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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3화 (413/488)
  • 413화

    짧은 탄식과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레온은 조금 전까지 린다가 서 있던 곳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통증이 사라지며 그녀의 환영까지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레온은 눈물로 번진 제 얼굴을 손으로 대충 쓸어내리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그녀가 나타난 걸까. 입을 감쳐물며 고민에 잠겼던 레온은 별안간 란트를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후작님? 후작님! 몸 상태가……!”

    “경은 내 어머니에 관해 잘 알고 있나?”

    “예?”

    레온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눈을 크게 치뜨고 되물었다. 그의 어머니라면 생물학적 어머니인 린다를 말하는 걸까, 그를 길러 준 루나를 말하는 걸까. 레온은 단 한 번도 린다를 언급한 적이 없으니 후자인 게 당연했지만, 그렇다면 자신을 불러서 물어보는 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란트는 루나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후작님, 설마…… 리, 린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경에게 루나 님을 물어봤겠나?”

    “아니…… 그게요, 조금 당황스러워서…….”

    란트의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자의 직계를 보좌해 온 가문이었다. 그러니 린다에 관해서도 제일 잘 알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린다 님이 살아 계실 땐 아직 그분께서 사자 가문을 승계받기 전이셨고, 저 또한 아버님의 뒤를 이어받기 전이었던 터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린다 님은 왜…….”

    “숙부님을 만나 봐야겠다.”

    레온의 숙부라면 지금 제국에 세워지기 전, 레온이 왕으로 있을 때 그 곁을 보좌하던 후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어린 조카가 왕이 된 것이 염려된 탓에 매번 지적과 반대를 내세워, 초기엔 레온과 사이가 멀었던 자였다.

    이엘이 황제가 되고 레온이 다시 후작위를 받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와 멀어져 영지 내에서 조경 사업에만 집중하며 살고 있었다.

    “경이 염려하는 것처럼 나쁜 일은 아니야.”

    “그럼 어째서…….”

    “어머니가 뭔가 단서를 남겨 놓았을지도 몰라.”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금방 데리러 올 테니까 조금만 버티라고……. 하지만 레온이 전해 듣기론 린다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레온을 낳자마자 아이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곧장 연구소를 탈출했고, 전쟁으로 죽는 날까지 명예로운 전사로 싸웠다며.

    잊고 살았던 그녀의 흔적을 찾아야 할 때가 왔음을, 레온은 직감했다.

    *

    “뭐라고? 로빈이 왜 올리세스의 영지를…….”

    “폐하께서도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전혀. 오히려 날 공격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엘이 헤르몬 산을 떠나 포르 자작령에 도착했던 새벽,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전해졌다. 올리세스가 제도를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끌고 떠나는 바람에 비어 버렸던 윌터 백작령이 뱀으로부터 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리플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로빈에겐 특별한 수족이었으니 리플의 죽음이 다른 뱀의 죽음보다는 큰 충격을 안겨 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로빈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오래 슬픔에 잠겨 살았다.

    그래서 이엘은 노아에게 말한 대로 로빈이 정신을 차리면 곧장 자신들을 공격할 거라 생각했다. 혹은 스완을 직접적으로 데리고 탈출했던 호랑이에게 화살이 향하거나.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로빈은 이엘이나 호랑이가 아닌 올리세스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예 작정하여 습격했단다.

    현재는 뱀이 뿌려 놓은 독기가 윌터 백작령에 농도 짙게 깔린 터라 외부에서도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게 마치 리플의 죽음에 대한 복수처럼 느껴졌다.

    “왜 내가 아닌 올리세스에게 복수를 했을까. 그렇게 해 준 덕에 우리 쪽은 시간을 벌게 됐는데.”

    당시 올리세스는 제도로 향하는 중이었고, 이엘과 동맹족은 제도로부터 떨어진 헤르몬 산에 있을 때였다. 그녀는 스완을 통해 패티스에게 전쟁을 준비하라며 미리 지시해 두긴 했지만, 패티스와 앤디만으로는 제도가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래서 자신들과 합류하기 위해 온다던 조르단 공작을 제도로 돌려보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뜻밖에 로빈이 윌터 백작령을 완전히 쓸어 버린 덕에 올리세스는 보급로가 끊기고 앞뒤로 둘러싸이는 형국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뱀이 뭔가 이득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습격하는 바람에 뱀도 전력의 손실이 컸다고 한다. 결국 로빈이 한 짓으로 이엘만 이득을 본 셈이었다.

    “로빈은 원래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입니다. 가장 아끼는 수족을 잃고 제정신이 아니겠죠.”

    “그렇다 해도 무슨 생각인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어. 스완 때문이라도 로빈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놈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파악해야 돼.”

    로빈의 영지에서 도망치던 스완은 리플에게 붙잡혀 독기에 당했고, 그걸 떨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리플은 죽어 버렸다. 로빈의 입장에서 스완은 리플의 원수일 터였다. 리플이 그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움직였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객관적인 이유를 차치하고, 로빈의 주관적인 입장만 본다면 스완과 호랑이는 리플의 원수겠지.

    하지만 리플이 죽기 직전에 퍼뜨린 독기로 인해 스완은 상처를 입었다. 원래 뱀은 개체마다 갖고 있는 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독제 역시 각기 달랐다. 즉 리플의 독은 리플의 해독제로만 제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해독제를 줄 수 있는 리플이 죽어 버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종족의 수장인 로빈이 직접 스완에게서 리플의 독기를 가져가는 방법밖에는.

    “정말 로빈을 만나실 겁니까, 폐하?”

    “노아. 놈들의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지금 스완에겐 숨 쉬는 것도 버거울 거야. 그나마 성력으로 억누르는 정도겠지.”

    “하지만 로빈이 순순히 스완의 독기를 제거해 줄 리 없습니다. 어쩌면 그걸 노리고 저런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는 건지도 모릅니다. 폐하와 스완을 제 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로빈은 아직도 윌터 백작령에 있는 건가?”

    “예, 맞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내가 그곳으로 오기만을 기다리나? 이엘은 종잡을 수 없는 로빈의 행보에 골머리를 앓았다. 당장 이곳에서 동맹족을 모아 올리세스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하지만, 로빈이 올리세스의 영지를 습격하는 바람에 도리어 이엘에겐 쉴 틈이 생겼다.

    그래, 맞다. 로빈은 일부러 시간을 벌어 준 거다. 그녀가 올리세스와의 전면전에 들어서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 못다 한 이야기에 마무리를 찍고 이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올리세스를 대신 쳐서 이엘에게 약간의 시간을 벌어 준 게 틀림없다.

    “노아. 스완을 데리고 제도를 빠져나올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노아가 집무실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스완에게 신호를 보냈다. 노아가 곧 널 데리러 갈 예정이니 미리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말을 남겼다.

    ― 예? 제가 가면 제도는 위험해요. 올리세스의 군대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자리를 비울 순 없어요!

    예전 같았으면 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말에 냉큼 나왔을 텐데. 이젠 자기 자신보다 함께하는 무리를 더 소중히 생각하고 책임지려는 스완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면서 못내 대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엘은 단호하게 스완에게 준비하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백조는 한참 툴툴거리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폐하. 지금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뱀의 습격으로 멈췄다고는 해도, 제도 근처에 깔린 올리세스의 병사가 상당할 거야. 그러니 조심히 다녀와.”

    준비를 마치고 나온 노아가 이엘의 경고를 듣곤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실 오드가 성력을 사용해서 다녀오면 훨씬 빠르겠지만 현재 그는 포르 자작령에 살던 영지민들을 일라이저의 영지로 한꺼번에 이주시키느라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성력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스완이 오드처럼 성력이 완전하여 이곳까지 먼 거리를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요령이 좋은 노아를 보내 데리고 오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 이엘은 노아에게 알폰스를 비롯한 늑대 몇을 데리고 함께 가라고 했지만, 그는 혼자 움직이는 편이 눈에 덜 띌 거라며 홀로 제도로 떠났다.

    “우린 이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우선은 진영을 바꿔서……아!”

    “폐하!”

    “폐하!”

    떠나는 노아를 배웅하고 다시 포르 자작의 저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이엘이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 뒤에서 그녀만 주시하고 있던 하트가 재빨리 이엘을 붙잡은 덕에 넘어지는 참사는 면했다. 하트는 이엘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를 제 품에 안아 올렸다.

    “우선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잠깐. 괜찮아,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침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트의 목소리엔 확신이 차 있었다. 이엘은 그가 눈치챘음을 알았다. 결국 집무를 뒤로하고 그녀는 하트와 함께 침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 자작령은 영지 자체로 보면 자작이 소유하는 영지치고는 큰 편이었으나 영지민의 숫자가 적었고 저택도 아담한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영지가 알뜰하고 소박하게 돌아가는 곳이라, 이엘은 이 영지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건국한 이래로 제대로 쉬어 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패티스가 제도를 찾을 때면 이엘은 자신의 별저에서 쉬거나 포르 자작령과 같이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영지에 들르곤 했다. 그래서 코르넬의 저택엔 아예 그녀가 쉴 만한 개인 서재와 침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폐하.”

    “잠깐만. 누운 뒤에 얘기하자.”

    무거운 몸을 움직여 침대로 향했다. 이엘이 포근한 침대에 몸을 완전히 누운 것을 확인하고 하트는 이불을 끌어 잘 덮어 주었다. 그는 옆에 두었던 작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두고 그곳에 앉았다. 이엘은 옆으로 누운 채 하트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아주 좋은 상태야.”

    “…….”

    “어떻게 알았어?”

    “늘 폐하 곁에서 호위하고 시중들고 있는 게 접니다. 그러니 폐하의 작은 변화에도 예민해져야 합니다.”

    처음 하트가 근위대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두가 저런 감정 없이 무딘 놈이 어떻게 그녀를 보필할 수 있겠냐며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하트의 눈빛엔 그 누구보다 커다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이엘은 살짝 웃으며 이불 밖으로 제 손을 뻗어 하트에게 내밀었다.

    “손잡아 줄래?”

    그녀의 부탁에 하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양손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이엘의 손이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하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온도를 높여 주기 위해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경이 그랬지?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경이 제일 먼저 했다고.”

    “예.”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아마 그날이었던 것 같아. 내가 이카르의 영지에서 술에 취했던 그 밤.”

    “…….”

    “내가 경에게, 경을 보면 내 오빠가 떠오른다고 말했던 그 밤.”

    하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줌으로써 그녀의 추측이 맞다고 답했다. 이엘이 또 한 번 웃었다.

    “지금 또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정말로 경을 보고 있으면 아르세니온이 떠올라.”

    “…….”

    “그 애도 나와 같이 자랐다면…… 오드의 성력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자서 잘 자랐다면. 지금쯤 그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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