 님껜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클리드의 지적에 아스타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판단을 이제야 한 모양이었다. 아스타로는 다시금 양해를 구하며 무리와 함께 유클리드의 공간에서 나가 주었다.
“귀찮게 됐네.”
타이밍이 좋지 않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리노를 납치해서 데리고 나갔어야 했는데. 예상치 못한 올리세스의 습격으로 인해 피시는 이곳에 잡혀 왔고, 자신은 올리세스의 동맹이란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을에 갇혀 있다시피 머무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지금처럼 동맹인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붙잡은 거겠지.
하지만 제일 귀찮은 것은 피시를 향한 감시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오히려 리노보다 더 많은 감시병이 피시의 감옥에 붙었다. 이유를 특정할 수 없었던 유클리드에게 피시는 주저하며 고백했었다.
‘제가 올리세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니까……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제게 혹하도록이요.’
‘뭐? 그게 사실이야? 올리세스가 어떤 자인지 알고 그런 짓을 했어?’
‘알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의 관심을 받아야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어제 새벽 피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가 갇힌 지하를 찾았던 유클리드는 피시로부터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미인계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럼 일부러 여기에 붙잡혀 왔던 거야?’
‘이것까지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에요. 제가 처음 볼일이 있던 건 그의 영지였으니까요. 거기서 확인해야 할 장소가 있었어요. 그 일의 연장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만요.’
‘그래서. 확인해야 한다는 놈의 영지에서 뭔가 찾긴 했나?’
‘네. 보호석이 있었어요.’
‘보호석? 그게 왜?’
‘그 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리노라도 만나 보면 좋을 텐데, 그것도 쉽지 않으니까요.’
피시는 감시가 소홀해지는 새벽이면 유클리드의 도움을 받아 지하에서 탈출해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교도의 시발점인 이 마을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대완 다르게 별 소득이 없었다. 윌터 백작령이 아니라면 여기밖에 없을 텐데.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한편 피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클리드는 뭔가 생각한 건지 피시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네가 이곳에 잡힌 덕에 리노가 있는 탑의 감시가 허술해졌어. 내가 감시병들의 시선을 돌려 볼 테니까 탑에 진입해서 리노를 만나 보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